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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 없이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자를 양성할 수 없다
번역서 없이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자를 양성할 수 없다
  • 배세진
  • 승인 2024.01.0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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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63 인문사회과학에서 번역하기
배세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 문화연구전공 강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단 한 권이라도 더 번역한다면, 
나의 지성의 경계가 그만큼 확대되는 것이다. 
예비 연구자들이 번역 작업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만큼 자신의 사유의 역량이 강화될 것이고, 
‘덤으로’ 자신의 기여를 통해 한국의 학계를 위해 
투쟁과 봉사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짧은 시간동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제법 많은 책을 번역했다. 학계 바깥에서는 정치철학자 또는 문화연구자로서보다도 현대 프랑스철학 번역가로서 어느 정도 알려졌고, 동료 연구자들의 눈에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연구자로서보다 번역가로서 인정 받는 것에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심지어 인문학자도 아니고 사회과학자가 이렇듯 꽤 많은 책을 번역하는게 사회과학 내에서 상당히 특이하고 유별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박사학위 청구논문 집필을 앞둔 시점에서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신진연구자로서 보낸 2년의 시간까지 끊임없이 번역을 했으니, 신진연구자로서 가장 창조적일 시기를 내 글을 쓰는 대신 남의 글을 번역하는데 ‘허비’한 셈이다.

번역 작업에 매달리는 나를, 신진 학자가 가지기 마련인 창조적 에너지를 자기 글을 만드는 대신 남의 글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데 낭비한다 걱정하는 동료도 있었고, 내가 그 사유 행보를 따라 번역 작업을 모방했던, 번역을 상당히 많이 한 어떤 선생님은 자신이 젊은 시절 번역 작업에 매달려 자기 글을 더 많이 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나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아주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유(한편으로는 ‘실용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술적’인)에서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번역 작업을 한 것이고, 이것이 여전히 대단치는 않은 것이지만 나의 공부에 본질적 역량을 부여했다 생각한다. 나의 롤 모델이었던, 탁월한 번역으로도 탁월한 글쓰기(에크리튀르)로도 정평이 나 있는 저 선생님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번역 작업이라는 훈련 없이 글쓰기로 나아갔다면 결코 탁월함에 도달할 수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배세진 강사가 번역한 책들이다. 사진=배세진

누군가는 번역을 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 내 연구자들이 번역을 해야 하는 이유로 꼽는 첫 번째는 무엇보다 ‘누군가는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길게 논증할 문제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연구 실천 속에서 연구자들이 절감하는 바는, 전문번역가가 학술서를 번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번역가와 학술연구자 간 위계를 설정하고자 함이 전혀 아니고, 단지 텍스트의 성격상 학술서는 그 텍스트의 내용을 완전히 장악(마스터링)하고 있는 이만이(해당 외국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건 당연히 전제된 것이고) 번역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가 담고 있는 주제를 십년, 이십년 공부해 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도 완전히 장악했다 쉬이 말할 수 없는 그러한 텍스트를 전문번역가가 해당 언어를 장악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번역 기술을(그것도 학술번역의 기술과는 상당히 다른) 가지고 있다 해서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도 각자의 전문 영역이 명확히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술공동체 내 누군가는 번역을 해야 한다.

번역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냐고? 이미 세계화가 저물어갈 정도로 세계화의 시간이 흘러 이제 연구자들은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의 영어 실력을 의심하는건 전혀 아니지만, 엄연히 모국어와 외국어의 장악 수준이 다르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어떤 언어를 ‘학술 모국어’로 선택했는지에 따라(이는 결국 어떤 언어로 논문을 쓰는가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데) 읽기와 쓰기에서 가장 잘 장악된 언어가 연구자마다 존재하며, 말할 것도 없이 한국 학술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에게 학술 모국어는 한국어다. 이는 연구자들 간 세미나에서든 학회에서든 대학(원) 수업에서든 연구자들이 항시 마주치는 ‘정형화된 사실’이다.

