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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유형으로 녹아든 포퓰리즘
민주주의 유형으로 녹아든 포퓰리즘
  • 최승우
  • 승인 2023.10.26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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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⑰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16일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가 「포퓰리즘의 등장과 확산」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8강은 김비환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과)의 「현대 민주주의의 양상과 전개: 정부 형태, 정당 체제, 법의 지배」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한국에서도 이미 엘리트 대의 정치의 한계와 계층 상승의 환상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에 생겨난 틈이 더욱 커져 가는 것이다. 대의 정치의 한계는 단지 대의 민주주의의 엘리트주의화라는 왜곡 현상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구세적 민주주의와 실용적 민주주의의 구분을 고려할 때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포퓰리즘(populism)은 현상 형태뿐 아니라 그 논의조차 천일야화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발생적 기원을 이루는 러시아 브나로드 운동을 제외한다면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항해 인민의 권익을 주장함으로써 인민주의의 기원이 됐다는 점에서 유사할 뿐 현대 포퓰리즘과는 많이 다르다.

반면 유사한 시기에 발흥한 미국 인민당 운동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정착한 사회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현대 포퓰리즘의 본격적 기원으로 인정된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정치경제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생겨났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질서에서 발흥했다. 그에 따라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관점은 크게 정치 경제적 입장과 정치 사회적 입장으로 나뉜다. 1967년 여러 나라에서 모인 43명의 전문가들이 런던에서 포퓰리즘에 관한 일반 이론을 도출하려고 시도했으나 그 보편적 핵심 개념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게다가 1970~1980년대와 2000년대를 주요 기점으로 포퓰리즘은 변화를 거듭해 그 양상이 더욱 복잡해졌다. 

기원에 해당하는 고전 포퓰리즘(러시아 브나로드 운동과 미국 인민당 운동)을 제외하고 양차 세계 대전 전간기 이후의 포퓰리즘을 현대 포퓰리즘이라 할 때 그 역사적 유형의 현대 포퓰리즘은 이 시기 이후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변화에 따라 다시 세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 유형이 1920~1940년대에 발흥한 구포퓰리즘(paleopopulism)이며, 둘째 유형이 1970~1980년대에 생겨난 신포퓰리즘이고, 마지막 셋째 유형이 2천년대 이후 발흥한 포스트포퓰리즘(postpopulism)이다.

유럽의 구포퓰리즘은 경제 대공황으로 현상한 제1차 포드주의(fordism) 위기를 정치 경제적 배경으로 했으며, 초기 자유주의 경제와 결합된 대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 했다. 유럽의 신포퓰리즘은 정치 경제적으로 케인스주의(keynsianism)의 실패와 포스트 포드주의(postfordism)의 등장을 배경으로 하고 정치 사회적으로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를 배경으로 생겨났다.

대량 생산에 따른 제1차 포드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은 파시즘적(이때 파시즘은 나치즘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 국가 개입과 케인스주의적 국가 개입이었다. 파시즘적 해결을 시도한 구포퓰리즘이 실패한 반면, 케인스주의적 해결을 시도한 자유주의 진영이 승리했다. 포스트 포퓰리즘은 2천년대 금융 위기로 정점에 이른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신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발생했다.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포퓰리즘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를 해소하려 하기보다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 구도가 온존하는 가운데 엘리트에 대항해 인민을 대변한다는 이념이다”라며 “엘리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엘리트를 선택한다는 자가당착적 논리를 배태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포퓰리즘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를 해소하려 하기보다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 구도가 온존하는 가운데 엘리트에 대항해 인민을 대변한다는 이념이다”라며 “엘리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엘리트를 선택한다는 자가당착적 논리를 배태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포퓰리즘은 사회 운동으로 출발하더라도 대부분 정당 정치로 귀결된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가 대의 민주주의(의회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고, 그 핵심은 다시 정당 민주주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당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한 경쟁적 정당 체제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경쟁 정당 체제는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의회에 진입한 기성 정당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의 의회 진입을 가로막고 자신들만의 카르텔 구조를 수립해 대의 정치를 왜곡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 구체적 과정은 계급 정당의 국민 정당화, 포괄 정당화와 선거 전문가 정당화다.

