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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를 변화시키는 장애연극의 미학
지금-여기를 변화시키는 장애연극의 미학
  • 양근애
  • 승인 2022.1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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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33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연극치료나 사회복지의 관점이 아닌, 미학과 예술의 관점에서 
장애연극과 장애예술인을 다루려는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장애배우들의 ‘당사자 유머’에 무람없이 함께 웃으면서 
그들이 지향한 예술에 대해 학술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지금 내 연구의 관심은 동시대 연극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 희곡 및 연극사를 공부하며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고 한국 역사극의 형성과 흐름을 톺아보는 연구로 박사논문을 썼으나 역사화 되지 않은/못한 연극의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놓기가 어려웠다.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승인되고 기록에 의해 정전화된(canon-formation) 작품들을 재해석하는 일 역시 기존의 질서로 환원되는 일이 아닐까 의심이 깊어지기도 했다.

그동안 세월호 참사와 블랙리스트 검열 사태,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그리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세상도 연극도 많이 달라졌다. 연극의 경우 현실을 매끈하게 재현하는 대신 사회적 이슈를 통해 시민됨(citizenship)을 질문하고 정체성을 새로이 갱신해나가면서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시도들이 많아졌다. 일련의 사건 이후 재현의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꾀하는 연극들에 마음이 갔다. 

연극 현장과 연구를 잇기 위해

박사수료 후 연극평론을 시작했지만, 박사논문을 쓸 즈음에는 학위 논문에 집중하기 위해 연극을 보는 일을 줄여야 했다. 평론과 논문은 연결되어 있지만 다루는 대상에 따라 아주 다른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문화예술을 전공한 연구자 중 많은 수가 평론을 겸하고 있고 박사수료 후에는 대학에 강의를 나갈 기회도 생긴다.

그러나 현장과 연구와 교육을 일치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내 경우도 동시대 연극을 보고 평론을 쓰는 일과 한국 근대 연극사의 중요한 계기들을 찾아 연구하는 일과 대학글쓰기와 한국문학, 한국희곡 등을 강의하는 일은 각기 다른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로 다가왔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나니 연구 실적에 대한 압박이 더 커졌다. 세 가지 영역 사이를 오가는 일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포기’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연구도 중요하지만, 삶도 중요했기에 어떤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연극 현장에서 드라마투르그로 공연 제작에 참여하고 연극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지금 여기’의 연극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 나아가 학술적 장으로 끌어들여 대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후’의 연극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 이후가 아닐까. 그날 ‘이후’를 살아가면서 연극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공부를 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사실은 글을 쓰는 일이 너무 무서웠다. 기존의 언어와 질서를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더딘 연구가 더 방황했다. 어찌어찌 박사학위를 마치고 세월호 이후의 연극으로 논문을 쓰면서 나는 다른 세계로 이행했다.

세월호 이후의 연극이 애도 불가능이라는 사태를 ‘기억’하는 정치적 실천이라는 점을 밝힌 「‘이후’의 연극, 애도에서 정치로」와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극적 행동을 다룬 「‘이후’의 가족, 연극적 치유와 정치적 주체화」 두 편의 논문을 쓰고 난 후, 가시화되지 않거나 강요된 ‘피해자다움’ 속에 있는 이들을 다룬 연극에 대해 더 잘 말하고 싶어졌다.

연극 ‘장기자랑’에서 엄마-배우들이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에서 있을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아이들을 연기하고 있다. 2021년 창원 공연 사진이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페이스북에서 가져왔다.

특히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는 ‘엄마-배우’들의 존재는 연극의 연극됨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재난 이후의 연극과 문학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학생들과 세미나를 하고 있다. 사회적 참사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무기력을 멈추고 ‘이 폐허를 응시’(레베카 솔닛)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연극과 퀴어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연극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장애연극이 장애 현실은 물론 연극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극장과 연구실을 오가고 있다. 

장애연극의 미학을 고민하다

최근에 본 극단 애인의 연극 「제4의 벽」의 질문은 말하자면 ‘무대에서 장애는 미학적인가?’로 요약된다. 장애인 관객을 위한 배리어프리가 늘어나고 장애인 배우가 등장하는 공연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비장애 중심적인 연극판에서 장애연극의 미학을 묻는 일은 어쩌면 조금은 늦은 감이 있다. 그런데 이 연극,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다. 

연극 ‘제4의 벽’에서 파우스트 역을 맡은 강희철 배우와 연출 역을 맡은 강보람, 조연출 역을 맡은 백우람 배우이다. 사진 제공=변자운

연극은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가 쓴 동명의 희곡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연극’의 자리에 ‘장애미학주의’를 넣고 ‘진짜 예술’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극 중에서 연출은 장애미학주의를 위해 장애가 있는 ‘몸’을 더 잘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파우스트가 잔을 들고 대사를 읊는 장면에서 관객에게 떨림을 더 잘 보이기 위해 손에 힘이 더 안 들어가는 왼손을 쓰라는 식이다. “숨이 차는데 안 차는 것처럼 하는 건 비장애인이나 하는 연기죠. 우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예요.” “장애 고유성을 생각해요!”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모두 장애인인 이 연극에서 대사들은 희화화를 넘어 풍자의 효과를 발휘하고 캐릭터와 장애를 가진 몸을 넘나드는 배우들의 연기는 능청스럽다. 

