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연구자대회 79 전유진 숙명여대 영어영문학부 강사] 2024년 가을학기는 정말 기묘했다. 그 기묘함은 2024년 12월 14일에 절정을 이뤘다. 내가 삶에서 경험했던 지극히 사적인 불화의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왜 하필 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종강 주차의 금요일이었던 12월 13일에는 학회 발표가 있었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 충분히 풀기 어려웠던 문학 작품에 관한 발표이자, 처음으로 학회 간사가 아니라 연구 노동자로서 참석한 자리였기에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8 한문 번역에 대한 단상_최두헌] 번역원에 근무하면서 몇 차례 번역 원고 평가에 참여했고, 교정을 맡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최근의 AI 번역기에서 느낀 것과 반대였다. 즉 정확성은 차치하고 가독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원고가 적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정확성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문과 현대 한국어는 문장 구조가 매우 다르다. 또한 하나의 어휘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다양한 품사로 쓰일 수 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7 제국과 세계의 역사: 아카이브 활용의 묘미] 나는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교사 시절에 국가나 지역을 경계로 나뉜 교과서 서술을 보완하고자, 이 지역의 사건이 저 지역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지도 위에 표시하며 학생들의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수업이 끝날 때쯤 그 세계지도 칠판은 교차한 선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렇게 트랜스내셔널 세계사 교육에 관심을 두고, 관련 연구를 읽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교사직을 휴직하고 영국행 유학길에 올랐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6 칸트 연구를 통해 본 철학에서 역사적 접근의 중요성] 오늘날 분석철학적 관점에서 수행된 논증 재구성은 2500년 이상 경과한 서양철학사의 수많은 이론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만들고 직관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저자 지평과 저자의 시대 지평 등 사상의 구체적인 맥락을 추상화함으로써 철학이론의 온전한 이해를 저해하는 면도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상세한 문헌 연구가 동반되지 않으면, 철학자 자신이 의도한 개념과 이론의 고유한 취지를 놓칠 수 있다. 철학 문헌은 수학적 언어와 달리 역사적으로 우연한 개념과 언어의 표현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개념 분석과 논증적 타당성 검토만큼이나 역사적 접근이 중요하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5 비인간 자연, 어떻게 쓸 것인가_성한아] 나는 과학기술학 연구자다. 과학기술학이란 과학기술을 사회문화적 활동 중 하나로 분석할 뿐 아니라, 이를 포함한 현대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오늘날 과학기술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분야로 확장되었지만, 특히 나는 현대 사회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맺을 것인지를 과학기술적 실행을 통해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몇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을 ‘자연’이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의미 중에서도 생태계, 생물다양성, 지구 시스템, 경관과 같은 과학적 용어로 파악되고 있는 인간 사회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자연에 관심이 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75_ 김강기명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의 보수 대형교회와 교단들을 중심으로 시청 앞에서 30여만 명이 모여 ‘10.27 악법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 찬양&큰 기도회’를 여는 것을 보고, 최근에 출판했던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관련 논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3 냉전과 재해에 맞선 마오쩌둥 시대 사회주의 과학] 덩샤오핑에서 시진핑에 이르는 중국의 ‘현대’ 과학기술체제는 마오 시대기의 유산에 빚지고 있다. 중국의 1950~60년대는 과학·기술과 국내외의 정치경제적·생태적 맥락이 뒤얽히며 현대적 ‘과학기술-정치경제-자연생태 복합체’의 원형이 만들어진 중요한 변곡점이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2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지식 정치] 한정된 시간과 자원 속에서 내려져야 하는 결정은 과학적 확실성만을 기반으로 할 수 없었다. 제품과 화학물질의 종류·지역·사용 기간과 방법 등이 다양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피해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은 그만큼 복잡했고, 이를 정리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1 임세화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1945년의 해방과 1948년의 단독정부 수립을 두고 벌어진 최근의 ‘역사전쟁’은 해방기 문학을 공부해온 나에게 심란하면서도 반가운 사건이었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뉴라이트가 ‘현대판 밀정’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비판과 역사왜곡 교과서 논란은 과거완료형의 역사처럼 인식되던 ‘해방’을 현재형의 쟁점 사건으로 부상시켰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70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운동 연구_박상은] 나는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분야를 체크할 때 잠시 막연한 기분에 빠지고는 한다. 