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나 박열 이후 한국사에 아나키스트로 기록된 사람은 없다. 마치 1945년 이후에는 아나키스트도 아나키즘도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사람은 많았다. 가령 시인 김춘수(1922~2004)는 일본 유학시절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읽고 감동했고, 이어 바쿠닌과 브루통을 알았다고 하면서 평생 아나키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버리지 않았지만 자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했다.그는 『처용단장』에서 꿈에서 신채호를 만났다고 하고, 푸르동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 그리고 가네코후미코와 박열 등을 떠올린

하기락(1912~1997)은 20세기 후반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불린다. 중학교 5학년 무렵부터 아나키즘에 기울었고, 1935년부터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40년 하이데거에 관한 졸업논문을 쓴 뒤 귀국하여 1946년 부산에서 우익신문인 를 창간했다. 1947년부터 대구 경북 지역에서 최초로 생긴 대구대학(현 영남대) 철학과를 비롯하여 경북대, 동아대, 계명대 등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하르트만과 아나키즘 등에 관한 24권의 저서, 19권의 역서, 29편의 논문을 남겼다.김도종은 하기락이 아나키즘의 철학적 기초를

신채호(1880~1936)는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불린다. 그러나 그를 과연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다. 그가 만년에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그것이 독립운동가나 민족주의 역사학자 등으로서의 그의 생애의 불행한 일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의 독립운동이나 역사학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글들이 쓰였기에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그의 아나키즘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강조할만한 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그가 중국 및 조선의 아나키스트들과 관련되었고, 일본 아나키스트들과도 글을 통해

아나키스트로서 서양적 정형에 가까운 리스쩡이나 시푸에 비해 중국적 변형이라고 할 만한 류스페이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서 훨씬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그가 중국 전통과 아나키즘을 결합하려고 시도한 점 때문이라고 짐작되지만, 앞의 두 사람과 달리 아나키즘에 투신한 뒤 2년 만에 당시 중국의 우익정부에 투신한 점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마오쩌둥의 마르크스주의처럼 서양 사상을 중국식으로 자기사상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흔히 보는 전향 내지 변절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천의파의 대표인 류스페이(

인터넷에 스푸라고 치면 스프를 뜻하느냐는 말이 뜬다. 영어 표기인 Shifu나 시푸 또는 師復이라고 쳐도 이상한 것만 뜬다. 류스푸(劉思復)라고 해야 나오는데 그게 본명도 아니다. 본명은 류샤오빈(劉少賓)이었다. 만주족인 청나라를 향한 배만(背滿) 혁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류스푸로 개명하였다.그러다 아나키즘을 수용한 후, 가족주의와 종족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성을 버리고 이름도 바꿔 스푸(師復, 개혁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되었다. 스푸는 청나라 말기의 전제군주제와 봉건문화를 비판하면서 중국의 가정은 암흑의 감옥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나는 2002년 루쉰 평전을 쓰면서 그가 유교를 비롯한 중국 전통 사상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사회를 동경했으며 에스페란토어 보급에 관심이 많았던 점 등을 이유로 그 어떤 중국 지식인보다도 아나키즘에 가깝다고 썼고, 그런 견해를 루쉰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는데, 그때 중국학자들은 호의를 보였지만 한국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그때 함께 발표한 이영희 선생이 한국의 중국전공자들이 중국인들보다 더 교조적이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나를 위로해주었다.그 뒤 우연히 상해의 루쉰기념관에서 내가 쓴 루쉰 평전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쓴 책이

일본에 여성 아나키스트는 많지만 나는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를 택한다. 한국인 박열과 결혼해서가 아니다. 그 어떤 여성아나키스트보다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지식인 여성도 아니고 화려한 자유연애주의자도 아니며 거의 무학의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가족·사회·국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자격자’ 신분으로 한 박열과의 연애도 황태자 폭탄 테러 계획도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자율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그러한 가네코의 자율성은 그

고등학교 때 공부만 열심히 하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감옥을 드나들더니 몇 년 뒤 극우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과 같은 소위 ‘전향’을 많이도 보며 살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나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서양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이다.마르크스주의자에 비해 그 숫자가 형편없이 적은 아나키스트도 마찬가지다. 가령 박열은 1934년에 전향했다는 설이 있고, 해방 후 출옥하여 일본에서 반공주의자로 우파 단체들, 친일분자, 파시스트 등과 함께 민단을 결성하고 초대 단장으로

이시카와산시로는 고토쿠슈스이나 오스기사카에와 함께 일본의 3대 아나키스트에 꼽히기도 하지만, 1876년에 태어나 1976년에 죽기까지 80년을 살아 권력에 의해 일찍 죽임을 당한 다른 두 사람에 비해 극적인 삶을 살지 못해서인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특히 한국에서 그렇다.게다가 직접행동을 주장한 고토쿠에 비해 이시카와는 선동가가 아닌 교육자로 자처하며 직접행동에 소극적이었고, 계급투쟁의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개인의 각성에 의한 사회변화를 선호하고 보편적인 사랑과 형제애를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로 열렬히 언급하여 지극히 조용한 내면

1975년부터 노동법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반세기 동안 내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이었다. 자기결정은 민족자결이라는 개념이나 여성의 자기결정으로 정치학이나 페미니즘에서도 중시하지만 아나키즘의 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앞에서 보았듯이 제국주의에 대한 획기적인 저술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많은 고토쿠슈스이와 달리, 오스기사카에(大杉栄, 1885~1923)는 그 어떤 아나키스트보다도 자기결정을 중시한 점에서 현대적인 의미를 갖는다.이는 그가 「노동운동의 정신」에서 “우리들은 이 전제군주인 자본가에 대한 절대

