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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를 통해 보통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의료를 통해 보통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 박승만
  • 승인 2023.10.11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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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54 의료사회사를 연구하는 이유
박승만 가톨릭대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조교수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인간 삶의 본질적인 측면인 생산과 재생산에는 
적지 않은 사회적 억압이 가해진다. 
그리고 이런 억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오랜 구조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의료라는 창을 통해, 
이런 오랜 문제의 원천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여러 인물의 노력을 밝혀내려 한다.

나는 현대 한국 의학사를 연구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의학사를 전공했다. 지금은 다시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연구와 교육을 맡고 있다. 이과와 문과의 구분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경력 탓인지, 처음 보는 분께 내 전공을 이야기하면 언제나 질문이 되돌아온다. ‘왜 생뚱맞게 역사학을 선택했어요?’

처음 석사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에게는 나름 커다란 문제의식이 있었다. 의학이 드러내는 여러 문제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을까. 당시에 특히 고민하던 문제는 의학의 불확실성이었다. 병원에서는 도대체 속 시원한 말을 해주지 않는다.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으면 정말 나을 수 있냐는 환자의 질문에 의사는 노상 ‘그건 알 수 없다’는 답을 내어놓을 뿐이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나는 여러 의학자가 의학 지식의 확실성과 확실성에 도달하는 방법을 두고 논쟁을 벌이던 19세기 파리의 의학계를 들여다보았다. 논의는 넓고 깊었다. 그러나 논의의 격렬함이 뚜렷한 결론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다시 벌어진 논쟁은 과거의 주장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결국 석사 논문에서 나는 이것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는 사실만을 확인한 셈이었다.

‘의료사회사’라는 새로운 접근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학술지이다. 『의료사회사』 제1권 제1호(1988) 표지다. 

의학사와 구분되는 ‘의료사회사’

석사 과정을 마친 후, 경상북도에서 공중보건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골치 아픈 고민은 잠시 내려놓고, 낮에는 환자를 보고, 밤에는 여유롭게 번역과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농촌 의료의 지난날이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무의촌(無醫村)에 의사가 배치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아프면 누구를 찾았을까.

당황스러웠다. 의사와 의학 이론이 없는 의학사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을까. 그제야 대학원 과정에서 배웠던 여러 수업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의학사는 20세기 중후반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인은 역사학 자체의 변화였다. 기존의 역사가가 ‘높으신 양반’과 ‘고귀한 이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새로운 이들은 보통 사람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의학사로도 확장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보다는 조금 덜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역시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의식으로 무장한 이들이 의학사에 합류하면서, 의학사의 탐구 영역도 달라졌다. 기존의 의학사는 대개 의학자의 이론을 다루었다. 이론에 미친 사회의 영향을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중심에는 의학자가 논의하고 실천하던 의학 이론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역사가는 보통 사람이 어떻게 아팠고, 또 어떤 방법으로 아픔을 해결하려 했는지를 살폈다. 그렇게 소위 ‘정통’ 의학뿐 아니라 돌팔이나 민간요법 역시 의학사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이들이 자신의 작업에 ‘의학사’와 구분되는 ‘의료사회사’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였다. 한국의 의학사 연구는 보통 해방 이전부터 활동하던 김두종(1896~1988)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연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1990년대 들어 의학을 전공했지만 역사학을 선택한 여러 의사와 역사학의 변화 속에서 의학사를 선택한 여러 역사학자가 나타나면서, 비로소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리고 이미 달라진 의학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의 연구와 교육은 처음부터 의료사회사의 지향을 담았다.

로이 포터의 『돌팔이』(2000)는 의료사회사가 의사나 의학 이론을 넘어, 보통 사람의 생활 전반을 조명하려는 시도였다. 

