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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게, 배척하거나, 숨기는 방식을 넘어서
보이지 않게, 배척하거나, 숨기는 방식을 넘어서
  • 이주영
  • 승인 2022.11.3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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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31 한국 문화 속, 한흑혼혈인의 재현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한흑혼혈인들이 더 다양한 이야기와 
서사 속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재현이 ‘다문화’라는 정치·사회적인 목적에 의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인종’ 그리고 ‘다민족’ 국가가 되어가는 한국의 구성원으로서 표현되고 있는지 
우리는 면밀하고 명민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2020년 한국 사회는 이주민이 전체 인구의 4.16%를 차지하면서 OECD기준 다문화 사회에 근접하게 되었다. 2008년 ‘다문화가족지원법’ 시행 이후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결혼이민자, 이주노동자, 유학생, 혼혈인 및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소개가 많아졌다. 2022년 현재, 「이웃집 찰스」와 「물 건너온 아빠들」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국가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다문화에 가까워 졌을까?

하지만, 단순히 대중에게 많이 보이는 것이 우리 사회가 다문화에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한흑혼혈인들은 한국의 다민족 역사 속에서 법적?제도적으로 지속해서 음지에 몰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에서는 그들을 지속해서 재현했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국 문화 속, 한흑혼혈인의 재현’은 이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 연구이다. 특히, 이번 연구는 1990년대 이후 노동, 결혼, 직장, 그리고 유학으로 인한 이주민에 집중하기보다는 광복과 분단을 거치면서 주한미군의 영향으로 다인종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했던 혼혈인들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중 한흑혼혈인들을 집중해서 보는 이유는 그들이 태어났을 당시 흑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대중문화의 시각이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어떠한 양식으로 그려졌는지 얘기해 보고자 한다.

단일민족, 그리고 미군정 시기 미국계 혼혈의 탄생

1945년 광복 후 국가 수립이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단일민족’의 프레임은 민족과 국가의 단일성을 강조했던 정치·사회적 담론과 함께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군정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나기 시작한 미국계 혼혈의 탄생은 이러한 담론에 반하는 존재들로 여겨지며, 다양한 한국의 문화 속에서 굴절되어서 묘사되었다.

1949년 주요섭의 「혼혈」에서는 이항 대립적 시선으로 그들을 한국인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검고 장때같이 키큰 노린내 풍기는 도깨비”같은 흑인에게 윤간당한 김소사를 동물적으로 기술하며, 김소사가 낳은 “깜안 강아지 같은 깜동아기”는 결국 유기되는 것으로 서술한다. 이는 비단, 소설적 상상이 아니었다. 1947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의하면, 한흑혼혈 쌍둥이가 유기되었다는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일민족’이라고 믿어져 온 한국에서 타인종의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특히나 동물적으로 묘사되던 흑인의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전면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태도는 1950년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집권 시절, 각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맞물리면서 입양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한흑혼혈아들이 한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하는 방법을 취한다. 한국전쟁(1950~1953)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혼혈고아들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였다.

1954년 1월 15일 『국무회의록』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혼혈고아를 양자, 양녀로 원하는 외국인이 있는 경우에 여차(이러한, 이와 같은)한 외국인의 원망에 부응토록 조치하라”는 행정조치를 내림으로써 국가가 혼혈아들을 입양 보내는데 주도적인 태도를 가졌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 그리고 분리 정책(segregation)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게다가 ‘백인-비백인 혼인 및 출산 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s)에 의하여 혼혈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

또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로 인하여 1952년 ‘매카런 월터법’(The McCarran-Walter Act)이 시행되기 전까지 아시아인들은 미국 시민권을 따지 못했다. 극심한 인종차별의 시기, 미국에서는 흑인이 주축이 되어서 ‘시민운동’(the civil rights movement)의 물결이 1954년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에서 태어난 한흑혼혈아들을 구제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흑인 독자를 위해 출판됐던 대표적인 잡지 <에보니>는 1955년 한흑혼혈인들의 실상을 기사로 다루었다. ‘배척된’ 한흑혼혈아들을 흑인들이 적극 입양하자고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한흑혼혈인 실상을 다룬 1955년 『에보니』

흑인 독자들을 위해 출판되었던 대표적인 잡지 <에보니>(Ebony)와 <제트>(Jet)는 한국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한흑혼혈인들의 실상을 다루었다. 1955년 <에보니>와 <제트>에 실린 기사들은 한국 사회에서 “배척된” 한흑혼혈아들을 흑인들이 적극적으로 입양하자고 서술한다.

그리고 기사와 함께 그 아이들의 사진들을 위와 같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에보니>를 보고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한흑혼혈인들을 구하러 왔다는 크레몬드 여사는 1959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흑인은 흑인이 이해하지요”라며 그녀의 입양 사업은 전 세계적인 흑인 구제 활동임을 드러냈다.

