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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문제, 민족 내부 문제 아닌 국민국가의 과제
남북문제, 민족 내부 문제 아닌 국민국가의 과제
  • 최승우
  • 승인 2023.10.11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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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⑮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 2일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가 「한반도 문제의 연속성과 변화」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6강은 홍석경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과)의 「한류의 특성과 미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오늘날 한국 청년들이 도쿄, 베이징, 뉴욕, 파리처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는 세계의 유일한 나라와 도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평양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태어나기 두세 세대 전에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했던 특정 상대 국가를 통일, 특히 그것도 민족 통일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접근하라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자 전체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문제가 연속성과 변화의 중대한 변곡점에 놓여있다. 어떤 면에서는 연속적 측면이 강력한가 하면, 다른 어떤 면에서는 높은 변화의 파고가 느껴진다. 한반도 문제의 본질과 성격이 전자라면, 그것의 위상과 현실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표면과 상황을 보면 심대한 요동과 격변이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한반도 문제 특유의 일정한 자기 성질과 속성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한반도 문제의 변화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사실 미중관계 및 진영 대결 구도의 부활 못지 않은 남북(한·조) 관계와 북미 관계의 근본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조선의 현재의 상태는 탈냉전 이래 가장 적대적이고 가장 단절적이다. 

최고 지도자의 인식과 언명에서도 이제 상대에 대한 군사적 언어와 어휘가 거리낌 없이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탈냉전 이후 초유의 상황이다. 반면 대화와 관계는 전면 중단 상태이다. 한반도 문제의 기저 변화 요인으로서 시민사회의 급변, 즉 평화 세대와 평화 담론의 등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에서의 ‘우리민족제일주의’ 대신 ‘우리국가제일주의’의 등장과 함께 이는 사회의식의 쌍방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국민의 집합적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한국의 여러 조사에 따르면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통일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낮다. 이는 거의 세계관 혁명, 또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부를 만하다.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응답은 1988년 19.3%, 1989년 34.2%에서 2017년 12.1%, 2018년 8.6%로 줄어들었다. 탈냉전과 사회주의 붕괴 직후의 시기를 빼고는 반드시 통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거의 항상 한 자리 수에 머물렀다.

다른 응답들은 ‘여건을 봐가며’, ‘현재대로’, ‘관심 없음’이었다. 통일의 필요성 자체를 매우 낮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조사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뚜렷한 흐름은 민족주의와 통일의지의 추락과 평화공존 의지의 부상이다. 게다가 청년세대의 혐북(嫌北)과 염북(厭北)도 급증하고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진영은 각각 이념과 민족을 근거로 남북 관계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 잘 못 이해해 왔고, 그것이 이른바 남북 관계 틀의 중대한 패착이었다”라며 “하나의 경계 국가로서 한반도 문제의 성질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보편 한국에의 지향이 결합된다면 한국은 오랜 ‘문명의 경계’에서 이제 ‘경계의 문명’을 창출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과거의 반공반북 이념과는 다른 차원으로서 현실주의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 개발과 세습과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최근 들어 한국과 조선의 최고 지도자들마저 공개적으로 상대를 적으로 호칭하고 있다. 사용하는 용어 역시 강경한 군사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탈냉전 진입 직후 남북기본합의서의 채택 이후 현재까지 지속돼 온 서로 ‘안보’와 ‘평화’, ‘적대’와 ‘교류’ ‘분단 현실’과 ‘통일 추구‘의 대상이라는, 즉 이른바 ’남북관계의 특수성‘ ‘상황의 이중성’이라는 남북 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기본 동학과 상호 합의는 철저히 붕괴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민족주의와 통일 추구를 말하는 것은 좌우 어느 쪽이건 현실을 호도하는 위선이거나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한국을 중재자·촉진자는커녕 조수와 승객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무시와 무례, 모욕과 폭언, 그리고 일방적 합의 파기와 통보, 투명 국가 취급은 현대 국민국가와 문명국가 간의 정상적인 외교관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남북 관계의 재개와 중단의 결정권을 오직 조선만이 갖고 있다는 일방적 단절과 재개의 반복도 언어도단이기는 마찬가지다. 하물며 만약 같은 민족이나 형제라고 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조선은 다른 대외 및 국제관계에서는 자행할 수 없는 행동을 한국을 향해서는 수시로 반복하며,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민족 내부’나 ‘특수 관계’라는 허구의 현실이 제공하는 어떤 긍정적 효과와 이익도 부재한 상태에서 부정적 공격과 굴욕만을 일방적으로 감내할 필요는 없다. 주권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인 것이다. 