‘장애미학주의’, 특히 이 ‘주의’를 발화하면 할수록 그 중심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지만 연출은 장애를 더 많이 보이다 못해 이제 파우스트를 맡은 배우에게 없는 장애까지 탐낸다. 극 중에서 조연출은 눈에 보이는 장애만 보여주려는 멍청한 연출을 비웃으며 언어장애를 가진 자신이 파우스트의 대사를 연기하겠다고 한다.

그는 연출이 주장하는 장애중심주의를 이용해 사례비를 올릴 심산이다. 유쾌하고 분명한 이 연극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웃으면서 보고는 집에 와서 생각했다. 장애미학주의가 뭘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지난여름에 쓴 글에서 나는 ‘할 수 없음(disabled)’을 가시화하고 전유하여 다른 방식의 수행을 만들어내는 일이 장애예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썼다. 장애연극은 비장애 중심 연극에 익숙해진 나의 감각을 뒤흔들어놓았다. ‘어쩌면 이상한 몸’, ‘거부당한 몸’, ‘다른 몸’, ‘보통이 아닌 몸’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시공간을 재편했고 전에 없던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장애예술은 마지막 아방가르드 운동’이라는 잉카 쇼니바레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0set프로젝트의 ‘관람모드-있는 방식’. 지금은 없어진 시설 ‘향유의집’을 투어하는 방식으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진 제공=정택용

장애학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연구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야말로 무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장애연극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대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속해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내가 비장애인이고 따라서 장애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떨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나는 비장애인의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장애연극의 고유성과 미학을 밝히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장애인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하면 관객은 그가 맡은 역할과 무관하게 언제 연극이 장애를 문제시할지 기대하게 된다. 비장애인과 ‘다른’ 신체의 등장만으로도 극의 내용이 정향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장애인이 장애를 연기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것만큼 장애인이 비장애를 연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도 문제다.

따라서 장애인의 다른 몸을 가시화하는 장애연극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다. 실체 없는 ‘정상성’을 심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야말로 감각의 분배를 통한 미학적 사유의 문제라는 것을 개진한 랑시에르의 말처럼 ‘몫 없는 자들의 몫’으로서 장애 연극의 미학적 정치성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장애연극의 미학적 정치성을 탐색하는 나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장애연극이 부수고 다시 세우는 언어가 비장애 중심의 세계를 어떻게 재배치하는가. 다른 하나는 장애연극이 지체시키고 유예하고 중단시킴으로서 드러나는 시간성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시간을 어떻게 성찰하게 만드는가. 

역사화 바깥에서 겨냥하는 중심

장애인 극단의 역사가 벌써 이십 년을 훌쩍 넘었다. 최근 공공극장을 중심으로 배리어프리가 보편화되면서 장애연극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긴 했지만 장애인 극단의 다양한 활동에 비해 연구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연극치료나 사회복지의 관점이 아닌, 미학과 예술의 관점에서 장애연극과 장애예술인을 다루려는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장애배우들의 ‘당사자 유머’에 무람없이 함께 웃으면서 그들이 지향한 예술에 대해 학술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기록할 연극사에서 ‘416가족극단 노란리본’과 장애연극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 수많은 ‘바깥’의 연극들은 예외적인 사례로서가 아니라 중심을 심문하는 연극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다른 연극’을 연구하는 일은 섣부른 역사화를 경계하면서 지금-여기의 생생한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동시대 연극 현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로 전개된다. 아직 무대에 “등장한 적 없는 인물의 아직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신재 연출, 「등장인물」)가 기다리고 있기에 현장과 연구는 더 긴밀하게 연결될 필요가 있다. 

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서울대 국문과에서 「한국 역사극의 형성과 재현의 문화정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극 공부를 하면서 공식 역사와 길항하는 기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못한 사람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만든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쓰지만 언젠가 ‘다스려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평론집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2020)가 있고 함께 쓴 책으로는 『문화, 정상은 없다』(2022), 『연극과 젠더』(2019), 『전쟁과 극장』(2015) 등이 있다. 최근에 쓴 글로는 「연극 <화전가>의 여성사 재현과 ‘문화적 기억’의 재구성」(2021), 「다른 몸들, 복수의 언어, 감각의 분별-‘맞;춤’ 기획 공연(2020)의 배리어 컨셔스」(2021), 「드러냄과 머묾의 미학적 실천-장애예술의 지금-여기」(2022)가 있다. 정상성을 심문하고 경계에 파열을 일으키는 문화의 정치적 수행성에 주목하며 글을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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