즉, 1950년대 한국의 법과 미디어가 한흑혼혈인들을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해외로 입양하는 방법을 간구했지만, 미국에서는 당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물결이 일어나, 한국에서 인종차별로 고통 받고 있던 흑인 혼혈아들을 구제하는 방법을 도모, 이들의 사진을 미디어에 지속해서 노출해, 한국으로부터 입양을 간구한 것이다. ‘단일민족’을 꿈꾸었던 한국과 인종차별 없는 미국을 꿈꾸었던 흑인들 사이에서 한흑혼혈인들은 다르게 재현되던 1950년대였다. 

이렇듯 한국에서 국가적 차별과 냉대를 받았던 한흑혼혈인들은 1961년 “외국인이 대한민국 국민인 고아를 양자로 함에 있어서 간이한 조치”를 취하기 위한 ‘고아입양특례법’ 제정에 따라 더욱 많은 인구가 미국으로 입양을 가게 된다. 이들의 모습은 1960년대 주명덕 작가가 입양을 기다리며 보육원에 있었던 한흑혼혈아들을 찍은 사진 속에 남아있다. 

1970년대 ‘블랙페이스’…박일준과 인순이의 등장

1970년대 말, 1세대 한흑혼혈아들이 20대가 되던 그 시점에, 우리는 이전 대중문화와는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는 한흑혼혈인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인 <내가 낳은 검둥이>(1959), <청춘을 변상하라>(1965), <혼혈아 쥬리> (1974)와 같은 영화에서는 한흑혼혈인들이 배우로 등장하기보다는 한국 배우들이 얼굴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한흑혼혈인을 연기하였다. 다시 말하면 ‘블랙페이스’는 당시 한국에 존재했던 한흑혼혈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1977년 박일준, 1978년 인순이의 데뷔와 맞물려, 그들은 TV에서는 가수로 영화에서는 배우로 시청자들에게 드러났다. 실제 한흑혼혈아들이 드디어 대중문화에 직접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철새들의 축제>(1978) 그리고 <흑녀>(1982)에서 박일준과 인순이는 기지촌의 문화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며, 한흑혼혈인들에게 쓰인 멍울이 부각된 서사를 반복한다. 즉, 재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온 여정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기지촌만을 부각했던 차별의 폭력적 시선은 1980년대에도 지속된 것이다.

1990년대 세계화와 힙합…윤미래의 등장 

1990년대에 들어, 우리는 윤미래라는 한흑혼혈인 래퍼를 만나게 된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주도하에 ‘세계화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세계화와 발맞추어, 당시 한국의 음악계는 ‘업타운,’ ‘솔리드,’ 박정현과 같이 한국계 미국인 음악가들이 다수 데뷔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힙합과 알앤비 장르의 유입으로 인하여, 이들의 ‘국적’은 그들의 ‘정통성’(authenticity)을 강조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중, 한흑혼혈인 래퍼 윤미래는 ‘업타운’의 일원으로 데뷔했는데, 여전히 한국의 미디어는 그녀의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혼혈인임을 숨기는 방식을 반복했다. 역설적으로, 그녀의 ‘국적’과 인종적 ‘모호함’은 업타운의 힙합 ‘정통성’을 내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즉, 우리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한국의 미디어와 제작사들이 여전히 한흑혼혈인을 대상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08년 다문화가족지원법, 그리고 현재 

2000년대에 들어와 앞서 언급한 법적·제도적 변화들로 인하여, 우리는 한흑혼혈인들이 더 다양한 이야기와 서사 속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미국의 전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와 알앤비 가수 에이머리와 같은 한흑혼혈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방문하였고, ‘다문화’사회로 변하는 한국을 홍보하기 위한 중요한 인물들로 급부상하게 된다. 하인스 워드는 1976년 한국에서 태어났을 당시, 호주제로 인하여 가질 수 없었던 한국 시민권을 대신하여 2006년 명예 서울시 명예 시민증을 수여 받았다.

하지만, 그 재현이 ‘다문화’라는 정치·사회적인 목적에 의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인종’ 그리고 ‘다민족’ 국가가 되어가는 한국의 구성원으로서 표현되고 있는지 우리는 면밀하고 명민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여전히 한국 문화 속에서, 번번이 사용되는 ‘블랙페이스’와 흑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 한흑혼혈인을 ‘우리’의 일부가 아닌 ‘타’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치부, 그리고 앞서 언급한 유명인뿐만이 아니라, 실제 매일의 삶을 살아가며 차별의 벽을 경험하는 한흑혼혈인들은 우리가 아직은 ‘다인종’ 및 ‘다민족’에 대해서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다문화’에 대한 제도적 변화뿐 아니라, 다양한 한국인에 대한 문화 속 재현과 우리 시각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이주영 한국외대 한국학과 조교수
한국 디아스포라 및 다문화와 문화이론의 접점을 연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설명한 ‘한국 문화 속, 한흑혼혈인의 재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펠로우십으로 작성된 박사논문 「한흑혼혈인의 영상족보: 미국과 한국 문화에서의 트랜스내셔널 재현」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최근의 주요 논문으로는 「검은 한국: 인종, 국가, 힙합, 그리고 문화 혼종성」을 썼고,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의 텍스트, 파라텍스트, 콘텍스트」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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