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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다
위기에 처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다
  • 김공회
  • 승인 2022.05.04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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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⑧ 비판적 사회과학의 복원을 위하여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비판적 사회과학에 친화적인 주제라고 여겨지는 
불평등, 양극화, 가계부채, 세대갈등, 청년실업 등이 
경제학은 물론 사회과학 전반에서 가장 ‘뜨겁게’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사회’와 ‘시대’를 고민하게 된 이들과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연구자로 사는 건 고단한 일이다.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갖기도 어렵고, 연구의 과정과 결과를 나눌 동료집단도 턱없이 부족하다.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못 하니, 자괴감만 쌓인다. 그런데도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 연구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 그들은 누구인가.

대학원에 가고 석사 이상의 학위를 따는 것이 연구자의 필수 요건은 아니겠다. 중요한 건 특정 주제에 전문적으로 천착해본 경험이다. 그게 없다면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담론계에서 ‘연구자’는 조금 더 특수한 존재다. 앞에 ‘인문·사회과학’이라는 구절이 붙으면, 그 의미가 한층 더 미묘해진다. 대체 연구자란 누구인가. 그러니까, <교수신문>이 ‘천하제일연구자대회’라는 기획을 통해 호출하고자 하는, 또는 대화상대로 불러들이고자 하는 연구자는 누구인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란 누구인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것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 연구자를 의미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들을 ‘사회를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 연구자’(이하에선 ‘비판적 연구자’로 약칭)라고 하지 않고, 그냥 ‘연구자’ 또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라고 에둘러 부르는 것일까.

어떻게 보아도 ‘비판적 연구자’를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라고 부르는 건 불합리하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풀어내기 위해 특정 학문분야에 속해야만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경제학을 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전혀 없을 수 있고, 반대로 물리학이나 전자공학, 음악학을 하면서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견지할 수도 있다. 대체 뭣 하러 이름을 저렇게 지어서 전자를 온전히 포괄하지도 못하면서 후자를 처음부터 배제하는 걸까.

‘비판적 연구(자)’가 특정 분과학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정면에 내세우는 한 ‘비판적 사회과학’이라는 용어를 써도 좋을 것이다. 현재의 사회과학이 그러한 비판적 성격을 구현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런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과학을 변혁할 필요성을 제기할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의 연구자는 ‘(비판적) 사회과학 연구자’도 아니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라고 불리는 걸까. 

나는 이것이 사회과학 영역에서 비판적 문제의식이 주변화된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의 분과들에서 주류적인 방법론이나 개념군을 사용하지 않는 연구를 두고 ‘그건 인문학이지 사회과학이 아니다’라고 비아냥대는 것은 오랜 관습이다. 그런데도 사회과학 분과에 속하는 ‘비판적 연구자’조차도 맥락상 멸칭에 가까운 ‘인문학’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문제는 그러한 수용이 지향하는 바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은 사회적 문제의식은 다소 희박한 순수 인문학과 연대하고, 나아가 그로부터 유의미한 결과들을 내놓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현실을 보면, 여러 사회과학 분과들에서 주변화된 비판적 분파들이 인문학에 흔히 씌워진 배고프고 소멸 위기에 있는 학문이라는 이미지에 슬며시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사회과학의 위기는 그것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사진은 지난 1월 불평등끝장넷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비판적 연구’의 주변화와 게토화

하지만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놓인 제반 환경을 대조해 보면, 진정으로 위기에 처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다. 이 위기란 사회과학이 그 본령이어야 할 비판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사회과학의 위기는 그것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사회과학의 비판성 상실과 관련해서는, 서구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큰 틀에서 보면, 18세기부터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사회과학이 전체적으로 비판적인 성격을 꽤 뚜렷하게 가졌다. 연구자들은 비교적 쉽게 그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역사적으로나 타 학문과 관련해 자신의 연구를 어떻게 구별 지을지에 대해 골몰했다.

하지만 사회 안에서 다양한 이해관계가 발달하고, 특히 자본과 권력의 이해관계에서 연구자들도 자유롭기 어렵게 되면서 사회과학의 비판성은 본격적으로 흔들렸다. 동시에 사회과학은 여러 분과로 파편화되면서 종합적 성격을 잃어갔고, 20세기 중엽 새롭게 부상한 양적 방법론이 과학성의 유일한 잣대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능력마저 사회과학은 조금씩 잃어 왔다. 이 마지막 사항은 사회과학 각 분과 내에서 해당 분과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사회과학이 비판성을 상실해 가는 중에도, 그것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다. 각 분과 내에서 비판적 성격이 짙은 학회가 구성된 것이 대표적인데, 그 동력은 계급갈등 격화나 전쟁(특히 베트남전) 발발 같은 현실에서 제공되곤 했다.

그러나 학회의 구성은 양면적인 성격을 갖는다. 애초 그것은 분과의 비판성을 총괄하고 지도하는 ‘기획조정실’로 의도되었겠으나, 사실은 그런 기능이 별도의 학회를 구성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학회가 구성된 게 현실이기도 했다. ‘기획조정실’이 점차 변방의 ‘연수원’이나 ‘출장소’로 게토화되었다는 것이다.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주요 사회과학 분과에서 진보적 학회의 구성, 그리고 그 발전과 쇠퇴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 사회과학 복원의 단초

이렇게 보면 비판적 사회과학의 현재는 물론 미래도 암담하기만 하다. 이 어둠의 터널에 끝이 있을까. 우리의 비판적 연구자들은 그 안에서 쓸쓸히 죽어가야 하는 걸까. 비판적 사회과학의 부활은 불가능한 꿈인가.
먼저 우리는 ‘비판적 연구(자)’의 주변화와 게토화의 양상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흔히 사회를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접근법(방법론)과 주제가 그것인데, 전자의 측면에서 비판적 사회과학의 쇠퇴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해도, 후자에서까지 그렇지는 않다. 

이를테면, 소득분배나 불평등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경제학에서 금기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21세기 자본』(2013)으로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등극한 토마 피케티도 경제학에서 분배 문제에 대한 침묵이 자신이 책을 쓴 동기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어떤가. 비판적 사회과학에 친화적인 주제라고 여겨지는 불평등, 양극화, 가계부채, 세대갈등, 청년실업 등이 경제학은 물론 사회과학 전반에서 가장 ‘뜨겁게’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비판적 사회과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탄식이 가장 깊어지고 있을 때 비판적 사회과학이 가장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제들은 융성하고 있는 셈이다. 후속세대 재생산이 안 돼 비판적 사회과학의 명맥이 끊길 걱정이 극에 달하고 있을 때 대학원에서는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적 주제들을 전공하는 후속세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결국 비판적 사회과학의 희망은 이러한 현실의 역설에서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역설을 희망으로 전환? 좋다. 그런데 어떻게? 먼저 우리의 연구자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 연구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초라하고 편안한 저 게토에서 뛰쳐나와, 원래는 나와 같은 곳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의 자리에서 불평등이나 청년실업을 연구하는 이들과 적극 대화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엔 그러한 연구를 단순히 유행에 휘말려 시작했다 해도 연구의 과정에서 ‘사회’와 ‘시대’를 고민하게 된 이들과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학문분과, 그리고 고리타분한 인맥과 문제의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사회과학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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