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35 (토)
가상과 실재, 현상과 본질의 경계가 무너진 디지털 세계
가상과 실재, 현상과 본질의 경계가 무너진 디지털 세계
  • 최승우
  • 승인 2024.01.12 1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㉕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25일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가 「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6강은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의 「디지털 시대 교육의 변화」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일원론적 전통의 계승자다. 이 점에서 이들은 플라톤·데카르트·칸트로 이어지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맞서 있다. 이원론 전통은 학문의 모델을 수학에서 찾는다. 
현실 세계 바깥에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설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미래 문명의 신대륙이다. 오락은 물론 상거래에서 교육에 이르는 다양한 삶의 영역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가상현실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에 따라 인간 문명은 커다란 변형과 확장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문명의 거대 지평으로 떠오른 가상현실은 철학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가상과 실재의 관계 같은 문제가 대표적이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같은 개념은 이런 문제로 들어가는 좋은 입구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시뮬라크르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개념을 통해 접근해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가상현실과 관련된 가상 개념은 하나라기보다 둘이기 때문이다. 사실 가상현실의 원어는 virtual reality인데, 여기서 virtual은 가능 혹은 잠재를 뜻한다. 가상현실의 배후에는 가상 개념의 역사 이외에도 virtual 개념의 역사가 숨어 있다.

그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시작해 20세기 후반기의 들뢰즈 철학에 이른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뒤나미스 개념의 역사를 꼼꼼히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역사 정리 작업은 뒤나미스를 개념화하는 몇 가지 세계 모델-생물학적·논리학적·실존적·광학적 모델을구축하는 작업과 함께 가야한다.

왜냐하면 서양 사상사에서 뒤나미스나 버추얼 개념은 실재 이해 못지않게 세계 이해를 규정하는 근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뒤나미스의 역사는 곧 실재 이해의 역사로, 나아가 세계 이해의 역사로 이어질 때 완결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가상에 대한 이론을 람베르트는 현상학이라 불렀는데, 이 새로운 학문은 17세기 이래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광학에서 영감을 얻었다”라며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과제는 진리와 가상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인식 전체의 체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가상에 대한 이론을 람베르트는 현상학이라 불렀는데, 이 새로운 학문은 17세기 이래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광학에서 영감을 얻었다”라며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과제는 진리와 가상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인식 전체의 체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사실 가상현실이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다시 묻게 만든다면, 이 구분의 문제는 결국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상위 문제에 봉사하는 하위 질문에 불과하다. 가상현실이 던지는 궁극의 문제는 결국 세계의 문제·세계를 어떻게 재개념화할 것인가의 문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가상현실이 일반화되는 시대는 과거의 세계상이 붕괴하고 새로운 세계상이 태동하는 시대다.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가 뒤얽히는 오늘의 역사적 현실은 거기서 태동하는 새로운 세계 이미지를 철학적으로 해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는 질료에 대해 형상이 우위에 있다. 형상(본질·형식·기능)이 먼저 있어야 하며, 그것에 맞춰 질료가 정해지고 조직된다. 질료는 형상에 의해·형상을 위해·형상 내에 존재하는 형상의 질료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는 잠재태와 능력에 대해 현실태와 활동이 우위에 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현실성 이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현실성 혹은 활동성의 우위를 강조하는 대목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천지창조 이전에 신의 지성 속에는 무한히 많은 설계도가 있었다. 그 무한히 많은 설계도에 해당하는 것이 가능 세계다.

각각의 가능 세계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먼저 가능 세계를 이루는 개별 실체(모나드)는 무수한 내용이나 속성들(지각과 욕구들)을 지니는데, 이 속성들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다른 한편 가능 세계를 이루는 무수한 실체들이 공가능(compossible)해야 한다.

함께 존립하고 결합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은 자신의 지성 속에 있는 무수한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선택해 창조했다. 이때 창조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추상적 세계에 실존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런 선택과 창조는 충족이유율을 따른다. 

