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연세대 강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유교는 구속인 동시에,
해석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틀이기도 했다.
지식인의 토론과 경전 해석을 통해
유교는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재구성됐다.
조선에서 유교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실체였다.
흔히 조선시대는 유교와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유교적’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어딘지 강경하거나, 엄격한 도덕률을 고집하는 태도를 두고 ‘조선시대 같다’거나 ‘유교적’이라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유교를 연결 짓는 통념의 내용에 대해 막상 제대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이 유교 국가라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유교 국가가 되었을까. 흔히 말하듯,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적 습속을 배척하고(실제로는 다 배척하지 못했다), 적장자 상속을 제도화하며(실제로는 한참 뒤에나 가능하며,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지배층이 유교적 텍스트를 달달 외우는 것이 ‘유교 국가’의 기준인가?(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고려도 유교 국가다.)
유교는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라는 물음
이도저도 복잡하니, 그저 폐쇄적이고, 차별적이고, 여성을 핍박하고, ‘꽉 막힌’ 것이 유교라는 설명이 퍼져 있다. 유교에 그렇게 깊이 심취한 나머지 조선은 망국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생각이 귀결되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예전부터 그런 통념을 비판해왔다. 연구자들은 대중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유교가 낙후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소수에게는 조선 유학자들이 지녔던 진보적 성격이나, 조선이 지녔던 문화적 역량도 상당히 알려졌다. 하지만 ‘유교’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라는 식의 갑론을박으로는, ‘유교가 무슨 일을 한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보니 최근 조선시대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교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데 설명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나 성리학을 도외시하는 것이 능사일까. 조선 지식인의 사고 체계에서 유교나 성리학이 가진 비중은 상당히 크다.
그렇다면 조선을 이해하는 데 유교나 성리학을 의미있게 관련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유교 텍스트를 조선시대 지식인이 어떻게 읽었던가를 추적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렇게 독해된 유교적 텍스트를 통해 수립된 이상이 제도로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선의 지배층이 지배를 위해 불가피하게 도입했던 형벌과 그 형벌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덕치의 이상을 절충시키는 방안을 어떻게 고안했고, 그 절충 방안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 주목하기로 했다. 그것이 나의 박사논문 내용이 되었다.
이상론자의 ‘덕치’와 현실론자의 ‘형벌’
고려 말 유학자(성리학자)들은 자신의 시대를 ‘인륜이 파탄’된 시기로 규정하고 파탄 난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크게 노력했다. 고려 말 유학자들이 그런 노력의 과정에서 사회 전반에 관철하고자 했던 이상은 ‘덕치’로 요약된다. 덕치란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윤리적 본성을 각자 잘 가꾸게 하여 가족-사회-국가에 이르는 질서를 재구성하고, 폭력이나 강제를 통해 질서를 세우는 방식은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상만으로는 국가 제도나 정치 이념을 덕치에 맞춰 정당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덕치’의 이상을 추구한 유학자 정치인들은, 민간의 질서를 통제하기 위해 ‘형정’이란 것도 아울러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당화해야만 했다.
물론 ‘성인도 형벌을 폐할 수 없었다’는 유교적 텍스트 상의 명제가 통용되었던 만큼, 형벌의 필요성은 유교 지식인들에게 제한적으로나마 긍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유학자들 사이에서 덕치의 이상이 강하게 제기되었기에, 덕치의 한계를 암시하는 형정 사용의 현실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여말선초 유학자 지식인들은 아래의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했다. 국가의 공기(公器)로서 형벌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덕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덕치의 수단인 교육이나 교화가 ‘무지한 민’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지한 민’ 중에 도적이나 윤리 강상범이 생겨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장기적으로 그런 범죄를 줄일 수 있을까?
유교 텍스트 안에서 절충안을 찾다
이런 질문은 ‘덕치를 우선시하고 형벌을 최소화한다’는 원론만으로 답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긴 토론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의 국왕이나 유학자 관료들은 각자가 주목한 유교 텍스트의 구절을 근거로 들어 각양각색 주장을 폈다. 주희가 지은 저술들에서 육형(肉刑)을 옹호한 부분에 착안하여, 도적을 방지하려면 도적을 용서할 것이 아니라 다리 힘줄을 끊는 등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세종과 같은 이는 『근사록』에서 죄인이 스스로 뉘우칠 수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개념을 끌어와서 형벌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양 극단적 주장 사이에서 여러 절충안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토론은 세종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세종의 ‘애민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파격적인’ 주장들도 이런 토론 과정에서 나타났다. 세종은 백성이 무지한 까닭에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백성에게 형벌을 가하기보다, 백성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 대의 토론에서 제기된 주장 중 일부가 제도로 정착된 것은 성종 시기였다. 성종과 그 시기 유학자 관료들에게는 세종만큼의 ’파격‘적인 발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종은 죄인에 대한 처벌 기준이나 관용을 베푸는 기준, 민에 대한 윤리 교육의 방안 등에서 체계화된 틀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한 체계화의 과정은 민의 입장을 도외시하고 지배의 효율성을 기했다는 점에서 강압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처벌의 임의성을 상당히 제약한 점에서는 제도를 체계화시켰다고 볼 만한 면도 있다. 성종 시기에 나온 대안들 역시 모두 유교적 전통 내에 있는 텍스트 해석을 근거로 하였음은 물론이다.
유교, 구속인 동시에 자율성의 언어
여말선초 유학자들에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는 방법은 모두 유교적 텍스트의 범위 내에서 구상되었다. 유학자들은 유교적 텍스트를 근거로 한 덕치의 이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형정 사용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자는 유학자들의 의견도 유교적 텍스트를 근거로 할 때 등장할 수 있었다. 덕치를 강조하든 형정을 강조하든, 어느 입론이든 유교 텍스트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덕치의 이상을 강조하는 이상론자와 형정 실시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현실론자 간의 절충이 제도적으로 귀결된 성종 대까지의 과정을 ‘조선이 국가적으로 유교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각자 다르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유교적 텍스트에 근거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조선 초 개혁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이상 사회의 모습은 반드시 유교적 텍스트에 근거해야 했다.
하지만 유교적 텍스트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덕치와 형정을 어떻게 절충할지에 대한 토론도 이뤄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유교는 구속인 동시에, 해석의 자율성을 시험하게 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언어적 틀이기도 했다. 거꾸로 지식인의 토론과 경전 해석을 통해서 유교는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재구성됐다. 조선에서 유교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실체였다.
박사논문에서 이런 합의가 성종 시기에 접어들어 일단락되는 시기까지 다루었다. 성종 시기에 이뤄진 합의는 16세기의 사회적 변화를 맞아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앙 관료가 주체가 돼 제도 개편에 집중했던 15세기의 흐름과는 달리, 지방 사회를 직접 바꾸고자 한 또 다른 움직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를 통해 더 밝혀보고자 한다.
이상민 연세대 강사
2023년 연세대 사학과에서 「여말선초 덕·형 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조선의 ‘유교화’를 둘러싼 정치·사회·사상적 긴장을 다각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최근 발표한 주요 논문으로는 「고려말 무위(無爲)의 이상정치 지향과 유교적 형정론」 「조선 초기 지방지배와 향촌교화에 대한 연구와 쟁점」 「15세기 초 율문 교육과 형률적 교화 모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