자연과학은 몰라도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도구는 언어이고, 인문사회과학 내 연구자들은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사유를 교통한다.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모국어와 외국어의 문제는 자연과학에서보다는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이고, 그렇기에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어떤 텍스트의 한국어 번역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어려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학술 공동체 내에서 어느 수준으로 이해되고 있는지의 문제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번역서 없이 외국어(사실은 영어… - 영어 이외의 언어를 한국의 예비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자) 텍스트들만으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을 양성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육실천 속에서 매일매일 절감하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든 번역본들만으로 커리큘럼을 짜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영어 원서(또는 기타 외국어의 영어 번역본… - 정말 많은 경우 번역의 질이 좋지도 않은)로 억지로 수업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는 번역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 아닐까? 동료 연구자들을, 예비 연구자들을, 그러니까 결국 한국의 학술 공동체를 위한 것. 그러니까 번역은 한국의 학술 공동체를 위한 ‘투쟁’과 ‘봉사’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번역 실천을 위한 이러한 논거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너무나 취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의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글을 써서 학계의 동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학자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글을 번역하기보다는 그에 관한 논문을 쓰고 단행본 저서를 씀으로써 한국의 학술공동체를 위해 투쟁하고 봉사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를 앵무새처럼 번역하기보다 너가 랑시에르보다 더 나은 정치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랑시에르의 텍스트가 국역되어 있지 않더라도, 한국의 연구자들이 그에 대한 좋은 논문들을, 좋은 단행본 저서들을 많이 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논문들과 저서들을 가지고 커리큘럼을 짜면 된다. 그러니 너의 글을 써라.

하지만 모이쉬 포스톤(Moishe Postone)이라는 단 하나의 예만으로도, 아무리 좋은 논문들이 한국어로 많이 나왔다 쳐도 주저의 국역본 없이는 (교양 대중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또 다른 ‘정형화된 사실’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에는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 훨씬 더 복잡한 쟁점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한국 연구자들의 영어 실력을 의심하는건 전혀 아니지만, 엄연히 모국어와 외국어의 장악 수준이 다르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너의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나의 주장이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일부(그 일부가 상당히 넓다고는 생각하지만 - 게다가 인문학의 경우에는 거의 전부) 분과들에만 해당되는 얘기라는 점을 전제하도록 하자. 특히 통계를 방법론적 기반으로 취하는 사회과학을 하는 경우에는 내 얘기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정반대로 사회이론 또는 사회철학을 전공하는 사회과학자에게는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번역을 해야 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근거가 누군가는 번역을 해야 하는 이유의 전부라면 나는 번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저서들을 번역함으로써 동료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내 번역 덕에 수업을 더 원활히 진행할 수 있었거나, 또는 영어 번역본조차 없는 상황에서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좋은 내용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부족한 번역 작업에 대한 과분한 칭찬이라는 점을 한켠으로 치워두더라도, 나는 학계를 위한 투쟁과 봉사‘보다는’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학술적’ 작업, 그러니까 나의 글쓰기를 위해 번역을 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칭찬의 말들에 대해 어떠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 

복잡한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서양 사상의 차원으로 논의를 한정해보자면, 분명히 특정 서양 사상가의 학술 번역자로 적임인 연구자가 번역했음에도 번역서의 질은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깊이 있게 질문하고 탐구해보지 않았다 생각한다.

물론 번역가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바는 번역이 고도의 특수한 기술이며 그렇기에 단순히 그 서양 사상가가 활용하는 언어를 장악하고 있고 동시에 그 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번역 기술에 대한 수련을 받지 않았다면(마치 사회학자가 통계 기술을 배우듯) 번역이 전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고려하더라도 심각한 번역 문제를 우리는 많이 마주하게 되고, 이것이 한국 담론장에서의 서양 사상에 대한 논의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매일매일 푸념한다. 이렇게 정말 연구자들은 매일매일 이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게다가 새로운 역서가 나올 때마다 그 번역이 어떨지 가슴 졸이며 의심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 문제와 그 원인, 그리고 그 해결책에 대한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번역,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중 하나 