41년 전인 1983년 일본에 간 이튿날부터 도서관에 처박혀 사회주의 책을 읽었다. 한국에서는 읽지 못하던 책들이어서 그야말로 한숨도 자지 않고 읽었다. 그 몇 달 뒤 나는 사회주의자인 박사과정 지도교수에게 일본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자라는 이유에서 가짜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은 각각 일본 외교부의 소련 담당부, 중국 담당부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전공인 노동법 외에는 항상 소극적으로 말하던 지도교수는 그날만큼은 상당히 흥분해서 적극적으로 반론했고 나도 서투른 일본어로 맞섰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부리나케 짐을

원뿔 국가의 아나키즘보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나키즘 운동은 멕시코에서 발전했다. 1863년 그리스계의 철학교수인 플로티노 로다카나티(Plotino Rhodakanaty)가 멕시코 최초의 아나키스트 조직인 CSE(Club Socialista de Estudiantes)라는 학생과 교수의 연합을 구성하면서 아나키즘 운동은 시작되었다. CSE는 도시 노동계급 사이에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멕시코 역사상 최초의 파업을 했다. 그것은 멕시코 남부의 인디언들을 조직하여 ‘라 소시알’(La

라틴 아메리카 아나키즘은 지역 내 각 국가의 고유성과 여러 국가의 공통성을 보인다. 공통점 중 하나는 1823년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으로 자신을 유일한 ‘아메리카’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미국의 지도 아래 ‘아메리카 대륙’을 유지한 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직후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즉시 재식민화되었다. 이러한 종속적 구조에서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아나키스트 운동이 북부에서 위로부터 부과된 독재자의 철권 아래서 발생했다. 게다가 라틴

오스만제국의 첫 아나키즘은 아르메니아 민족해방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그 뿌리는 다양한 이단 기독교 교파들이었다. 기원후 3세기까지 조로아스터교가 지배한 가운데 아르메니아에 들어온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다. 301년 아르메니아 왕국은 세계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국가가 되었으나, 막대한 영토가 성직자와 귀족의 손에 집중되면서 반체제 기독교 운동이 생겨나고 반란이 성행했다.아르메니아 아나키즘은 1890년 ‘아르메니아 혁명연맹’(ARF)의 창설과 함께 조직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20세기에 아르메니아를 지배했던 다양한

2005년 3월, 외잘란은 쿠르드족의 민주연합선언문을 발표하여 모든 쿠르드 지역의 국경 없는 연맹을 요구했고 이는 PKK에 의해 채택되었다. 선언문에서 그는 “쿠르디스탄의 민주 연방주의는 국가 체제가 아니라 국가 없는 인민의 민주주의 체제다. 이는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자급자족을 달성하기 위해 채택한다”고 선언했다. 외잘란은 무력 전투의 시기는 지났다고 선언하고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특히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페미니스

20여년 갇힌 외딴섬의 독방에서 흘러나오는 쿠르드인 사상가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의 외침은 언제나 나에게 감동을 주지만, 온갖 외국 사상이 유행처럼 소개되는 한국에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다 뉴스에서 미국식 관점과 영어식 발음으로 ‘테러리스트 오칼란’으로 소개될 뿐인 그는 1999년부터 1천명 이상의 무장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터키의 임랄리 섬에 홀로 수감된 지난 20여년 동안 식민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킨 최고의 탈식민주의 사상가다.그 오랜 세월,

간디의 사르보다야는 서양의 아나키즘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느 것이나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 특히 독재 국가를 자유로운 개인 간의 비정부 협력 형태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삼는다. 모두 강제력의 법적 도구를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현대 국가를 민중이 진정으로 자치권을 실천하는 자유로운 협동조합적 질서의 장애물로 본다.모두에게 자신의 양심에 순종하는 개인의 의무는 최고의 규범이며, 정치적 순종에 대한 국가의 주장보다 우선한다. 둘 다 사회적 통제와 결속을 유지하는 데 도덕적 권위의 요소를 강조하고 적절한 사회 제도가 주어지면

전반적으로 집단 해방에 대한 간디의 열정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에 대한 매우 아나키즘적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개인의 양심은 진정으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 형태다. 그가 말했듯이, “개인이 자신의 판단을 다수에게 넘겨야 한다면 스와라지는 부조리할 것이다.” 이는 서양의 거버넌스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간디는 다수의 의견이 불건전한 경우 단일 건전한 의견이 전체 인구의 99.9%의 의견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스와라지 개인주의 때문에 간디는 의회 정치와 정당화 수단인 정당을

인도에서 아나키즘은 국가 및 사회 해방을 위한 중요한 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인도의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고대 힌두교 사상에서 나타나는 무국가 사회 개념의 전조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야 유가(Satya Yuga)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다르마의 보편적인 자연법에 기초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아나키스트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무국가 사회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힌두교 정치사상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따라서 왕이 인민을 위해 피해로부터

팬데믹이 한창인 2022년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나는 그레이버가 웽그로우와 함께 쓴 고대사에 대한 유고에서 고대 우크라이나의 초기 도시가 중앙 집중식 통제나 하향식 행정 없이 지역의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평등한 평화 사회였다고 쓴 것을 읽고 있었기에 그 전쟁에 너무나 놀랐다. 그 고대 도시는 르 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나타난 왕, 전쟁, 노예 또는 비밀경찰 없이도 살아가는 상상의 도시와 같았다.이처럼 고대사를 재발견하려는 이유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