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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의 경계에서 연구하기…하고 싶은 연구를 위한 시너지
낮과 밤의 경계에서 연구하기…하고 싶은 연구를 위한 시너지
  • 강신규
  • 승인 2023.08.16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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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48 생계 현장에서 비주류 연구를 계속한다는 것
강신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낮과 밤의 연구 분야가 분리되면서 얻게 된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연구가 자유로우면서도 비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낮과 밤의 연구가 따로 독립돼 
이뤄지진 않는다는 점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이다.
나에게 낮과 밤 사이의 균형이란, 미디어 산업·정책 연구와 문화연구 사이, 
직장인과 연구자의 사이, 일과 활동 사이에서 
양쪽을 오가며 서로를 잇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여름 한 학회에서 주최한 신진 연구자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각자 연구해왔던 주제에 대해 발표·토론하면서, 자신의 연구환경이나 관심사에 대해서도 공유하는 자리였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낮에는 공공기관 연구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한다는 말을 슬쩍 꺼냈는데, 뜻밖에 그날 참석한 신진 연구자 사이에서 ‘낮-밤 이야기’가 꽤 화제가 됐다. 이어졌던 저녁자리에서도 여러 참석자가 자신도 비슷한 상황임을 귀띔해주었다.

인문사회과학의 위기 심화, 학령인구 절벽 가속화, 그에 따른 대학 정원과 강사 수의 감소세, 커리큘럼 부실화, 대학의 요구실적 및 요건 점증세 등으로 인해 안정적인 환경에서 하고 싶은 연구에만 전념하는 것이 시스템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다.

많은 연구자는 연구하기 위해 연구시간 외 시간에 다른 많은 일을 하며 지낸다. 과외 일을 일절 하지 않고 ‘낮에도’ 자신의 연구만 할 수 있는 연구자는 극소수이고, 나 역시 그럴 수 없는 연구자 중 하나다.

하고 싶은 연구만 하기는 어려운 현실

박사과정생에서도 세부전공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강의나 연구 프로젝트를 쉬지 않고 했다. 그런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생계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신문방송학의 경우 관련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미디어기업, 방송사, 이동통신사, 포털사 등의 연구 프로젝트 공급이 있는 편이어서, 연구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해당 기관에 다니고 있는 선배와의 협업에 꾸준히 참여할 수는 있었다.

강의와 특히 연구 프로젝트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개인 연구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낮-밤과 평일-휴일 없이 주어진 업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업무 외 혹은 업무의 연장으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도 늘었다.

하고 싶은 연구에 좀 더 시간을 쏟기 위해 강의나 연구 프로젝트를 줄이고 싶었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강의나 연구 프로젝트 참여 요청을 한 번 거절하면 다시 받을 수 없거나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방학 기간이면서 상대적으로 연구 프로젝트 비수기라 할 수 있는 연초를 위해서 연말까지 좀 더 많은 돈을 미리 벌어놔야 하는 측면도 있었다.

물론 세부전공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강의나 연구 프로젝트를 하는 데 있어 경제적 측면에 대한 고려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했어야 옳다. 취업에 더 많은 선택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미디어 산업이나 이용에 대한 양적연구가 주류인 신문방송학과에서 비주류인 문화연구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중에서도 비주류인 서브컬처를 연구한다는 것이 졸업 이후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이기도 했다.

낮과 밤 연구의 분리로 힘들어하는 많은 연구자가 밤의 연구를 놓지 않았으면 한다. 그림=DALL·E

낮에는 미디어 정책, 밤에는 서브컬처 연구 

그리고 그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졸업 직후 공공기관 연구소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취업한 후에야 나는 전보다 내 연구에 좀 더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일과시간에 회사에서 주어진 과업을 열심히 하면, 나머지 시간엔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연구만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일과시간에 세부전공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일과외 시간에까지 그런 일을 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낮에는 미디어 산업과 정책을, 밤에는 서브컬처를 중심으로 한 영상문화를 연구하게 되었다. 전자는 주로 한국 미디어 산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방향이나 구체적인 지원사업을 기획·발굴하는 데 초점을 둔다.

후자는 우리 삶에서 서브컬처가 무엇이고, 서브컬처에 대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반응해 왔으며, 지금의 서브컬처 향유와 앞으로의 서브컬처 향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등에 관심을 갖는다.

