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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자본주의’ 파헤치는 유용한 대안이 필요하다면
‘다양한 자본주의’ 파헤치는 유용한 대안이 필요하다면
  • 박지훈
  • 승인 2023.06.21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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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42 얼룩덜룩한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정치경제학과 한국사회
박지훈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문화정치경제학은 여전히 발전 중인 신생 이론 패러다임이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론, 현재도 유행하고 있는 라틴 유럽의 정치철학, 
그리고 사회체제론 이상의 비판적 이론 패러다임이 필요한 현실에서 
문화정치경제학이 그런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특히 공간적으로 민감한 비판적 문화연구와 해방적 정치경제학의 통합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문화정치경제학은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너는 여기”라는 담임 선생님의 ‘찍기 신공’에 어쩌다 경제학도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하필 그 해 말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한국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 카드대란, 그리고 신자유주의 논쟁이 뒤따랐다.

왜 그리고 어쩌다 이리되었는가? 적절한 답을 주는 이가 없기에 직접 해보기로 했다. 경제와 정치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터라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이라는 석사논문을 썼다. 

졸업 후 정당에서 일을 하다 영국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정치학과에 진학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학교뿐 아니라 전공도 사회학으로 바꾸었다. 몇 년 후 「얼룩덜룩한 자본주의 내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한 문화정치경제학」이라는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심사 통과 직후 지도교수께서 농을 건넸다. “그런데 이건 경제학인가, 정치학인가, 사회학인가, 지리학인가?” “내 논문은 횡단분과학문적(transdisciplinary)이다. 당신이 그리 가르치지 않았는가?”
 
횡단분과학문적 패러다임으로서 문화정치경제학 

줄여서 문화정치경제학이라고 하자. 그 명칭이 보여주듯, 이는 문화연구와 정치경제학의 결합된 형태를 취한다. 물론, 오늘날 문화정치경제학을 표방하는 흐름은 하나가 아니다. 그중 내가 선호하는 버전은 밥 제솝과 나일링 섬의 것이다.

그것은 ① 제도주의 경제학 분야의 조절접근, ② 행정학과 정치학의 거버넌스연구, ③ 정치학·정치사회학·정치지리학에서 활용되는 국가론, ④ 사회언어학에서 유래한 비판적 기호분석, ⑤ 역사기술학에 기반한 정세분석, 그리고 ⑥ 지리학자들이 제시한 얼룩덜룩한 자본주의적 접근 ⑦ 사회이론의 층위에서는 전략관계적 접근, 그리고 ⑧ 사회과학철학의 층위에서 비판적 실재론의 원칙에 입각하여 접합한 통합적 이론 패러다임이자 연구 프로그램이다. 

또한, 문화정치경제학은 ‘플레인(plain)’ 마르크스주의적 이론 기획이기도 하다. 이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론과 방법을 토대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마르크스를 19세기 유럽의 뛰어난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할 뿐 그를 신성화하거나 절대시하지 않는 입장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의 이론·방법·통찰을 참조하고 활용하되 그것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화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 이후의, 그리고 필요한 경우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외부의 이론적 발전도 종합하려 한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그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화정치경제학이 왜 위와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단, 그것은 실재-구체를 사유 속의 구체로 재생산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통해 그것은 환원주의를 지양한다.

동시에 환원주의를 극복하겠다는 미명 하에 메타이론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이론적 자원들을 마구잡이로 섞는 절충주의도 배격한다.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기회주의적 절충이 아니라 (메타)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종합이기 때문이다. 

영국 랑카스터대 문화정치경제학 연구센터에 참여한 연구자들. 왼쪽부터 국가이론가 밥 제솝, 비판적 실재론 연구로 이름을 알린 지리학자 앤드류 세이어, 동아시아 신흥공업경제에 대한 조절주의적 분석을 수행한 정치학과의 나일링 섬, 그리고 비판적 담론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언어학과의 노만 페어클럽과 루스 보닥. 이들은, 특히 제솝과 세이어는 사회학과 내에서 포스트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기반의 ‘모빌리티 연구’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 존 어리 및 그의 동료들과 경쟁관계를 형성했다. 

