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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국제학술지에 투고해야 할까?  
우리는 ‘왜’ 국제학술지에 투고해야 할까?  
  • 황진태
  • 승인 2023.07.3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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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46 비판지리학의 실천으로서 국제학술지 논문 쓰기
황진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부연구위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SSCI급이라는 사실만으로 채용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논문의 질을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심사과정의 수준이 보다 높아져야 한다.
학문후속세대의 전반적 수준이 높아지고, 
설령 본인은 국제학술지 논문이 없더라도 
학연·지연·학벌과 상관없이 국제학술지 논문을 가지고 있는 학자를 
‘흐림 없는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되길 희망한다. 

박사과정생 시절인 2014년 봄에 처음으로 국제학술지에 내 논문이 게재되었다. 그날 오전 학술지 측으로부터 정식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내가 박사과정을 공부했던 곳은 독일의 본(Bonn)대학교인데, 학교 근처 티베트 식당에서 종종 우리의 수제비와 비슷한 별미를 먹었다. 그날 점심에는 출력한 논문을 들고 티베트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 한 숟가락을 입에 물고, 논문 한 문단을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원생 시절에 읽었던 국제학술지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당연히 학자로서 자부심을 가질 일이고, 학계는 그 업적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병폐도 있다. 

각 학문 분야의 특성에 따라 국제학술지보다 국내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나 국문 저서가 보다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학자들에 대한 연구지원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이나 교수를 채용하는 대학에서는 국제학술지를 SSCI급(사회과학), SCIE급(자연과학), A&HCI급(인문학)이라는 등급으로 환원하여 연구자의 역량을 판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숭배한다. 그 결과, 개별 학문의 고유한 특성과 차이는 간과되고 학문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학문의 신자유주의화라는 불편한 현실이 형성되었다.       

나는 국제학술지를 둘러싼 병폐에 대한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국제학술지에 논문 쓰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반작용으로 나아가서도 안 된다고 본다. 자연 생태계가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기 위하여 생물다양성이 필요하듯이, 학문 생태계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경쟁, 순환되어야만 지속가능해진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국제학술지 논문 쓰기와 관련하여 논의되지 않았던 지점에 대한 내 생각을 미래의 희망인 학문후속세대들과 공유하려 한다.  

이제는 ‘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찾는 고민을 행사에 담아낼 필요가 있다. 사진=DALL·E

‘어떻게’를 넘어 ‘왜’ 써야 하는지 고민을

국제학술지 열풍에 대한 대응으로서 최근 여러 학회에서 학문후속세대인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방법을 알려주려는 학술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뿐만 아니라 ‘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찾는 고민을 행사에 담아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비판지리학자가 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국제학술지 논문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는 비판지리학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충돌·투쟁·억압·차별·소외가 어떻게 공간을 매개로 발생하는지를 밝히고, 가능하다면 해결방안까지 모색하는 실천지향적 학문으로 정의한다. 비판지리학자가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써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외부의 시선과 지식에 의해 대상화·타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내 연구는 대부분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론을 공간적으로 이론화·구체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석사과정 시절, 동아시아 국가들의 1970~1980년대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찰머스 존슨, 로버트 웨이드 등 서구 학자의 저서를 접했다.    

특히, 사적 이해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장기적인 국가정책의 추진이 가능한 원인을 설명하고자 제시된 계획합리성(plan rationality)과 시장의 관리(governing the market)와 같은 개념은 제1세계와 제3세계로 분화된 국제학술 담론구조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동아시아 특수성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 석사학위논문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서울대 지리교육과 박배균 교수를 중심으로 국내 비판지리학 연구자들은 존슨이나 웨이드가 분석한 것처럼 국가관료 이외에 국가 밖 행위자들이 국가정책의 수립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가정에 의문을 가졌다.  

해외 학자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어느 지방 상공회의소 창고에서 먼지가 쌓인 국문자료를 발굴하거나 관계자를 찾아 인터뷰를 하면서 국가 밖의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국가정책에 미친 영향을 밝힌 지점을 포착하면서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론을 정초시킨 초기 논의의 한계를 확인한 것이다.    

제1세계 연구자의 ‘인용의 정치’ 

그런데 막상 우리의 주장이 담긴 연구논문 몇 편이 국제학술지에 게재된다고 해서 기존의 지배적 학술담론 지형에 눈에 띄는 지각변동을 일으키진 못했다. 제1세계의 유명대학에 소속되고, 국제학술 담론지형의 중심에 위치한 ‘석학’이 된 초기 연구자들과 그들의 논의를 지지하며 마찬가지로 제1세계에 위치한 후속 연구자들이 형성한 인식론적 공동체(epistemic community)는 자신들 간의 상호 인용을 통해 우리의 주장은 더욱 주변화되는 ‘인용의 정치(the politics of citation)’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2년 전 직장을 통일연구원으로 옮기면서 북한 연구에 집중하게 되면서 해외 학계에서는 포스트 사회주의 접근으로 김정은 시대의 북한을 분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시장화 조치와 같은 몇몇 징후가 있었던 것을 바탕으로 북한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를 동유럽과 중국에서 진행된 포스트 사회주의와 유사하게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북한에 포스트 사회주의의 옷을 무리하게 입히려는 몰이해는 북한이라는 공간도 대상화시켰다. 그동안 국내 북한학계는 깊이 있는 북한연구를 축적해왔다. 하지만 국제학계와의 소통이 부족해서 외부에 의한 북한의 대상화를 적절히 막아내진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해적학술지에 여러 편을 게재하여 채용심사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게 되는 촌극도 발생한다. 사진=DALL·E

우리 안의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

둘째, 우리 안의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대상화는 해외 학자들에 의해서만 추동되는 것이 아니다. 해외이론에 대한 밀도 있는 성찰 없이 이론과 개념을 신속하게 수입하여 한국 사례에 얄팍하게 적용하는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은 국내학술지에서 쉽게 목격된다.   