학술 논문과 단행본 저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나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취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자가 해당 서양 사상을 정확히 장악하고 있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중 하나는 번역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해당 서양 사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않더라도 학술 논문과 단행본 저서를 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이것이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명시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서양철학계에서 해당 서양 사상가에 대한 학술 공동체의 인정을 받은 번역서를 낸 철학연구자에게 (제도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특히나 많은 ‘크레딧’을 부여해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학술 논문과 단행본 저서의 집필이 인문사회과학 연구자에게 매우 중요한, 아니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인정 받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작업이라는 점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정확히 동일한 정도로, 자신이 전공하는 서양 사상가에 대한 좋은 번역본의 생산 또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에게 매우 중요한, 아니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인정 받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작업이다. ‘대가란 문헌을 장악하고 있는 자’라는 철학연구 내에서의 격언이 사실이라면, 더 나아가 ‘대가란 텍스트를 장악하고 있는 자’이고, 이 텍스트가 서양 언어로 쓰여져 있다면, 한국어를 모국어로 취하는 이가 텍스트를 온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번역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몇몇 분과는 제외하고, 또 몇몇 분과는 직접적으로 포함하면서,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번역은 그래서 자신의 사유를 심화시키는 최상의 방법이다. 왜 특히 인문학 내에서 끊임없이 ‘강독’을 하는가? 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텍스트를 한줄 한줄 읽히는가? 이는 텍스트에 대한 ‘물신화’ 아닐까? 나는 사회과학이 늘 경계하듯 텍스트의 내용을 ‘물신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텍스트의 물질성 그 자체를 ‘신성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여기에서 데리다의 저 유명한 ‘텍스트-바깥은 없다’라는 테제와 ‘에크리튀르’ 개념, 마르크스와 알튀세르의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테제와 ‘사유-구체’ 개념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에는 단 한걸음이면 충분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의하도록 하자).

텍스트를 허투로 보지 말고 텍스트와 끊임없이 씨름하기. 깊은 사유를 하는 사상가가 쓴 텍스트라면 그만큼 심원한 것일 수밖에 없고 절대로 단 한 번 읽고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외국어라면, 거의 번역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번 읽고 머릿속으로 한국어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좋은 텍스트는, 지금 이해했다 하더라도, 시절이 지나 다시 읽는다면, 다른 시대의 다른 이가 읽는다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의미를 뿜어내기까지 한다.

그런 텍스트는 해당 서양 사상의 전공자라 해도 절대로 번역 없이는 한국의 연구자가 온전히 장악할 수 없고, 이를 전공하고 있지 않은 다른 전공의 한국 연구자들에게는 그 장악이 더욱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교양 대중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글을 써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지당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나의 글을 쓰기 전에 남의 글을 정말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읽는 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류학에서 참여관찰이라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듯, 사회학에서 통계라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듯, 어떤 분야에서는(인문학의 대다수의 경우, 사회과학 내에서 사회철학이나 사회이론을 하는 경우) 남의 글을 읽는 훈련이, (서양 사상의 경우) 외국어로 된 남의 글을 읽는 훈련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독창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허상에 불과하다. ‘텍스트-바깥은 없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테제를 데리다가 주장하는 것과 내가 주장하는 것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이의 차이가 (언표 그 자체는 표면적으로 동일함에도) 존재하는 이유는, 데리다가 이 테제에 대한 언표로까지 나아가기 위해 읽었던 서양 사상의 폭과 깊이가 내가 이 테제에 대한 언표로까지 나아가기 위해 읽었던 서양 사상의 폭과 깊이와 비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창성은 이전의 텍스트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꼼꼼한 읽기로부터 생산되는 것이지 ‘무학의 통찰’로 얻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전에 생산된 텍스트를 얼마나 깊고 넓게 읽었는지가 독창성을 규정한다. 그러니 남의 글에 대한 읽기는, 결국 한국에서 한국어로 서양 사상을 연구하는 연구자에게 번역은, 한국의 연구자가 독창적인 나의 글을 쓰기 위한 전제로서의 사유의 훈련, ‘강한 사유’를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래서, 나의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이전에, 남의 글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외국어로 된 남의 글이라면, 번역을 통해 남의 글을 제대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한국어와 외국어를 갈고 닦아야 한다. 외국어를 갈고 닦아 서양 사상가의 글을 엄밀히 독해하고, 한국어를 갈고 닦아 이를 한국어로 엄밀히 옮겨야 한다. 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이에 대한 엄밀한 주해까지도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심화시켜 독창성으로까지 상승해야 한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자신의 독창적 테제를 주장하는 한국의 연구자는, 자신의 논문의 참고문헌에 제시되어 있는, 자신이 한국어로 번역했기에 누구나 접근해 읽고 자신이 얼마나 제대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그 번역 텍스트들을 통해 자신의 테제의 독창성(유효성은 말할 것도 없고)을 뒷받침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서양 사상의 역사란 이 서양 사상의 한국어로의 번역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서구와 한국 학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최상의 도구로서 번역