농촌에서의 공중보건의사 3년,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다

안타까웠다. 이름에 ‘늦을 만’이 들어가서인지, 언제나 나는 한발 늦게 핵심을 파악하곤 했다. 돌이켜보니 현장과 실천의 중요성은 내가 들었던 대부분의 수업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던 메시지였다. 처음부터 의료사회사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석사 과정 때 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늦었을지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었다.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농촌에 거주하던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수많은 사료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우연히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에서 태어난 신권식(1929~) 옹이 남긴 일기를 발견했다. 수업 때 읽은 로렐 대처 울리히(1938~1980)의 『산파일기』가 떠올랐다. 울리히는 『산파일기』를 통해, 개인의 기록이 개인의 특수한 삶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의 보편적인 현실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침 신권식 옹은 의사의 부재 속에서 마을의 지식인으로 자칭 타칭 ‘반의사’(半醫師) 생활을 하던 인물이었고, 일기 속에는 의료 문화에 관한 기록이 풍부하게 담겨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일기를 들여다보았고, 「어느 시골 농부의 ‘반의사’ 되기」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삼 년의 공중보건의사 생활은 내게 의학이 실천되는 구체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해주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기는 했지만, 현장을 겪어보지 못한 내게 의학은 오로지 학교에서 배운 이론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다 짧게나마 농촌 의료를 경험하게 되면서, 여기에서 의료가 구체적인 삶의 문제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과 함께 내 공부의 방향은 크게 달라졌다.

의료라는 창으로 ‘사회’를 들여다보기

공중보건의사를 마치고,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왔다.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정해야 했고, 이제는 한국의 현대라는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의료가 실천되는 구체적인 측면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생각했던 주제는 산업보건의 역사였다. 삶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노동이라면, 한국에서 의학과 노동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문제는 사료였다. 마음이 급해서였을까, 당시에는 사료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예전부터 묵혀놓았던 사료 더미가 떠올랐다. 가족계획 사업 당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도입된 복강경과 관련한 자료였다. 복강경은 통념과 달리 외과 수술을 위해 개발된 도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소수만 사용하던 진단용 기기였고, 이후 여성 불임 수술의 도구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활발하게 개발되고 확산했다.

사료를 가득 찾아놓고도 묵혀놓았던 것은 일종의 부담감 탓이었다. 물론 다른 주제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겠지만, 가족계획 사업은 정도가 달랐다. 남성 의사라는 특징이 사태에 대한 판단을 흐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이제 더 많은 가능성이 보였다. 어쩌면 복강경이라는 기술을 통해 1960~1980년대 한국 의료,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의 풍경을 드러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학위 논문을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압박감도 적지 않았다.

기대와 압박 속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계속해서 또 다른 사료와 읽을거리가 보였고, 몇 년 동안 조금씩 살을 붙였다. 그렇게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와중에 제출한 학위 논문에는 복강경이라는 기술이 재부상한 정치적·기술적 배경에 더하여, 복강경을 통해 한미 양국의 정부와 의학자, 여성이 무엇을 얻고자 하였는지, 그리고 복강경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이 담겼다.

박사 논문을 마무리한 이후에는 예전에 포기했던 노동과 의학이라는 주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급한 마음을 내려놓으니 적지 않은 사료가 보였다. 마침 몸담은 가톨릭대에 한국 최초의 산업의학연구소가 있어, 산업의학을 시작했던 이들이 남겼던 다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요한 또 다른 축인 노동자의 실천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여전히 인간 삶의 본질적인 측면인 생산과 재생산에는 적지 않은 사회적 억압이 가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오랜 구조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의료라는 창을 통해, 이러한 오랜 문제의 원천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여러 인물의 노력을 드러내려 한다. 그것이 의학사 연구자로서, 더 나아가 역사학 연구자로서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박승만 가톨릭대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조교수
가톨릭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의사학 전공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자로서 1960~198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의학 지식과 기술이 현실 속에서 생성되고 정당화되며 작동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교육자로서는 예비 의료인을 대상으로 의료가 단순히 과학기술의 일부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어느 시골 농부의 ‘반의사’(半醫師) 되기: 『대곡일기』로 본 1960~80년대 농촌 의료」, 「천연한 자연과 완전한 자연: 1970년대 중반 한국 가톨릭 가족계획 사업과 자연피임법의 경합」,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과 적정성의 역전: 1960~80년대 한국의 복강경-미니랩 기술 경쟁」, 「인물사: 의학사 교육을 통한 의학전문직업성 함양의 한 가지 방법」(공저), 「의과대학에서 의학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시기, 구성, 교수법」(공저) 등의 논문을 썼다. 윌리엄 바이넘의 『서양의학사』, 레이샹린의 『비려비마: 중국의 근대성과 의학』(공역) 등을 옮겼다.
seungmannhe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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