국내 학계에서 나타나는 해외이론을 국내 사례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는 논문심사과정에서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다. 심사과정에서조차 바뀌지 못한다면 개념의 재해석과 맥락화를 하지 못하는 연구자 역량의 한계이리라. 그런데 국제학술지에 성찰 없는 논문이 게재되는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학문의 신자유주의화의 일환으로 촉발된 국제학술지 열풍은 국내외 한국인 연구자로 하여금 충분한 성찰 없이 제1세계 논문 심사자의 입맛에 맞는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메피스토의 유혹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발전주의 국가론의 연구주제는 산업정책뿐만 아니라 도시·환경 등으로 다양해졌지만 초기의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론이 가정하는 신베버주의 시각에서의 국가의 역할과 계획합리성 개념은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다.  

비판지리학자는 개인 차원의 연구업적을 늘일 목적으로 기존에 지배적인 서구학술 담론에 편승한 성찰 없는 연구를 계속하고 국제학술지의 외피를 씀으로써 해당 연구가 정당화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인 연구자가 국제학술지의 편집장이나 편집위원이라면 특집호 형식으로 의제를 공론화하면서 제1세계 학자에 의한 동아시아 및 한국 연구의 대상화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학계의 주변부에 위치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국제학술지의 논문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국제학술지에 논문업적이 쌓일수록 국제학술지로부터 심사요청도 증가한다. 국내학술지와 달리 적은 액수의 심사비조차 없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영어로 심사평을 작성해야 하니 당연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더라도 개인의 영리를 위해서가 아닌 비판지리학자의 학문적 실천이라는 소명의식을 갖고 심사에 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연구자가 성찰이 부족한 연구를 투고했더라도 심사과정을 거치면서 향상된 논문이 게재되는 고무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대부분 서구 출신의 연구자들이 심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한 명의 심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고무적인 상황을 더욱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내 학계에 국제학술지의 논문 게재 경력을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교수가 아니지만 국제학술지 논문업적이 많다는 이유로 종종 국내외 교수 임용심사에 참여했다. 후보자의 자기소개서나 경력에 큰 차이가 없다면 나는 상식적으로 국제학술지 논문 편수를 우선하여 후보자 순위를 부여했다. 

국제학술지에 논문 한 편을 쓰는 것은 연구자가 국제학술 담론과의 소통 능력, 차별적인 분석능력과 같은 학문적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논문 한 편을 위해 들였던 오랜 시간과 투고 후 심사과정을 일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인내했다는 점에서 학자로서의 성실함도 확인할 수 있다. 

SSCI급 집착보다 심사과정 수준 높여야 

웃프게도 SSCI·SCIE·A&HCI급에 집착하는 국제학술지 열광은 매우 빠른 심사 속도와 높은 게재율, 그리고 비싼 게재료를 요구하는 소위 ‘해적학술지’의 범람을 초래했다. 동일한 해적학술지에 여러 편을 게재하여 채용심사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게 되는 촌극도 발생한다. 

앞으로는 SSCI급이라는 사실만으로 채용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논문의 질을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심사과정의 수준이 보다 높아져야 한다. 

가령, 도시 분야의 국제학술지로 『City: Analysis of Urban Change, Theory, Action』이 있다. 이 학술지는 도시연구를 주도하는 세계적인 학술지 중 하나이고, 높은 탈락률로 ‘악명’이 높다. 그런데 SSCI급은 아니다. SSCI급 해적학술지에 10편이 실린 후보자와 『City』에 1편의 논문이 실린 후보자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학문후속세대의 전반적 수준이 높아지고, 설령 본인은 국제학술지 논문이 없더라도 학연·지연·학벌과 상관없이 국제학술지 논문을 가지고 있는 학자를 ‘흐림 없는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되길 희망한다. 비판지리학자라면 논문에서만 비판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논문 밖 일상 세계에서도 논문에서 외친 상식·정의와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런 풍토가 만들어져야만 해외 학계의 지난한 투쟁에 참전하여 버틸 수 있는 연구자층이 두터워지고, 국내 학문생태계도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해진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보이저호와 같은 나의 희미한 신호에 응답할 미래의 학문후속세대의 출현을 간절히 고대해본다.  

황진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부연구위원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 커먼즈, 위험경관(riskscape), 국가-자연, 인간 너머의 지리학(more-than-human geography)과 같은 개념을 동아시아 맥락에서 이론화를 선도해온 비판지리학자이다. 『Journal of Cleaner Production』, 『Antipode』, 『Environment and Planning A』,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Professional Geographer』 등의 국제학술지 및 단행본에 10여 편의 논문을, 국내학술지에 30여 편의 논문을 실었다. 단독 저서로 『내 고향 서울엔』이 있고, 편서로 『강남 만들기, 강남 따라하기』, 『한반도 에너지 전환』, 『위험도시를 살다』 등이 있다. 연구성과는 지리학계를 넘어 도시 및 환경 분야에 지적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지리학자로는 최초로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 임용돼 현재 다방면의 북한연구를 수행 중이다. dchj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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