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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성전’으로 읽히는 의병, ‘민중적 민족주의’ 서사에서 벗어나기
‘구국성전’으로 읽히는 의병, ‘민중적 민족주의’ 서사에서 벗어나기
  • 김헌주
  • 승인 2022.04.2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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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⑥ 사회사적 관점의 의병운동사 연구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향후 연구의 목표는 독립운동사 영역으로 ‘특수화’된 의병운동사 연구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사회사적 관점에서 의병운동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작업과 함께 
의병이 독립운동사 서사로 귀결된 과정, 
유교적 전통이 역사적으로 소환되는 맥락도 규명하려고 한다.” 

어린 시절 활자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글을 읽는 걸 좋아했던 내게 소설과 역사책은 가장 든든한 벗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 선택도 역사학으로 귀결되었고,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학부 시절 탐독한 민족주의 관련 저작들의 영향 때문인지 대학원 진학 후에는 민중이 일상적으로 경험한 민족주의의 실체 및 형성과정을 밝히겠다는 연구주제를 설정했고, 한국근대사로 세부전공을 택했다. 

사회사적 관점의 의병운동사 연구

『하재일기』

대학원 입학 후 흥미로운 사료가 눈에 들어왔다. 근대 시기 공인(貢人)들의 일상을 기록한  하재일기(荷齋日記)였다. 경기도 양근군 남종면 분원리(현재 경기도 광주시)에 살던 도공(陶工) 지규식이 1891년부터 1911년까지 20년간 쓴 일기다. 왕실 및 관청용 그릇 제작을 담당했던 분원마을의 일상과 당대 사회상 등을 세밀하게 기록한 이 사료를 읽으면서 근대 민중이 경험한 일상과 민족의식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하재일기 강독 스터디를 함께 진행했던 선배 연구자로부터 하재일기에 의병과 지역주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살펴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나는 곧바로 관련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분석의 결과 의병을 둘러싼 파장이 마을 공동체의 ‘일상’을 흔들어놓았고 분원마을 주민들은 의병과 관군, 일본군 등 당시 조선사회의 운명을 결정짓던 누구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기존의 민족운동사적 서사로는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사실이었고, 대학원 입학 이후의 문제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단서이기도 했다. 이후 자료를 정리해서 논문으로 발표했고, 이 논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서 의병운동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테마로 학위논문 주제를 잡았다. 그리고 근대 의병운동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원과 다수 계층이 참여했던 1907년 의병운동을 세부 주제로 설정했다. 학위논문 주제를 의병운동사로 잡으면서 방대한 연구성과에 대한 검토 작업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선행연구의 한계점과 내 연구의 의미에 대해 정리해볼 수 있었다.

선행연구에서는 1907년 의병운동을 국사(national history)의 중요한 축인 ‘독립운동사’의 전사(前史)로 자리매김했으며, ‘민중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전민족적 항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의병운동 참여주체별 지향의 차이, 운동의 한계성에 대한 내재적 성찰, 의병과 진압주체인 일본군 그리고 지역주민이 맞물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관계성, 그리고 당대언론의 의병을 둘러싼 담론의 흐름 등은 주목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후기의병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박사논문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사회운동과 사회의 관계’였다. 운동의 기반은 사회이고 사회의 일상성은 시대적 조건에 따라 운동으로 변화(승화)할 수 있는데 기존 연구에서는 이 양자는 늘 분리되었다. 따라서 의병의 활동과 지향 역시 늘 민족(민중)운동의 서사 안에서만 구획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지점을 돌파하고 싶었고, 그 고민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의병과 폭도, 그리고 양민 담론

첫째, 이 연구에서는 ‘의병(義兵)’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재구성되는 주체로 파악했다. ‘의병(義兵)’은 적대세력에게는 ‘폭도(暴徒)’로 호명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의병(義兵)’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다. 아울러 ‘양민(良民)’으로 호명된 지역주민은 상황에 따라서 ‘의병(폭도)’과 ‘양민’ 사이의 경계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했다. 따라서 ‘의병’의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인들에게 ‘의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던져볼 필요가 있다. 

둘째, 의병뿐만 아니라 의병에 적대적인 세력, 지역주민을 모두 시야에 넣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1896년과 1905년의 의병운동과 달리 1907년 시점의 의병운동은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이전의 운동과 질적인 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과정과 참여주체들의 지향을 맥락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지향은 한마디로 ‘동상이몽’이었다. 그들은 ‘義’라는 기치 아래 뭉쳤다. 그렇지만 성리학적 의리론(유생층), 동포와 국가에 대한 충성(군인층), 나라와 백성에 대한 의리(농민층), 활빈당의 계승(화적집단) 등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의를 전유(appropriation)했다.   