차라리 냉정하고 엄격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요구하는 국제규범과 예절을 지키는 것이, 어정쩡한 민족 내부나 특수 관계가 제공하는 일방적 관계 복원과 중단의 반복, 한국 국가와 국민에 대한 모욕적인 무례성과 불가측성보다 정상적 관계유지와 예의 준수, 상호 이익의 교환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상궤적 관계의 구축이야말로 남북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항구평화의 한조 시대의 관계를 정초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이 도쿄·베이징·뉴욕·파리처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는 세계의 유일한 나라와 도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평양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태어나기 두세 세대 전에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했었던 특정 상대 국가를 통일, 특히 그것도 민족 통일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접근하라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자 전체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입과 여행조차 불가능한 국가와 ‘단일 민족, 단일 국가’ 의식을 갖고 하나로 통일하라는 것은 담론 폭력이자 세대 폭력일 뿐이다. 

우리는 과연 오늘의 한국과 한반도 현실에서 ‘한반도 문제’라는 설정 자체가 갖는 현실적·공간적·국제정치적·심리적·철학적·분석적인 적실성과 적합성에 대해 깊이 문제를 던지고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국제적 지역과 영토성과 공간 단위의, 기존 방식의 설정과 사유와 접근 자체가 아예 의미를 상실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휴전선의 경계는 기실 다른 어떤 나라 사이 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단절적·장기적·적대적·실질적인 국경으로 기능해왔다. 

즉 근대 국가들 사이의 다른 어떤 국경보다도 더욱 철저히 두 나라를 가르는 국경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런데 과연 어떠한 이유와 근거로, 무엇을 목표로 앞으로도 계속 한국과 조선을 하나로 묶어서 ‘한반도 문제’, ‘남북 관계’, ‘통일 대상’이라고 부를 것인지, 우리는 향후 훨씬 더 깊은 철학적 심리적 정치적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물리적‧군사적인 완전한 차단과 격리를 넘어 두 국가 사이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심리적‧정서적‧이념적 거리와 적대감이 존재한다. 동일성과 동질성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것을 기준으로 한국과 조선의 관계가 움직이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한국과 조선 두 나라를 움직이는 요소는 결코 전통적인 민족·언어·문화·역사의 동일성과 동질성이 아니라 근대적인 주권·국가·헌법·체제의 상이성과 대결성이었다. 근대 국제관계에서 전자는 언제나 후자의 하위 요소였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진영은 각각 이념과 민족을 근거로 남북 관계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 잘 못 이해해 왔고, 그것이 이른바 남북 관계 틀의 중대한 패착이었다. 이제 ‘남북 특수 관계’라는 민족주의에 매몰돼 더 이상 애정과 증오, 접근과 적대를 단속적으로 왕래 반복할 필요는 없다. 

보편주의에 기반한 ‘국가 대 국가’ 관계. 즉 전형적인 두 국민국가 대 국민국가의 관계인 것이다. 최근 한국의 과학기술 발달과 한류 문화현상에 비춰 볼 때 하나의 경계 국가로서 한반도 문제의 성질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보편 한국에의 지향이 결합된다면 한국은 오랜 ‘문명의 경계’에서 이제 ‘경계의 문명’을 창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경계 국가들의 속성이자 특질로서의 새로운 사유와 문명의 창출 역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불변의 지리적 위치라는 과거의 고루하고 협애한 지평과 시야를 넘어, 지정학은 늘 새롭게 구성된다는 중요한 원리를 깊이 인식할 때, 그리고 강대국의 각축장·화약고·소용돌이라는 수동성을 넘어 문화와 사유와 문명의 교차점이자 용광로이자 도가니라는 인식을 갖게 될 때, 나아가 동양과 서양이라는 잘못된 이분법마저 넘을 때 경계의 문명을 창출하는 창조적 경계성이나 경계적 창조성을 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지정학은 이미 주어진 것도 숙명도 결코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오랜 정치학적 통찰을 생각할 때 더욱더 그러하다. 기실 가치와 문명, 제도와 의식의 측면에서 오늘의 한국은 이미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동양이기도 하고 서양이기도 하다. 혼성적‧다중적 문명의 한 표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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