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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 정종원
  • 승인 2024.01.10 0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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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64 개화기 한국의 국제정세 인식 연구
정종원 한양대 사학과 강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한국의 통신사와 언론사는 여전히 특파원을
매우 제한적으로만 파견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제뉴스를 영미권 혹은 일본의 뉴스 보도에 의존한다. 
이는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 중 러시아나 중국과 같이 
우리나라와 이념과 체제가 다른 강대국을 
문명적 혹은 이념적 적대감에 기초해 바라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새로운 위기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2022년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발발하였다. 게다가 여러 해 전부터 미·중 대결이 본격화되었으며,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위기의 시대는 어느덧 우리의 문 앞에 다가와 있다. 

위기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핵심을 냉철하게 살펴보고 판단하는 눈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외교관이라 평가받는 고려시대의 서희는 세치의 혀로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얻어냈다고 칭송받아왔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힘은 현란한 입이 아니라 냉철한 눈에 있었다. 거란의 전략목표는 고려의 점령이 아니라 중원지역으로의 진출이었고, 거란이 고려로부터 원한 것은 후방의 안정이었다. 서희는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거란을 설득하여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 

개화기의 대한제국, ‘냉철한 눈’이 있었다면

한국사에서 가장 위기가 심했던 시대 중 하나는 개화기(1876~1910)였다. 서구 열강이 19세기 중반에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요동쳤고, 조선의 지위와 운명은 불투명해졌다. 이 틈을 타고 주변국들이 조선의 운명에 개입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한국은 흔들리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일본에 의해 1910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개화기의 한국사회는 왜 국가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겪었던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에 이를 제대로 막아낼 역량이 부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만, 특히 고려시대의 서희와 같이 냉철한 눈으로 국제정치를 바라보지 못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개화기 언론의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개화기 언론의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한양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였다. 논문은 개화기 중에서도 1896년 2월의 아관파천부터 1904년 2월의 러일전쟁 발발까지의 만 8년 동안의 시기에 주목했다.

이 시기는 러시아와 일본 모두 한국에 대한 완전한 주도권을 쥐지 못했던 ‘러일 세력균형기’로서, 한국이 제한적으로나마 내치와 외교에서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던 때였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러일 세력균형이 무너지자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고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했다. 즉 러일 세력균형기는 한국이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기회의 시간에 우리는 어떠한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를 위해 논문이 선택한 자료는 언론의 국제정세 인식이었다. 국제정세 인식은 세계를 보는 관점이나 국내 정치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 많은 만큼 논문은 세계관 및 개혁론까지도 같이 검토했다. 이에 박사학위논문에서 주로 밝혔던 것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개별 언론의 세계관을 국제정치관, 문명관, 종교관으로 나누어 분석하였으며, 세계관 안에서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규명하였다. 예컨대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은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영향을 받은 국제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문명이 발전한 결과 국제사회가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며, 국제여론에 따라 움직인다고 판단했다.

이들의 문명관은 서양문명만이 보편문명이라는 일원론적 문명관이었고, 서양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 굳게 믿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종할 것이라 보았다. 이처럼 서양중심성이 강했던 문명관은 종교관으로 연결되었고, 이들의 종교관에는 기독교 중심성이 강하게 나타났다. 

반면 <황성신문>의 세계관은 이들과 상당히 달랐다. <황성신문>의 국제정치관은 국제질서가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에 가까웠다. <황성신문>의 문명관은 동양과 서양의 문명을 모두 인정하는 다원론적 문명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문명관은 종교관으로 연결되었다.

<황성신문>은 한국의 국교는 유교이며, 여러 영역에서 개혁을 진행하더라도 유교를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러일 세력균형기 한국 언론계는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세계관은 국제정세 인식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둥근 지구본 위에서 조선의 선비가 생존을 위해 춤을 추고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가 각각 사지 중 하나를 붙잡고 잡아 흔드는 모습이다. 조선인이 썬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에 쓰인 것이기도 하지만,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선인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한 것 같다. 그림은 프랑스 작가 조르주 비고의 「조선의 위태로운 춤」이다. 출처=조르주 비고의 1897년 화집

사상적 다양성이 있었던 개화기 언론

둘째, 세계관이 개혁론과 깊은 관계가 있음에 주목했다. <독립신문>은 문명국만이 국제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문명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문명개화’(=서구화)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문명개화’의 영역은 법과 제도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가치관 등 사실상 인간의 모든 영역을 의미했다.