셋째, 의병의 활동과 지역주민과의 관계를 투쟁하는 주체와 그들을 지지하고 협력하는 구도로만 보는 것이 아닌 각자의 생존적 욕구와 일상적 차원의 정치행위, 그리고 명분론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로 해석하였다. 지역주민은 당대 일본군경과 언론에 의해서 ‘양민’으로 인식되었지만, 일본군경과 의병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였다. 지역주민은 명분과 세력의 두 측면에서 일제와 의병의 포섭대상이었다. 지역주민은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평소에는 ‘양민’이지만 ‘폭도’로 전환가능한 존재였다. 저항세력인 의병의 입장에서는 지역주민은 의병과 민족적 ‧ 혈연적 동질성을 가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일본군경에 정보를 넘겨서 의병을 공격할 수 있는 잠재적 적대세력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역주민은 ‘경계를 넘나드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의병과 일제의 대립구도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넘어 이 시기 지역사회사를 다채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넷째, 의병운동이 사회적 지지를 잃어버린 맥락에 대해서 분석했다. 의병운동이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사회적 지지를 잃어버린 것은 일제의 학살이라는 외인이 기본적인 요건이다. 일제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무력진압, 의병에 협력한 지역주민에 대한 보복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공포감을 주입시켰다. 당대 한국 언론에서 ‘폭도’ 담론을 끊임없이 유포시킨 것 역시 중요한 변수다. 물론 언론에서 의병을 ‘폭도’로 인식하는 과정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언론의 논조 속에서도 ‘폭도’와 ‘의병’ 담론은 대립했고 ‘양민’ 담론은 양자를 매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들의 경합은 양비론적으로 귀결되고 말았고, 양비론은 불리한 조건에서 투쟁을 전개하던 ‘의병’에게는 치명타로 작용했다. 요컨대 일제의 무력진압과 당대 폭도 담론의 영향으로 인해 의병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과정을 그려내었다. 

1896년과 1905년의 의병운동과 달리 1907년의 의병운동은 지역과 계층을 초월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유생, 군인, 농민, 활빈당을 계승한 화적 집단 등 참여 주체의 지향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사진은 1907년 무장한 의병의 모습이다. 사진=프레데릭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의병운동사 연구의 보편화…계보도 그려내기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민족주의적 관점의 연구와 다른 해석을 하기가 힘든 학계의 분위기였다. 의병운동사 연구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사의 틀에 갇혀있었다. 최근에도 한 기성 연구자는 의병을 ‘구국성전’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분야 연구의 현주소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다른 관점의 연구들은 모두 주변화되었다. 즉 의병운동이 당대 유생층과 양반 집단의 실질적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이었다고 해석한 연구, 의병운동의 배후에 국왕 고종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병운동을 근왕주의적 성격으로 규정한 연구 등은 이 분야 연구의 주류로 부상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 나온 연구들은 당대 역사적 맥락에서 의병운동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예컨대 최근 원주지역 의병운동의 내재적 기원이 이 지역 유력가문의 관계망과 향촌문제에 대한 공통 대처의 전통에 있었다는 연구가 제출되었다. 해당 연구는 지역사회 변동과 의병운동의 연관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의병관련 판결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일제의 의병판결 양상과 실태를 밝힌 연구 역시 다른 각도에서 의병운동의 보편화에 기여하고 있다. 아울러 세부전공이 다른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새 연구경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도가 변할 여지는 있다고 하겠다. 

향후 연구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의병운동사 연구의 보편화이다. 그 일환으로 의병운동사 연구에 대한 사학사적 분석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의병운동의 사상적 지향에 대한 인식의 변천과정을 ‘주자학적 민족주의론’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유인석을 비롯한 당대의 의병장들은 중화론의 맥락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했지만,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의 역사서술에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의병운동이 전유되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연구를 지속하여 의병운동사 연구의 계보도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의병 연구의 사학사적 의미 뿐 아니라 의병운동이 독립운동사 서사로 포섭되는 과정, 유교적 전통이 현대에 재발명되는 맥락까지 정리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영역에서 독립운동사 구출하기

상술한 바와 같이 그동안의 의병운동사 연구는 국민국가의 관제서사이자 신화로 기능하고 있는 독립운동사 영역으로 귀속되었고, 따라서 최소한 공식 역사서술에서는 이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좀 더 시선을 확대하면 독립운동사 연구와 국민국가 이데올로기가 공모하고 있는 관계성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토론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사를 신화의 영역에 묶어두는 것에 비판적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영웅으로 그려내고 그 역사를 신화화할수록 다양한 각도에서의 분석과 수준 높은 통찰이 불가능해진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층적으로 조명하고, 독립운동 내부에서도 각 주체들의 욕망이 대립했던 맥락을 더 상세히 드러내면서 독립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더 심도 있게 파고들어야 한다.

물론 이런 점을 지적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제 행사나 교과서, 대중강연 등에서 신화적으로 소비되고, 다시 연구영역으로 환류되면서 독립운동사는 영웅 서사로만 남게 되는 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독립운동사 후속 연구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에도 현실은 잘 변하지 않는다.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항했던 주체들을 복원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복원의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면, 독립운동사의 다층적 맥락을 재현하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사를 신화의 영역에서 구출해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관해야 한다. 바로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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