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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공급망 재편, 적응과 도태의 갈림길에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적응과 도태의 갈림길에서
  • 이재민
  • 승인 2023.08.02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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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⑦ 이재민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 1일 이재민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공급망과 국제 정치」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8강은 김종법 대전대 교수(글로벌문화콘텐츠)의 「국제 이주와 난민 문제」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런 작업이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기여해야 한다.
공급망 재편 관련 문제를 글로벌 중추국가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외교 과제의 핵심 중 하나로 파악하고 접근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패러다임 변화’라는 용어를 여러 측면과 계기에 자주 사용해왔다. 대부분의 경우 이 용어는 수사적인 표현에 가까웠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경제 체제 역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기존의 국제경제 체제를 유지해오던 기본 골격과 원칙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 자유 교역과 투자 확대를 모토로 추진되어 왔던 그간의 방정식이 이제는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지금 ‘공급망’ 재편이라는 작업이다.

아마 요즘 언론이나 서적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국제 사회에 대한 새로운 도전 과제의 등장과 이로 인한 국제 관계의 변화가 지금의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런 변화가 기업과 개인이 활동하는 현장에서 발현되는 현상이 공급망 재편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공급망이란 무엇인가? 공급망은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산출하거나 디지털 품목을 창출하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각각 필요한 구성 요소를 확인·확보·조달하는 국제적 체제를 의미한다.

이재민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그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성되던 공급망에 큰 변화가 지 금 일어나고 있다”며 “전체적인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가치와 기준이 뒷받침된다면 여기에 비중을 두고 공급망을 새롭게 구성하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동일한 국가 내에서 이러한 작업이 이뤄지는 경우도 물론 공급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되는 공급망은 여러 국가를 포함해 진행되는 ‘국제적’ 공급망이다.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품목과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는 여러 부품과 구성 요소가 필요하고 이들은 여러 출처와 경로를 통해 확보되고 조달된다. 그리고 이들 출처와 경로는 국제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들을 신속히 찾아내 연결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 희망하는 상품·서비스·품목·기술을 만들어낸 다음 이들을 국제 사회의 교역 체제에 투입해 여러 목적지로 이동시켜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그간의 국제 교역의 기본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제약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에는 이러한 공급망이 경제적 측면에서만 조망됐다. 어떻게 하면 경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지에 초점을 두고 공급망이 구성되고 가동됐다.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높은 품질의 부품이나 구성 요소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공급망 구성에 포함됐다.

또한 이러한 공급망은 상품과 서비스뿐 아니라 디지털 교역에 투입되는 디지털 품목, 그리고 이들 전체에 적용되는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디지털 품목 산출을 위해서도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부분, 품목을 기획하는 부분, 품목을 제작하는 부분, 제작된 품목을 판매하는 부분, 판매된 부분을 보수하는 부분이 여러 국가에 걸쳐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기술 역시 연구 개발 부분을 서로 나눠 진행하거나, 원천 기술 개발과 응용 부분을 별도로 나눠 운용하는 등 여러 국가에 걸쳐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역시 이 분야에서 공급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성되던 공급망에 큰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이고 전체적인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가치와 기준이 뒷받침된다면 여기에 비중을 두고 공급망을 새롭게 구성하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효율의 시대’가 가고 ‘가치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얼마나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는 공급망 재편은 기존의 공급망 논의와는 본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그동안 한 번도 본격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다. 새롭게 출발선에 서 있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다양한 논의와 논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가 간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먼저 공급망 구성에 있어 경제적 기준에 새로이 ‘가치’ 요소가 추가됨에 따라 이제 보다 입체적이고 고차원적인 평가가 필요하게 됐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자유·인권·민주·정의·형평·환경 보호·법의 지배 등 국제 사회가 중요하게 판단하는 여러 원칙과 기준을 말한다.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에서도 이를 반영한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가치’는 추상적인 개념에서는 공감대가 있더라도 이를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증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가치’에 대한 평가는 계량화가 쉽지 않다는 측면에서 이에 기초한 새로운 공급망 구성은 그만큼 어렵고 논쟁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논의되는 공급망 재편은 단순히 기존 공급망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치 요소에 대한 추가는 결국 공급망 구성에 있어 국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정책과 접점이 생긴다는 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 가치는 여러 국가의 외교 정책이나 외교 수단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리나라도 외교에 있어 핵심 가치의 추구를 중요한 수단으로 밝히고 있다. 현재 우리 외교의 기본 목표인 ‘글로벌 중추국가’의 달성도 바로 이러한 가치 추구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있다.

미중 분쟁이 격화되며 이제 주요 상품, 서비스, 품목, 기술별로 미국과 중국 중심의 공급망으로 재편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자신들과 가치를 같이하고 신뢰하는 국가와 상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창출하겠다는 시도이다. 자연스레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국가들은 일단 해당 공급망에서 퇴출된다. 특정 영역에서 미국 주도의 공급망과 중국 주도의 공급망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게 된다. 일종의 ‘공급망의 파편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개되는 공급망 재편 논의는 어떠한 상품, 서비스, 품목 및 기술에 대해 진행될지 아직 불투명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단 지금 가장 첨예한 대립을 초래하는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서 공급망 재편 논의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이제 다양한 영역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어떠한 항목으로 이어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이 기업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국제 사회의 공급망 재편은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타격을 초래하는 중대한 변화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이다. WTO 164개 회원국 중 6위의 교역국이고 10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대외교역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 우리 GDP의 약 80%가 대외 교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역의 근간을 이루는 공급망이 새롭게 조정된다면 우리에게 미치게 될 타격은 상당하다. 쉽게 말하면 그간 우리가 열심히 쫓아가고 익숙해진 기본 원칙이 근본에서부터 바뀐다는 의미이다. 정부도 기업도 그리고 개인도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공급망 재편 문제는 미중 대결, 신냉전 시대, 디지털 전환, 민간 분야 역할 확대라는 국제 사회의 다양한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러한 흐름은 국제 사회가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해 앞으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큰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공급망 문제는 이러한 작금의 국제 사회의 변화 움직임과 방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공급망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우리나라가 어려운 국제 환경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그간의 번영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그러한 작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기여는 우리나라가 현재 내세우고 있는 외교 정책의 기본 목표인 글로벌 중추국가 달성과도 궤를 같이 한다. 공급망 재편 관련 문제를 글로벌 중추국가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외교 과제의 핵심 중하나로 파악하고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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