반면 <황성신문>은 국제질서를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힘의 질서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서양으로부터 문명국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별로 없었다. <황성신문>은 독립은 실력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한국이 서양의 신법과 동양의 구법을 절충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세계관의 차이가 ‘문명개화’인가, ‘절충’인가라는 개혁론의 차이로 이어졌다.

셋째, 세계관이 국제정세 인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밝혔다. 예컨대 1902년에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제국신문>은 영일동맹을 국제법체제가 한국을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여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일동맹이 선언한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이 국제법체제의 지향과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국제법을 신뢰하지 않았던 <황성신문>은 영일동맹을 영국과 일본의 이익을 위한 동맹으로 보고, 영일동맹을 경계했다. 세계관의 차이가 국제정세 인식에 대한 차이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개화기 한국의 언론계가 단일하지 않았으며, 세계적인 국제정치사상의 흐름에 어두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개화기 한국의 언론계는 19세기 영미권의 주류적인 국제정치사상이었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사상에 접속하는 등 기민함과 사상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편향된 국제뉴스를 받아들였던 한계

개화기 한국의 언론사는 영세한 규모였기에 해외에 특파원을 파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해외의 소식을 접하는 주된 통로는 국제통신사나 해외언론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접속할 수 있던 국제뉴스네트워크가 편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 언론계가 구독하고 있었던 국제통신사는 로이터 통신이었다. 로이터 통신은 겉으로는 영국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긴밀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한국 언론이 로이터 통신을 통해 전달받은 국제뉴스는 애초에 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일본정부는 자국의 대외 확장을 위해 국제적인 언론공작을 적극 활용했다. 일본정부는 다양한 국제뉴스의 전달자를 상대로 언론공작을 수행했고, 한국 언론이 구독하고 있었던 해외 언론의 상당수는 일본정부의 언론공작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러일 세력균형기에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한국 언론이 접하는 국제정보는 러시아와 대립하는 강대국이 중심이 된 구조 안에서 편집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와 대립하는 강대국이 주도하는 국제뉴스네트워크에 포섭된 결과 한국의 언론계는 사상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표트르대제가 후대 황제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세계정복을 러시아의 전략목표로 설정하였다는 ‘표트르대제의 유언’은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했지만, 한국의 언론계는 사상적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 이 ‘표트르대제의 유언’을 사실로 인식하였다.

한국이 러일전쟁에 대한 중립선언을 한 직후에, 아직 러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시기에 나온 풍자화다. 한국은 1904년 1월 21일 중립선언을 했고,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출처=주간 풍자 만화 잡지 <Punch> 1904년 2월 3일자

이러한 ‘사실’은 한국 언론이 러시아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근거로 작용했다. 한국 언론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외교론을 가지고 있었던 <황성신문>조차도 한국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조를 러일전쟁 직전에 와서야 뒤늦게 표명했던 것이다. 

러시아에 대한 경계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세계 곳곳에서 침략적인 면을 보인 제국주의 열강이었다. 그러나 러일 세력균형기에 러시아는 한국을 점령하기보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완충지대로 두려고 했고,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세계정치에서 러시아의 역할과는 별도로 한반도의 국제정세 속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계는 이러한 역할의 차이를 냉철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의 언론계는 외교적 현실과 다르게 러시아의 위협을 과도하게 의식했고, 국제정세에 대해 한국을 중심에 두는 주체적이고 유연한 해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개화기 한국 언론의 진정한 문제는

그러므로 개화기 한국 언론계의 진정한 문제는 국제뉴스네트워크에서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의해 국제정세에 대한 주체적이고 유연한 해석이 불가능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한국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한국의 통신사와 언론사는 여전히 특파원을 매우 제한적으로만 파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제뉴스를 영미권 혹은 일본의 뉴스 보도에 의존한다.

이는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 중 러시아나 중국과 같이 우리나라와 이념과 체제가 다른 강대국을 문명적 혹은 이념적 적대감에 기초하여 바라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물론 해당 국가들이 유발하는 여러 문제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이들이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냉철한 눈’이다. 과연 우리는 100여년 전과 달라졌을까? 우리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정종원 한양대 사학과 강사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된 연구주제는 사상사와 개념사이다. 조선후기이래 국가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개화기 한국의 국제정세 인식은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해갔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박사논문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하는 연구를 계획 중이다. 
발표한 논문으로는 「반계 유형원의 평등사상과 도덕국가체제론」, 「개화기 한글신문의 평등개념 연구」, 「러일전쟁 개전 전후 언론의 국제정세 인식과 대응」, 「유형원과 정약용의 경세서에 나타난 국가개혁사상 비교 시론」,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 연구-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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