아마 많은 신진 연구자가 봉착하게 되는 질문이기도 할 텐데,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 이미 그 질문은 시작되었다. ‘국어국문학과의 현대문학’ 분과의 ‘현대희곡’ 전공인 나는 해방 이후 한국 연극의 현대성·트라우마 기억·한국전쟁 체험·한국적인 것에 대한 탐색으로 알려진 한 극작가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9 페미니즘 리부트_ 오혜진] 학위논문을 쓰던 작년 내내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이미 규범적인 생애서사로부터 이탈한 지 오래이니 단지 남들보다 졸업이 많이 늦었다는 것은 이유가 못 됐다. 아마 진전 없는 원고를 붙든 채 가차 없이 다가오는 심사일정을 맞추려고 허덕인 탓일 테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근본적인 원인은 어쩌면 내 논문이 꽤 시대착오적인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에 있었던 것 같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8 한국과 이슬람 세계_ 정진한] 우리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주관으로 보고 있고, 객(客)은 우리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믿지만 실상 자신들의 주관으로 본다. 이 두 시선 사이의 괴리는 때론 대화를 통해 좁혀지고 드물게는 문자나 풍문 등을 통해 대면 없이도 일부가 해소되지만, 대부분은 양자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져 간다. 한국과 이슬람 세계 사이의 교류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에서 학부를, 이슬람 세계에서 석사를, 제3자인 유럽에서 박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우리 관점과 상대의 관점과 외부자의 시각을 종합해보았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7 한국사회 불평등 연구] 한국사회에서 사회이동과 관련된 객관적인 현상과 주관적 인식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산의 세대 간 이전이 오늘날 세대 간 이동의 핵심이라는 지적도 부동산 폭등기를 거치며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불평등 문제에 다각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 흔히 조선시대는 유교와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유교적’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어딘지 강경하거나, 엄격한 도덕률을 고집하는 태도를 두고 ‘조선시대 같다’거나 ‘유교적’이라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유교를 연결 짓는 통념의 내용에 대해 막상 제대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5 현대의 전쟁과 러시아 서정시]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위해 끔찍한 행정 절차를 밟고 있던 2021년 가을, 코로나바이러스는 기세가 꺾인 지 오래였다. 전염병이 한창일 때도 그랬지만 특히 그 가을에는 60년 전 안나 아흐마토바가 쓴 사행시의 첫 행이 혀끝에 맴돌았다. “전쟁이 무엇이냐, 역병이 무엇이냐? 그것들 끝날 날 얼마 남지 않았으니……” 즐거웠으나 고생스러웠던 유학 생활도 끝이 보이는 듯해 장중한 6음보 약강격의 이 구절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비자 갱신을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겨울철 산해진미를 맛보며 새해를 맞이했고 심사가 있을 4월을 기다렸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4 개화기 한국의 국제정세 인식 연구] 한국사에서 가장 위기가 심했던 시대 중 하나는 개화기(1876~1910)였다. 서구 열강이 19세기 중반에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요동쳤고, 조선의 지위와 운명은 불투명해졌다. 이 틈을 타고 주변국들이 조선의 운명에 개입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한국은 흔들리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일본에 의해 1910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3 인문사회과학에서 번역하기] 짧은 시간동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제법 많은 책을 번역했다. 학계 바깥에서는 정치철학자 또는 문화연구자로서보다도 현대 프랑스철학 번역가로서 어느 정도 알려졌고, 동료 연구자들의 눈에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연구자로서보다 번역가로서 인정 받는 것에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2 나의 젠더 정치학] 아마 이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나’가 될 것 같다. 이 글은 젠더 정치학 연구의 현황과 한계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 정치학자로 정체화하고, 젠더 정치학을 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내가 젠더 정치학을 어떻게 전공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페미니즘과의 만남이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때였다. 남중과 남고를 다녔던 나는 대학에 와서 페미니스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사회 현상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과 해석을 접할 기회가 그전에는 전혀 없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1 성폭력 가해자 연구]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지하철 교대역에 게시되었다는 한 법무법인의 광고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동성추행, 강간 범죄, 기타 성범죄’ 등에 대한 ‘억울하도록 과중한 처벌’, ‘부당한 처벌을 무죄, 불기소, 집행유예로 이끕니다’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0 신라 왕경 연구]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아마 유년시절 기성복 광고였을 것이다. 당시 인기 절정의 배우가 LP판을 들고 재즈음악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었다. 광고의 배경이 된 뉴욕 맨해튼의 야경은 너무나 황홀했다. 때마침 여물 끓는 냄새에 외양간의 암소가 구슬프게 울었다. 방문을 열면 탁 트인 완산들이 눈앞에 펼쳐졌고, 황보 능문이 말목을 베었다는 금강성이 조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