또 하나의 전제를 달자면,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나의 논의는 역시 서구 학계, 서양 언어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를 언젠가는 깊이 있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편’의 차원으로 한 번 더 상승해 아주 간략히만 짚고 넘어갈 지점은, 번역만이 서구 학계와 한국 학계의 담론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 학계와 한국 학계를 각각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 논의를 전개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국 학계 중 어떤 측면은 서구 학계보다 앞서 있고, 서구 학계 중 어떤 측면은 한국 학계보다 앞서 있다.

어떠한 절대적 우위를 말한다기보다는, 한국 학계와 서구 학계가 서로에 대해 가지는 비교우위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이고, (당연히 서구 학계가 한국 학계의 담론을 어떻게 수용하는지의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당장은 아니므로) 서구 학계가 가진 어떤 측면에서의 우위를 한국 학계가 수용해 한국 학계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기 위해서는, (한국적 담론을 만드는게 오히려 이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관념을 제외한다면) 서구 학계의 담론을 ‘올바르게’ 수용함으로써 서양의 담론이 한국 학계 내에서 창조적으로 ‘여행’하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으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복잡한 논의로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러한 올바른 수용을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좋은 번역’이라는 점은 모두가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시 모이쉬 포스톤의 경우로 돌아오자면, 포스톤의 주저(아니, 굳이 주저까지 가지 않더라도…)인 『시간, 노동, 사회적 지배』가 번역되었더라면, (한국의 교양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학계에서 포스톤에 대한 논의의 수준이 훨씬 더 넓고 깊어졌으리라는 점은 명약관화하지 않을까?

물론 한국의 학계에서 이미 생산된 포스톤에 대한 뛰어난 논문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로 모여 어떠한 ‘시너지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포스톤에 대한 학술행사를 한국에서 개최하고자 한다면, 모두가 알고 있듯, 반드시 『시간, 노동, 사회적 지배』의 한국어 번역본 출간 기념 행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미 서양 사상을 수용한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서양 사상의 한국어 번역의 관점에서 이 역사를 다시 톺아본다면, 결국 한국에서의 서양 사상의 역사란 이 서양 사상의 한국어로의 번역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 어떠한 서양 사상도 번역서 없이 한국에서 여행하지 않았다. 번역서 없는 서양 사상은 (떠도는 소문의 형태를 제외한다면) 한국의 학계에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국의 교양 대중에게는 이러한 번역서 없는 서양 사상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다. 이 문제가 한국 학계의 역량을 (더 나아가 한국 교양 대중의 사유 수준을) 체계적으로 침식시킨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서양 사상의 핵심 저서가 한 권이라도 번역되었더라면, 이 서양 사상은 한국 학계를 여행하면서 한국 학계에서의 논의를 한 차원 더 풍부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접하지 못하게 된 ‘사산된’ 서양 사상은 얼마나 많을까(다시 한 번 지적하지만, 비영어권의 그 수많은 창조적 사상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시야를 얼마나 좁게 만들었을까.  

단 한 권이라도 더 번역된다면, 그만큼 지성의 경계는 진전된 것

현대 프랑스철학 텍스트들을 번역하면서, (비-학술번역도 물론 마찬가지이겠지만) 학술번역(그리고 전문적인 문학번역)이 단순한 기계적 작업과 스킬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언어는 사유의 집’이라는 흔해빠진 서양철학의 경구를 굳이 읊지 않는다 해도,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다른 사유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가 여러 언어의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매일 반복해 확인하는 정형화된 사실이다.

