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7일, 일본 도쿄 중의원 예산위원회 제1위원실에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가 행한 발언은 전후 동아시아 안보 질서를 지탱해 온 ‘전략적 모호성’을 파기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다카이치 총리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대만 해협 봉쇄와 같은 유사 사태는 일본의 ‘존립위기사태’에 해당할 수 있다”라고 천명했다. 이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주창한 “대만의 유사는 일본의 유사”라는 독트린을 일본 정부의 공식 정책이자 법적 실행 단계로 격상한 결

2025년 11월에는 그해 2월에 타계한 문명교류학의 태두, 위공 정수일을 추모하는 행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서울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제1회 학술대회와 유작 『문명교류학』의 출간을 기념한 북토크가 그의 생을 그리는 전시회와 함께 열렸다. 경주에서도 이 열렸고, 2편의 다큐 영상도 제작되었다.위공은 1934년 만주국의 독립군 마을에서 출생해 중국의 외교관, 남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교수, 저명한 문명교류학자이자 민족주의 사회운동가이다. 그가 지극히 이례적인 삶을 살았던 만큼 그의 추모 자리에는 실로 다양

연초에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일본 관련 모 학회에서 올해 준비할 학술회의 주제에 대해 총무 이사 선생님과 대화 중의 일이다. 이런저런 주제를 제안하며 머리를 맞대던 중, 요즘 말로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었다. 시의성 면에서 통상 가장 먼저 떠올리는 주제는 기념할 만한 큰 사건의 몇십 주년 행사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꽤 여러 주제를 목록에 올리는 동안 올해가 일본의 패전으로부터 80주년이 되는 해니 관련 주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성일광 서강대 유로메나 연구소 연구교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삼라만상의 변화를 받아들일 일만 남은 것이다. 중동의 변화가 놀랄 일은 아니지만 판을 뒤엎는 변화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기존의 강대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강자가 갑자기 떠오르면 신앙처럼 받들던 신념을 버리기 쉽지 않다. 트럼프 2기의 미국이 과거의 미국이 아닌 것처럼 오늘의 중동은 어제의 중동이 아니다.올해 중동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천지개벽의 변동을 겪었다. 지난 6월 이스라엘과 이란의 12일간의 전면전도 놀라

[이동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HK교수] 인도 남서부 께랄라(Kerala) 주의회는 지난달 「동물 학대 방지(께랄라 개정) 법안」(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 (Kerala Amendment) Bill, 2025)을 통과시켰다. 1960년 제정된 「중앙 동물 학대 방지법」(Central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 Act, 1960)의 일부 조항을 면제해, 마라마디(Maramadi), 깔라뿟뚜(Kalapoottu), 깐누뿟뚜(Kannupoottu), 우라부(Uzhavu), 뽀톳땀(Pothottam) 등 전통 소

시칠리아 섬을 이야기할 때, 많은 이들이 마피아를 먼저 떠올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마피아는 지중해섬으로서 시칠리아가 감당해 온 숙명적인 고립과 그 고립 속에서도 유럽, 아프리카, 아랍 문명 모두에 노출되어 역동적으로 교차해 온 지정학적 상황을 반증하기도 한다.현재 이 고립을 종식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만성적인 낙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 바로 ‘메시나 해협 대교’(Ponte sullo Stretto di Messina) 건설이 이탈리아 국정 과제로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세계 최장

[박철현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202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중국은 2030년 탄소피크, 206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중국은 탄소피크와 탄소중립이라는 두 개의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을 의미하는 ‘쌍탄전략(雙碳戰略)’을 내놓기 시작했다.같은 해 10월 24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중앙인민정부)이 「탄소피크 및 탄소중립 달성에 관한 업무 의견」을 통해서 ‘쌍탄전략’ 달성을 위한 거시적인 정책을 내놓고, 이틀 뒤에는 국무원이 「2030년 이전 탄소피크 달성을 위한 행동방안」을 내놓음

2023년 봄, 튀니지의 항구도시 스팍스(Sfax)는 수천 명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이주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람페두사(Lampedusa)섬과 가깝다는 지리적 근접성과 항구도시로서의 이점으로 스팍스는 자연스럽게 중부 지중해 루트의 핵심 경유지이자 아프리카 이주 흐름의 중심 허브가 되었다.그러나 2023년 7월, 한 튀니지 청년이 이주민과의 충돌 끝에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스팍스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집단 폭력과 강제 추방이 잇따랐다. 이주민들은 현지 주민과 경찰의 무차별적 폭행과 체포를

세계 역사를 바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려 144번 나오는 ‘황금’이다. 그의 항해 이후 스페인의 수많은 모험가가 황금과 향신료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 탐험에 나섰다. 마야, 아스테카, 그리고 잉카의 찬란한 문명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표현대로 ‘총·균·쇠’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약탈의 시대가 개막한다.그런데 중남미에 반해 북미 대륙을 탐험한 모험가들은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에 있다고

아랍어는 현재 아랍국가연맹의 22개국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된다. 국제적으로도 아랍어는 유엔 6대 공용어 중 하나이며, 이슬람의 종교 언어로서 이슬람협력기구(OIC) 57개 회원국 중 50여 개국은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다. 아랍어는 그 국가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무슬림 소수민들에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랍어 서예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의 이슬람 사원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이는 아랍어가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를 잇는 상징임을 보여준다.전 세계 무슬림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최근 중국이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얄룽창포(Yarlung Tsangpo; 인도명은 브라흐마푸트라(Brahmaputra)강 상류에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 댐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하류에 위치한 인도의 물 안보와 생태계, 지역 정치 지형이 거센 파고를 맞고 있다. 이는 단순히 에너지 문제를 넘어, 이러한 댐 건설은 양국의 군사적·경제적 그리고 환경적 안보를 뒤흔들 수 있는 ‘물 분쟁’의 서막으로 간주되어 국제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지난 7월, 중국은 티베트 얄룽창포강에 기존 세계 최대 규모인