문화정치경제학,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문화정치경제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변은 불가능하다. 상기한 것처럼, 문화정치경제학은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이론적 자원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론이 모두 동일한 메타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현대 자본주의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 대한 미분적(혹은 차등적) 분석과 그러한 분석에 대한 적분적(혹은 통합적) 종합을 가능케한다. 따라서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그렇게 하려는 이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결과물의 형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발전모델을 재독해하면서 조절접근, 국가론, 비판적 기호분석, 그리고 얼룩덜룩한 자본주의적 접근을 선택적으로 활용했다. 각각의 분석을 종합하여 나는 그것을 상충하는 경제전략(특히, 파시즘적 자립주의와 자유무역지향적 발전주의)의 이종교배에 의해 탄생한 키메라적 모델로 재규정했다. 이 작업은 내가 수 년 동안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짧은 기간에 학술지 논문을 써야 했다면 나는 아마도 같은 연구대상에 대해 조절주의적 혹은 국가론적 분석만을 수행하거나 비판적 기호분석만 시도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문화정치경제학을 처음부터 전체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편, 문화정치경제학은 여전히 발전 중인 신생 이론 패러다임이다. 이에 그와 관련된 나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론 자체의 개선이고, 다른 하나는 개선된 이론에 기반한 경험연구이다. 이 맥락에서 현재 나는 세계시장에서의 패권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과 얼룩덜룩한 자본주의적 접근을 연결하는 논문을 쓰고 있다.

다채로운 자본주의 혹은 누더기 자본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 얼룩덜룩한 자본주의는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과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Variety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 사이의 차이와 관련이 있지만, Variegation은 전체 속에서 얽히고설킨 다양성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얼룩덜룩한 자본주의는 서로 복잡하게 연결된 세계시장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부각시킨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방법론적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비교자본주의론과 초지구화(Hyper-Globalization) 테제에 기반한 지구적 자본주의론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공간적 감수성을 갖는 얼룩덜룩한 자본주의적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스케일 재편, 경계 재구획, 영토 재설정에 따른 공간의 폭증과 같은 문제를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 이후 나는 사회구성체론의 혁신을 위해 전략관계적 접근이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론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해명하는 사회이론적 작업을 수행할 예정이다. 또한, 국가 공간의 변화나 국가 없는 사회 내 거버넌스의 (불)가능성과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경험연구와 관련해서는 향후 고등교육체계의 변화와 관련된 학문 자본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이후의 프로토콜 자본주의, 그리고 (대)도시의 정치경제와 관련된 사안을 다루려 한다.

위험에 대한 경고와 최후의 변론 

하지만, 문화정치경제학에도 단점이 있다. 첫째, 문화정치경제학은 짧은 기간 내에 그 사용법을 익혀서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상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학습하고 이해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정치경제학은 여전히 신생 이론 패러다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직접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유형의 연구는 특정 연구기법을 배워 흥미로운 상관관계를 발견하거나 대중적 환상을 기각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연구보다 훨씬 어렵다.

그럼에도 비판적 사회과학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문화정치경제학은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다. 국내의 비판적 연구자 중 어떤 세대는 ‘유신’에서 시작했을 것이고, 다른 세대는 ‘광주’에서 시작했을 것이며, 또 다른 세대는 ‘91년 5월’에 시작했을 것이다.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내 경우에는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에서 시작했다. 이후 나의 관심사는 발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최근에는 프로토콜 자본주의, 국가 공간의 변화, 다중스케일적 거버넌스처럼 좀 더 최신의 문제로 되돌아왔다.

내게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론이나 현재도 유행하고 있는 라틴 유럽의 정치철학, 그리고 사회체제론 이상의 비판적 이론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현재 나는 문화정치경제학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 특히 공간적으로 민감한 비판적 문화연구와 해방적 정치경제학의 통합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문화정치경제학은 유용한 대안일 수 있다.

박지훈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서강대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영국 랑카스터대에서 밥 제솝과 나일링 섬의 지도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은 사회과학철학, 사회이론, 정치경제학, 담론/기호분석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본축적의 시기와 경제위기, 그리고 위기관리 외에도 정치경제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얼룩덜룩한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정치경제학: 밥 제솝과 나일링 섬의 초학과적 이론 기획」, 「가치에 대한 노동이론인가 노동에 대한 가치이론인가: 마르크스의 가치론에 대한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다이앤엘슨의 해석과 그 영향들」, 「매리 루이스 프랫과 접경 혹은 접촉지대 연구: 비판적 평가와 대안적 전망」 등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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