영어로 생산된 사유와 프랑스어로 생산된 사유는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역사와 전통이 다르기에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다름’의 격차를 생산적이고 풍부한 방식으로 ‘줄여’ 지적 교통을 가능케 하는 것이 번역인데, 그렇기에 번역은 단순한 기계적 작업과 스킬로 환원될 수 없고 (여러 철학자들이 번역 그 자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고자 노력했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항상 철학적 잔여를 남긴다. 

따라서 단순히 프랑스어를 장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단순히 해당 사상의 내용을 장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해당 사상이 쓰여진 언어의 장악 없이 내용의 장악이 가능한지부터가 의문이지만) 번역이 가능하지는 않다. 그래서 현대 프랑스철학 번역을 위해서는 이를 위한 특수한 훈련(우리가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기는 힘들지만, 앞서 암시했듯 철학적 수준으로까지 하강해 진행되어야 하는)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영어권 사상이라면 영어권 사상을 위한, 프랑스어권 사상이라면 프랑스어권 사상을 위한, 독일어권 사상이라면 독일어권 사상을 위한 번역 훈련을 과정생에게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다.

해당 언어의 장악과 해당 사상의 장악만으로 번역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각 사상 분과 내에서는 그 언어와 사상에 맞는 번역 훈련을 체계적으로 제공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학술 번역에 뜻 있는 이들은 이를 선배들이 생산한 번역 텍스트들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스스로 배워나갈 수밖에 없다. 번역이 단순한 기계적 작업과 스킬로 환원되지 않기에, 번역 없이는, 아무리 기계 번역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더라도, 서로 다른 언어권의 학계 간 학술적 교통과 지적 평등은 불가능하다. 

이 심각한 문제를 논하기 위해 굳이 번역에 대한 자크 데리다나 주디스 버틀러, 포스트-식민주의자들의 논의까지 갈 것도 없다. 번역 없이 서양 학계와 한국 학계 간 생산적인 학술적 교통과 지적 평등, 서구중심주의 극복 등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한국 학계에 있는 이라면 누구든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당장 우리가 이러한 학술적 서양중심주의(정확히는 영미권 중심주의겠지만 이 또 다른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서양 학계에 대한 지적 종속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면, 제도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면, 우리는 번역해야 한다. 이미 제도적 차원의 변화를 기다리지 않고 시행착오를 거쳐 몇 권이라도 더 번역하고자 했던 선배들의 성과가 있으니.

결국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또는 연구자들 간 지적 평등이라는 거창한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다음과 같이 정리하도록 하자. 좋은 학술 번역가가 이렇게나 양성되고 재생산되지 않는데에는 앞서 언급했듯 제도적 차원의 문제가 놓여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번역 실천은 한 권이라도 더 번역한다면 그만큼 변화가 두 눈으로 보이게 실질적으로 기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와 동시에 나의 사유가 변화가 두 눈으로 보일 정도로 깊어지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매력적이고 즐거운 작업이다.

나는 번역 작업을 통해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새로워진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번역 작업에 대한 동료 연구자들의 인정보다는)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러니까 번역을 하기 전에 내가 텍스트를 얼마나 허술하게 읽었는지 부끄러움 속에서 확인하는 과정과 이를 수단으로 한 텍스트 이해의 갱신 때문에, 번역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단 한 권이라도 더 번역된다면, 한국 학술 공동체의 지성의 경계는 그만큼 진전되는 것이지만, 이는 정확히 동일하게, 단 한 권이라도 더 번역한다면, 나의 지성의 경계가 그만큼 진전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비 연구자들이 번역 작업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만큼 자신의 사유의 역량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을, ‘덤으로’ 자신의 기여(즉 ‘컨트리뷰션’)를 통해 한국의 학계를 위해 투쟁과 봉사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배세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 문화연구전공 강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 문화연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랑스 파리-시테 대학(구 파리-디드로 7대학)에서 정치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주제는 문화연구 내에서 현대프랑스철학을 문화이론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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