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22일 조경란 연세대 교수(국학연구원)가 「21세기 중국의 ‘천하’관과 ‘신천하주의’」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1강은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문화학과)의 「중화 민족주의와 동아시아」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국제 질서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재편되고 있다. 권위주의의 중심에 중국이 있고,한국은 그 바로 옆 나라이다. 그렇기에 중국은 지경학·지정학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우리는 중국과 상생과 공존을 위한 실리 외교를 펼쳐야 한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 이어 올해 3월 제14기 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확정했다.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그간 발표해 온 ‘인류운명공동체’(2012년), ‘아시아운명공동체’(2015년), ‘중화민족공동체’(2017년)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 패권 국가 구상을 밝힌 것이다.
세계를 겨냥한 글로벌 전략, 개발도상국과 주변 국가를 포함한 아시아 전략, 중국 내부의 통합 전략 등 세 차원의 중장기적 계획이 공개된 셈이다.
21세기 패권 국가가 되는 데는 과학기술 기반의 하드파워가 중요하지만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소프트파워다. 소프트파워의 중심에 신천하주의가 있다. 이번 20차 당대회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자본주의-민주주의 대 중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천하주의라는 대립 구도를 천명했다.
중국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체제 등 소프트파워 측면에서도 자신감을 갖게 된 배경에는 서방 자유주의 질서가 쇠퇴 일로에 있는 반면, 권위주의가 상승 국면에 있다는 판단이 있다. 그 결정적 징후를 중국에서는 2016년 11월 미국 트럼프의 당선과 그해 6월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를 결정한 브렉시트로 본다(실제 탈퇴는 2020년 1월).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 트럼프 이후 시작된 미중 간의 무역 전쟁을 미중 간의 정치경제 모델의 충돌로 보아야 한다는 ‘파워엘리트’ 정용녠의 주장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고무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지난해 11월 유엔 50개국의 신장 인권 탄압 규탄에 개발도상국 100개국이 중국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이유를 중국에서는 시진핑 체제의 핵심 정책인 일대일로의 효과로 본다. 일대일로는 21세기 해상 육상 신실크로드 건설을 목표로 한다. 신실크로드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신천하주의와 신지정학·신지경학이다.
신천하주의를 통해서는 중국식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신지정학·신지경학을 통해서는 21세기 새로운 제국의 이니셔티브를 확보한다.
하지만 일대일로의 성공을 통해 만들려는 ‘인류운명공동체’(또는 ‘아시아운명공동체’)는 2차 대전 시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시진핑 체제가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실현을 위해서는 ‘통치의 도구’로만 남아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만으로는 역부족이라 판단한지 오래다. 이에 시진핑 정부가 등장하고 2013년 시점부터 완전히 공식화한 것이 공자와 유교다. 마오쩌둥 시기에 박물관에 처박아뒀던 것을 다시 끄집어내 시민권을 준 셈이다.
공자를 활용한 정치적 마케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중국 지도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공자와 진시황은 문화와 제도의 창시자이며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일대일로가 현재는 해상보다는 육상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해상 실크로드에 대해서도 중국은 절치부심 긴장의 끈을 놓치 않고 있다. 왜냐하면 해상 굴욕의 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힘이 전부 해군의 우위에 의존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한 분석가는 “해양을 무시한 것이 우리가 저지른 역사적 실수다. 지금 우리는 이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치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시진핑 3기 체제에서 ‘중화민족공동체’, ‘아시아운명공동체’, ‘인류운명공동체’가 공식화됐다. 이 3세트 공동체는 모두 공동체라는 말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팍스 시니카를 향해 있다는 오명을 피하기 힘들다.
이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세계 2차 대전 시기 일본이 내걸었던 대동아공영권이나 동아시아협동체 등을 연상시킨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경제 성장을 하고 세계 패권 국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나타나는 발상이 왜 이렇게 닮아있는 것일까.
