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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떼놓고 영혼만으로 가르칠 순 없다…삶과 경험의 언어로 연구하기
몸을 떼놓고 영혼만으로 가르칠 순 없다…삶과 경험의 언어로 연구하기
  • 김미소
  • 승인 2023.05.31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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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39 언어·정체성·사회·교실을 엮어내는 응용언어학 연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미국을 거쳐 일본에서 이주여성으로 살았다. 
젊은 한국인 여성의 몸으로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 딜레마. 
연구자는 진공 속에 갇힌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자는 몸을 입고 있고, 몸은 싫든 좋든 사회 안에 담겨 있다. 
연구, 연구자, 연구자의 몸, 연구자의 사회. 이 넷은 전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낯선 문자와 향신료 가득한 음식으로 빚은 정체성

2000년대 초반. 대구 북부정류장 구석에 있던 아시아 마트. 나는 거기서 무엇을 파는지도 몰랐고, 글자를 읽을 수도 없었다. 알파벳처럼 보이는 글자에 점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는데 당연히 영어는 아니었다. 무슨 식품인지도 몰랐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케찹 뿌린 계란후라이만 먹을 정도로 입이 짧았던 초등학생에게 낯선 향신료와 글자가 가득한 식품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빠는 2000년대만 해도 아직 흔하지 않던 국제결혼을 했다. 재혼이었다. 현수막을 만들어야 했던 아빠가 어느 날 말했다. “베트남어로 현수막 하나 만들라카이 컴퓨터에 베트남어가 없어가, 영어로 먼저 뽑아 가 거 위에다 점을 찍어야 된다 안 카나.” 

알파벳 위에 모르는 점이 막 찍힌 문자. 향신료가 강해서 계속 거부감이 들었던 음식. 이 문자와 음식은 내 십대 정체성의 일부로 달라붙었다. 

쌀국수가 일상 음식이 된 것처럼

아버지의 재혼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다문화가정에서 자라게 된 삶의 경험은 그대로 연구 관심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석사과정 중이던 2010년대 초반에는 결혼이민자와 영유아 다문화 자녀에 대한 연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문화학생의 영어학습에 대한 연구는 석사논문 1편, 박사논문 1편 정도가 고작이었다. 다문화주의와 이민의 역사가 긴 북미에서는 학생의 언어학습, 언어발달, 언어 정체성 등에 대한 연구가 매우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단일민족’의 이데올로기가 매우 강한 한국의 상황은 달랐다.

당시는 ‘지식 자본’이라는 개념을 빌려와서 분석했다. 학생의 다문화 배경을 한국 사회 적응의 걸림돌로 보는 게 아니라, 학생 고유의 지식 자원으로 바라보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활용하여, 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다문화 경험을 영어 학습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이 학생들의 경험과 언어를 어떻게 한국 사회 안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학생들에게 ‘낙인’을 찍는 대신 이 사회를 어떻게 더 포용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질문으로 석사 연구를 이어갔다.

석사 연구 동안 네 명의 다문화 학생을 만났다. 이 학생들은 납작한 위계 안에 갇혀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촘촘한 위계를 가지고 놀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미디어에 재현되는 것처럼 차별받는 피해자로 남아 있지도 않았으며, 일방적 지원이 필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다언어를 자원으로 활용하여 영어를 배우는 학생도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학교에서 인기를 끄는 학생도 있었다. 피해-가해, 약자-강자, 한국인-외국인 등의 납작한 구도로 다문화 학생의 영어학습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문화 학생이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나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었다. 그러나 이 이중언어의 경험이 한국 사회에서 가치 있는 자원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어머니가 영어 관련 전문직 일을 하던 학생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영어 발음이 학교의 미국 중심의 영어 발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미국식 학교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자원’이라고 여겨지는 언어 경험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 자원의 외연을 어떻게 넓힐 수 있을까.

내가 초등학생이던 2000년대, 쌀국수는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서나 쌀국수, 월남쌈, 반미를 파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베트남어 간판을 단 집이 진짜 맛집이라며 일부러 멀리서 찾아가기도 한다. 다문화 학생의 경험과 언어도 이렇게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까.

영어를 다양성의 언어로 가르치기

베트남 새엄마는 20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이주여성의 삶을 시작했다. 가족의 연은 국적을 넘어 이어지는 것인지, 나도 20대 초반부터 미국을 거쳐 일본에서 이주여성으로 살게 되었다.

이주여성이 언어를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면, 교사로서의 특권과 자신의 소수자성이 어지럽게 엇갈린다. 학생 앞에 서서 지식노동을 하고 학생의 성적을 매긴다는 점은 분명히 특권이다. 그러나 인종, 젠더, 사회경제적 계층, 결혼 여부, 가족의 압박 등이 여성을 억누른다. 가족을 우선하라는 압력에 공부나 일을 그만둬야 하기도 하고, ‘원어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움츠리기도 한다.