필자가 참여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포퓰리스트로 분류되는 사람은 41.2%에 달했다. 그중 포퓰리즘의 최소 정의를 충족하고 포퓰리즘적 대립 구도를 해소해 궁극적으로 포퓰리즘을 극복하려는 집단을 잠재적 표퓰리즘으로 구분했다. 이들은 포퓰리즘 해소가 어렵다고 판단할 때에 한 해 포퓰리즘적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잠재적 포퓰리스트의 비율은 9.4%였으며, 이들을 제외한 현재적(顯在的) 포퓰리스트는 31.8%였다. 특히 31.8%라는 비율은 대선에서 3명 이상의 후보가 나올 때 당선에 근접한 득표율이 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현재적 포퓰리스트 내에서 다시 세 유형을 구분해보면, 전체 응답자와 비교해 구포퓰리스트가 1.7%(현재적 포퓰리스트의 5.2%), 신포퓰리스트가 4.6%(현재적 포퓰리스트의 14.4%), 포스트 포퓰리스트가 25.5%(현재적 포퓰리스트의 80.4%)였다. 한국에서 현재적 포퓰리즘 성향의 국민은 대부분 포스트 포퓰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한국에서 포퓰리스트 전체의 비중이 낮지 않으며 특히 포스트 포퓰리스트의 비중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치에서는 서구나 남미에 비해 포퓰리스트 정당이나 정치인이 뚜렷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포퓰리즘 투표 행태가 존재하지만, 이 투표를 수용할 만한 정치 행위자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포퓰리즘 공방이 거세게 전개됐고 포퓰리즘 정치의 시도도 적지 않았다. 한국 대중의 포퓰리즘 성향 대부분이 포스트 포퓰리즘이라는 점으로 볼 때, 이러한 공방과 시도들은 포스트 포퓰리즘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대중적 요구와 정치적 반응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에는 구조적 요인도 작용한다. 분단이라는 요인 외에도 지역주의 등 한국 정당 정치사의 고유한 정치 균열 구조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요인들이 상당할 정도로 약해지거나 해소되지 않는다면, 포퓰리즘이든 포스트 포퓰리즘이든 주요 정치적 흐름으로 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압축적인 발전도 한 가지 요인이 된다. 압축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가 압축적으로 발전해 이제는 국제적으로도 선진국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에 따라 계층 상승의 기회는 크게 좁아지거나 대부분 사라져 이른바 ‘안정된’(경직된) 계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압축적 발전 과정을 경험한 대중들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계층 상승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에 따라 자신도 언젠가 엘리트층에 진입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 포스트 포퓰리즘 성향이 실제 투표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미 엘리트 대의 정치의 한계와 계층 상승의 환상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에 생겨난 틈이 더욱 커져 가는 것이다. 대의 정치의 한계는 단지 대의 민주주의의 엘리트주의화라는 왜곡 현상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그림자라는 캐노반의 비유는 구세적 민주주의와 실용적 민주주의의 구분을 고려할 때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림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정당 정치와 결합한 대의 민주주의가 선출된 독재로 연결되는 것이 현실 대의 정치의 한계라면 그것은 본질적인 한계일 수 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눠 고찰한 한 연구에 따르면, 자유 민주주의자는 포퓰리즘의 도전을 ‘대표의 위기’로 보고 집합적 정치 주체로서 인민의 범주를 성급히 해체하고자 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 이론가는 이 문제를 의제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미분화된 인민의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해 반민주적 경향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들이 동일하게 범하고 있는 오류는 자유와 평등을 동등한 가치로 내포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포스트 포퓰리즘이 개인주의 인민관을 수용해 다원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포퓰리즘이 반민주적 현상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거나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반사적 효과나 의도하지 않은 효과에 그친다는 판단은 구포퓰리즘과 극우 신포퓰리즘에 해당할 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적어도 신포퓰리즘 등장 이후의 포퓰리즘은 대의 민주주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다른 하나의 민주주의 유형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신포퓰리즘이 자유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면, 개인주의 인민관까지 수용한 포스트 포퓰리즘은 다원적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개인주의에 기반한 포스트 포퓰리즘도 체제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엘리트뿐 아니라 다른 소수자 집단까지 배제하는 배타적 포퓰리즘으로 발전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 상정하는 대립 구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측면이라기보다 대의제의 모순과 관련된 구체적 측면으로서 현상적(現象的) 측면의 하나다. 

포퓰리즘 현상을 경시해서도 안 되지만 근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으로 착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를 해소하려 하기보다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 구도가 온존하는 가운데 엘리트에 대항해 인민을 대변한다는 이념이다. 엘리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엘리트를 선택한다는 자가당착적 논리를 배태한 것이다. 

포퓰리즘의 이데올로기성이 약한 것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에 대한 근본적 탐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대립 구도가 사라진 사회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집단의 대립이 갖는 근본 성격을 규명하고 그 대립 구도가 궁극적으로 사라진 자치 질서를 상정하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할 때 포퓰리즘은 유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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