중국이나 일본에서 보이는 강국 전략의 모든 것은 민족주의의 자기 확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21세기에 동아시아에서 국가를 넘어서는 구상은 진정 힘든 것일까. 중국은 우리가 새롭게 질문해야 하는 대상이다. 어쩌면 미국을 대신해 세계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를 가능성을 지금으로선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중국공산당의 프로젝트를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인 천하주의나 지정학 담론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대안을 고심해야 한다. 중국은 이번 20차 당대회에서 ‘중국의 길’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자신감을 보여줬다. 중국은 19세기 중후반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180여 년 동안 와신상담 끝에 이제 다시 우주 최강의 패권 국가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중국 지식 전문가로서 중국의 경제 성장과 규모의 경제가 역설적으로 지성의 붕괴와 문명의 절멸까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국 체제의 강국화 전략이 정치 이외의 모든 부분을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중국의 통치 상황을 ‘지성사적 위기’로 규정한다. 물론 이는 밖에서 보는 시각이며, 장기적인 전망일 뿐이지만, 때로는 밖에서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천하주의와 중화주의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중국 지식인 일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를 대상화시키지 못함으로써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자기를 대상화하고 현 단계 세계 지식의 구조를 재구성해 새로운 종합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국가의 크기와 무관한 학문적 역량이다.
그러나 중국의 학문은 국가의 크기와 경제 성장에 매몰돼 그 역할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보인다. 학문의 크기와 국가의 크기는 비례 관계가 아니다. 국가는 방대하지만 학문은 왜소한 경우가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사실상 중국발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구상은 1948년 이후 새로운 조건 아래서 형성된 중국의 ‘집단 무의식’ 또는 ‘국민성’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하면 중국의 안에서의 시각만이 아니라 중국의 밖에서 중국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나올 수 있다.
즉 ‘메타인지’를 통한 자기 직시가 가능할 때 비로소 중국에 대한 새로운, 객관적 서술이 가능해질 것이다. 시진핑 3기 체제가 내놓은 세 종류의 공동체론과 그것을 이론적으로 분식하는 천하 담론에는 앞에서 본 것처럼 법고(法古)만 있지 창신(創新)이 없다. 단순한 ‘자기 회귀’일 뿐이다. 21세기 중국의 길이 세계와 아시아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전통 시기의 그것보다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21세기 중국만의 보편이 아니라 새로운 보편을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지금은 1989년 냉전 해체 이후 최대의 변곡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매우 한가해 보인다. 해양세력과 대륙 세력 사이에 위치한 한국(또는 한반도)은 세계사와 아시아의 역사를 깊이 인식하되 진보 보수 진영의 갈린 시각으로 구축된 이념의 장막은 걷어내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국제 질서는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재편되고 있다.
권위주의의 중심에 중국이 있다. 한국은 그 바로 옆 나라이다. 그렇기에 중국은 지경학, 지정학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우리는 중국과 상생과 공존을 위한 실리 외교를 펼쳐야 한다. 동시에 한반도는 중국에 인접하고 있기에 미국이나 유럽이나 심지어 일본과도 다른 심급으로 중국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의 큰 그림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치·경제·학계 등 민관이 모두 참여하는 다양한 트랙을 가동해 그들과 협력해야 하는 것은 협력하고, 모호하게 해야 할 것은 모호하게 해야 하고 비판해야 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중국을 볼 때도 전통 시기를 기준으로만 봐서도 안 되며 75년 동안의 공산주의 체제로만 봐서도 안 된다. 둘을 복합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이 전통·현대의 복합 구상으로 미래를 구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국은 이제 익숙한 대상이면서도 낯선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당대회를 통해 알게 된 글로벌, 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새판 짜기 전략’을 우리가 중국을 새롭게, 다시 볼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 통용돼 온 ‘중국 인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서방의 중국 인식과도 차별화되는 한국의 ‘새로운 중국 인식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먼저 한국의 빅픽처를 디자인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 10대 강국이며 동시에 소프트파워 강국이다. 이전처럼 주변 강국에 대책 없이 휘둘리던 때와는 체급이 달라졌다. 이제 선진국이라는 ‘자각’ 아래 한국의 시각에서 과감하면서도 세밀한 세계 구상과 전략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주변 강국의 ‘변칙적’ 움직임에도 원칙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