최근 응용언어학계는 원어민-비원어민의 이분법을 넘어, 제스처·기호·눈짓·대화전략·다언어 등을 모두 활용하는 ‘초언어하기’ 개념을 교육환경에 가져오기도 하고, 인종언어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 언어교육에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현실에 걸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걸까? 박사 이후, 이주여성으로 일본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며 온갖 일을 겪었다. 미디어에 대서특필되는 것처럼 노골적인 혐오는 아니었다. 언제나 내가 너무 예민한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아리송한 일이었다.

젊은 여성 선생에게 불공평하게 지워지는 온갖 기대. 그 모든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 온통 새까만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 속에 가뭄 속 콩나물만큼, 그것도 문과나 예술계열에만 있는 여성 교수. 외국인과 대화해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인 대다수의 사람들. 일본어와 영어로 말할 때 묘하게 달라지는 주변 사람의 태도. 분명히 칭찬하고 싶어서 한 말일 텐데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말. 영어라고 하면 바로 금발 백인을 떠올리는 사회 분위기 안에서, 젊은 한국인 여성의 몸을 입고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 딜레마.

이런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을 계속 마주하다 보니 몸에도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다. 심리학자들은 미세공격을 설명할 때 “천 개의 상처로 인한 죽음”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상처 하나 둘 정도는 금방 낫지만, 그런 상처가 천 개쯤 쌓이다 보면 목숨을 위협하니까. 소수자로 산다는 건 계속 생채기를 입는 거였다.

김미소 교수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다양성 수업에서 활용하는 자료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엇인지 찾아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고 고정관념과 자기 자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서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삶·연구·가르치기를 촘촘히 엮어내다

이즈음 교사의 정체성을 교육방법에 활용하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그 간의 연구를 보면 비원어민 영어 교사로서 미국 영어, 영국 영어, 인도 영어 등에 촘촘히 매겨진 위계를 깨는 것, 자신이 가사를 잘 하는 남성이라는 걸 어필하며 젠더 고정관념을 깨는 것 등이 포함된다.

교사는 몸을 떼 놓고 영혼만 쏙 교실에 들어갈 수 없다. 가르친다는 것은 언제나 몸과 경험을 입고 하는 행위다. 사회가 이 몸과 경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가르친다는 행위가 완전히 달라진다. 

금발 벽안의 미국 출신 남성은 교실에 그냥 걸어 들어가는 것 자체만으로 영어 교사의 권위를 얻는다. 영어 교사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젊고 작은 여자가 교실에 걸어 들어가면, “학생 아니야? 왜 저기 있어”라는 관념을 먼저 깨야 하고, 그 다음엔 “왜 영어 선생이야? 한국어 선생 아니야?”의 벽을 또 뛰어넘어야 한다. 그 이후 “영어 제대로 하는 거 맞아? 왜 한국인이 영어를 가르쳐?” 라는 편견을 학위와 논문, 화려한 경력 등으로 맞서야 한다.

이렇게 몸을 입고 한 경험은 그대로 다양성 수업으로 연결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수업에는 백인 남성의 영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의 프리젠테이션, 임신한 CEO의 연설, 일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영어 인터뷰, 방에서 은둔하는 사람의 사회 재적응을 돕기 위한 원격 카페 아르바이트 영문기사 같은 자료가 내 교실을 채웠다.

영어는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기 위해 쓰는 언어라고 소개하고 싶었다. 영어는 선진국 백인 남성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의 언어니까.

이 다양성 수업은 그대로 연구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 출판한 논문에서는 교과서에 녹아 있는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지적하고, 이 교과서를 반면교사 삼아 어떻게 다양성을 촉진하는 수업으로 바꾸어 갈 수 있는지 다루었다.

2022년에 출간한 논문에서는 한국, 미국, 일본 3개국의 사잇공간에 서 있는 연구자의 정체성 발달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주었고, 이 바뀐 시선은 다시 내 삶과 이어졌다.

연구자는 진공 속에 갇힌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다. 연구자는 몸을 입고 있고, 그 몸은 싫든 좋든 사회 안에 담겨 있다. 사회는 몸에 이런저런 라벨을 붙이고, 특권을 입혀 주기도 하고,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연구, 연구자, 연구자의 몸, 연구자의 사회. 이 넷은 전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삶은 교육과, 교육은 연구와, 연구는 시선과, 그리고 시선은 다시 삶과. 연구자는 이 모든 걸 촘촘히 엮어 짜내어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김미소 다마가와대학 공통어로서의 영어센터 전임교원
기존의 언어 체계로 설명하기 어려운 틈새의 경험과 정체성에 관심이 많다. 경험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언어를 찾다 보니 중앙대에서 다문화가정 학생의 영어학습 연구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취업준비생의 영어학습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학생들과 함께 다양성의 언어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한국어 에세이 『언어가 삶이 될 때』(한겨레출판, 2022)를 냈고, 『지금 시작하는 평등한 교실』(동녘, 2022)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mkim@lab.tamagawa.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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