낮과 밤의 연구분야가 분리되면서 얻게 된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연구가 자유로우면서도 비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연구는, 연구자가 다른 누군가나 환경적·구조적 요인으로부터 강요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강요당하는 순간 연구는 연구자의 마음을 끄는 즐거움이라는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 밤의 연구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누구의 의도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또, 연구가 비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재화도 부도 어떠한 경제적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내 밤의 연구는 생계유지와 거리를 둔다. 그것을 매개로 이직을 하려는 생각도 갖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비자유성과 생산성을 낮의 연구가 책임지고 있는 덕분이다.

다른 하나는, 낮과 밤의 연구가 따로 독립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적 차원에서 낮의 연구 덕에 밤의 연구가 가능해지는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둘은 서로 연결돼 있다. 미디어 산업과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이 신문방송학 내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비주류 세부전공자인 내가 공공기관 연구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비주류성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문화연구를 하기 위해 쌓아 올렸던 시간이 어떻게든 내가 미디어 산업·정책을 전공자와는 다르게 바라보는 데 기여했다고 믿는다. 문화연구적 시각에서 현상과 사안을 바라보고, 면밀하게 분석·비판하고, 입체적으로 통찰하는 자세는 문화연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먹고 살아가는 연구, 하고 싶은 연구의 균형

그리고 더 중요하게, 낮의 연구도 밤의 연구에 보고서의 체계성을 덧입히고, 산업·정책의 관점을 조금 섞어 상대적 균형감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난 내 밤의 연구 역시 내 기존의 연구 혹은 다른 동일전공 연구자와 조금은 다른 관점 및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산업·정책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내 연구를 재미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추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접하기를 바라게 된다.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자들 역시 내 연구를 조금은 새롭게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내 낮의 연구와 밤의 연구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의 낮과 밤이 그러하듯, 내 낮과 밤의 연구도 연결되고 순환한다.

주변에서 낮의 연구가, 밤의 연구를 잡아 먹어버리는 연구자도 여럿 봤다. 언젠가부터 그들은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된 연구자가 진정한 연구자가 아니라거나 나쁜 연구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밤의 연구를 위해 받아왔던 훈련이 크건 작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한 일을 해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낮과 밤 연구의 끊임없는 연결과 순환, 그에 기반한 공진화는 더 이상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밤의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낮의 연구만으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밤의 연구가 없다면 낮 연구의 의미 자체도 퇴색되고, 밤 연구와의 연관 속에서 갈수록 나아지는 낮 연구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낮과 밤 연구의 분리로 힘든 많은 연구자가 밤의 연구를 놓지 않았으면 한다. 밤의 연구는 우리 연구의 시작이었고, 낮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우리 연구의 전부였다. 밤에 하는 연구일 뿐, 그것은 우리 속에서 늘 환하게 빛나던 삶의 동력이었다. 그렇기에 밤에 서서, 낮의 연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둘 사이 어딘가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균형감을 얻기를 바란다.

나에게 낮과 밤 사이의 균형이란, 미디어 산업·정책 연구와 문화연구 사이, 직장인(연구자와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 직장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니다)과 연구자의 사이,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려 일(work)과 활동(action) 사이에서 양쪽을 오가며 서로를 잇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쪼록 낮과 밤의 연구자들이 밤의 시간을 통해 더 밝은 낮을 맞이하고, 그 밝은 낮을 지나 더 환한 밤을 맞길 기원한다.

강신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
낮에 미디어 산업·정책을 연구한다. 밤에는 게임·만화·방송·팬덤 등 미디어 문화를 연구한다.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 게임광고자율규제위원, 개인정보보호위원회 홍보전략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언론학회·사이버커뮤니케이션학회·한국문화연구학회 등에서 이사도 맡고 있다. 저서로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공저, 2021), 『서브컬처 비평』(2020),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공저, 2020),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공저, 2019),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공저, 2015), 『게임포비아』(공저, 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공저, 2022), 「커뮤니케이션 소비로서의 랜선문화: 브이로그 수용과 연결 개념의 확장」(2020), 「생산과 놀이 사이, 놀이와 노동 사이: <프로듀스 48>과 팬덤의 재구성」(공저, 2019),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메타/게임으로서의 게임 보기: 전자오락 구경부터 인터넷 게임방송 시청까지」(공저,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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