중앙아시아 최대의 쇼핑몰인 메가의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는 쌍봉낙타, 우측에는 단봉낙타가 나란히 서서 입장객들을 맞이한다. 그 사이에는 카자흐스탄 영토 모양을 닮은 얕은 분수가 자리한다. 이십 년 이상 그 두 종류의 낙타가 다니는 지역들을 연결하는 연구를 해와서인지, 이들을 본 순간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전통적 의미의 실크로드가 한눈에 빨려 들어왔다.중앙아시아는, 카자흐스탄은 그런 곳이다. 동쪽은 천산산맥을 경계로 중국과 면하고, 서쪽과 북쪽은 우랄강과 우랄산맥을 통해 유럽과 닿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두 땅 사이

“중국은 싫지만 마라탕은 좋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2018년 이후, 마라탕·꿔바로우·훠궈 등 중국 음식이 MZ 세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음에도, 정작 같은 시기 한국 사회의 반중 정서는 급속히 강화됐다. 이처럼 감정과 소비가 어긋나는 현상은 디지털 시대 한국인의 음식 소비 방식이 더 이상 국가 정체성과 나란히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음식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소비는 ‘중국 없이’ 이뤄진다.중국 음식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정신혁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드물게 일본에서 렌터카를 운전해야 할 경우, 이따금 머리와 손이 따로 놀곤 한다. 머리로는 방향지시등을 켜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손을 놀리자마자 애꿎은 와이퍼가 움직인다. 이내 급히 반대쪽 레버로 손을 옮기지만, 어쩐지 이 실수가 한두 번은 더 반복되곤 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차량의 좌측통행 방식을 채택하는 일본에서는 대체로 운전석과 방향지시등 레버의 방향이 한국과는 반대이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이처럼 국외 여행 중 차량 통행 방식의 차이로 인해 운전에 애를 먹는 일은 해외여행이 잦아진 오늘날에는 썩 드물지만도 않지만, 한 나

시리아와 레바논은 변할 수 있을까? 두 국가에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정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시리아에서 집권한 이슬람 극단주의 집권세력(HTS)이 친서방 노선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천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는 시리아 재건을 위해서 현 집권 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했다. 지난 5월 트럼프는 순방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아흐마드 알샤라 시리아 과도정부 대통령을 만나 제재 해제를 약속했다. 미국의 대시리아 제재가 일부 해제되고 미국의 전폭적

[강지훈 부산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이번 조사는 동아프리카 지역 청년들의 ‘이주’와 관련해 동기, 경로, 정책 수혜, 정착 형태 등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위해 시작됐다. 정량 분석은 현상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기대와는 달리 데이터 수집의 제약뿐 아니라 데이터나 수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현장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번 경험은 지금까지 의존해 온 데이터 기반 연구에 대해 '이것만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올해 6월 기준, 유엔난민기구(UN

지난달 27일, 스페인 전역의 우체국 직원들이 전국적 파업에 나섰다. 4만 6천 명의 직원을 둔 스페인 공영우체국 코레오스(Correos)의 노동자들이 ‘우체국 역사상 최악의 협약’이라 부르는 새 단체 협약안에 반대하며 마드리드 거리로 나선 것이다.이번 파업은 유럽 노동 환경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 볼 수 있다. 스페인의 노동총연맹 CGT(Confederación General del Trabajo)는 이번 협약안이 아마존처럼 초과근무와 성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민간기업 모

다언어사회인 인도에는 힌디어와 영어 외에도 22개의 지정어와 수많은 방언이 존재한다. 하나의 국어를 지정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지역 간 갈등을 유발했으며, 초대 총리 네루는 단일 언어 중심이 아닌 다언어 공존을 통한 세속주의 기반의 통합을 추구했다. 그 결과 공용어, 지정어 제도와 함께, 문학을 통한 문화 통합의 비전이 구체화됐고, 바로 그 중심에 1954년 설립된 ‘인도문예원(Sahitya Akademi)’이 있다.인도문예원은 정부의 초기 설립 제안서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인도 언어의 발전과 문학의

2025년 6월 13일, 이란과 미국 간의 핵 협상이 진행 중이던 가운데 이스라엘이 이란을 전격 공습하면서 중동의 정치 지형이 급변했다. 오만 무스카트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핵 프로그램의 평화적 성격을 보장하기 위한 협상이 재개된 지 몇 주 만에, 테헤란은 최근 수십 년 사이 가장 대규모의 공중 작전 중 하나의 표적이 되었다.이스라엘은 나탄즈에서 이스파한에 이르는 이란의 핵 시설과 군사·방공 인프라를 타격했다. 이스라엘 측은 주요 거점에 대한 동시다발적 공격과 이란 고위 지휘관들의 암살을 통해 방위 체계를 마비시키고 내부

쇼핑 계의 절대강자 두바이에는 세계 최대의 테마몰 이븐 바투타몰이 있다. 중세 최고의 대여행가인 이븐 바투타가 세계를 누비며 다녀간 노정을 테마 삼아 만든 이 몰은 풍성한 볼거리로 전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이집트관은 이집트 신전을, 인도관은 인도 궁전을, 중국관은 중국 어느 도시를 거니는 듯하다.우리도 이런 국제적 상징성을 지닌 인물을 통해 문화관광 상품을 개발할 순 없을까? 국내 최고의 부자 도시지만 문화인프라가 열악한 울산은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다. 울산이 배출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 외국인, 아랍에서 온 처용이 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