그러나 20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은 다시 스피노자와 유사한 관점에서 라이프니츠의 가능성 개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가능성은 현실성과 분리된 채가 아니라 현실성과 더불어 있다는 것이며, 그렇게 둘은 함께 있으면서 실재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가능성과 현실성은 실재성을 이루는 두 측면이다. 베르그손 철학에서 실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시간(지속)의 한 부분이라는 것과 같다. 라이프니츠는 가능 세계 이론을 통해 신의 창조를 설명하고자 했다. 반면 베르그손은 그 이론을 비판하면서 기독교 윤리를 지배하는 불행한 의식의 뿌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어떤 불행한 의식인가? 후회·자책·죄의식·질투 같은 슬픈 정념이 빚어내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런 슬픈 정념은 과거가 다르게 설정됐을 가능성, 현재가 다른 모습이었거나 다른 모습이 될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 그리고 니체에게 현재는 그 자체로 긍정돼야 한다. 현재는 생성의 순간, 다시 말해서 미래완료 시제 속에 지속하는 생성의 순간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파악했던 철학자는 들뢰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가능성 개념을 비판하는 베르그손의 글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으면서 생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라이프니츠가 대변하는 논리학적 관점, 그것은 가능성과 실재성을 양분하는 관점이다. 여기서 생성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가능성이 현실적 내용을 획득해 실재성을 획득하는 과정, 곧 실재화(realization)가 된다.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일원론적 전통의 계승자다. 이 점에서 이들은 플라톤·데카르트·칸트로 이어지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맞서 있다. 이원론 전통은 학문의 모델을 수학에서 찾는다. 현실 세계 바깥에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설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원론 전통은 이상적인 형식보다 살아 있는 힘과 생명력을 모든 실재의 원천으로 본다. 따라서 생명을 다루는 학문(생물학)이나 힘을 다루는 학문(역학)에서 근본 직관을 풀어갈 도구를 찾는다. 들뢰즈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뒀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생명력의 현실화 과정은 완전히 반대로 이해된다. 헤겔은 현실화를 풍부화 과정으로, 그러나 들뢰즈는 빈곤화 과정으로 바라본다. 두 철학자는 생명의 이미지 자체부터 다르게 설정한다. 헤겔은 생명력을 유기적인 조직화 능력으로 파악할 때, 들뢰즈는 비유기적인 역량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유기적 조직화를 본래의 생명력이 소외와 왜곡되는 과정으로 본다.

가능성을 시간적 문맥에서 정의하는 시도는 칸트에게서 시작한다.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칸트는 지성의 선험적 범주를 분류하고 설명할 때 모든 범주의 특성을 시간성의 도식에 따라 서술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서 실존(Existenz)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모습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고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라본 현존재의 얼굴, 그것이 실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실존이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대체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즉 실존은 현존재의 코기토에 해당한다. 다만 현존재의 코기토는 자기의식의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 큰 차이다. 가상에 대한 이론을 람베르트는 현상학이라 불렀는데, 이 새로운 학문은 17세기 이래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광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광학은 시각적 원근법의 원리를 탐구한다. 원근법의 원리를 정확히 알면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에서부터 그 사물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거꾸로 한 사물에서부터 관점에 따라 생겨날 서로 다른 형태의 이미지를 예상할 수도 있다. 청년기 데카르트의 수기(手記)를 보면 그는 이런 광학적 법칙을 찾으려는 열망으로 가득했고, 이런 열망은 그의 초기 자연학 관련 연구에서 구체화됐다.

그런데 람베르트는 광학을 일반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시각적 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감각적 가상, 그리고 심리적·도덕적 차원의 가상을 다루는 원근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반적인 원근법을 현상학이라 불렀다. 초월적 원근법 혹은 초월적 광학에 해당하는 학문이 현상학이다.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과제는 진리와 가상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인식 전체의 체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반성의 논리나 자기 관계적 부정(이중 부정)의 논리는 불이(不二)의 논리다. 가상과 실재·현상과 본질은 외면적으로 분리되거나 서로 대립하기만 하는 둘이 아니다. 서로 비추고 의존하고 자극하는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차이나 대립이 사라지는 하나가 아니다. 헤겔의 논리학은 불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불일(不一)을 역설한다.

반성의 운동 속에서 가상과 실재의 대립은 소멸하되 다른 차원에서 형태를 바꿔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 본다. 가상현실 속에서 다시 가상현실이 열리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을 통해 유명세를 더한 책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1981)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디지털 매체 시대의 이미지를 시뮬라크르(simulacre)라 부른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매체 시대가 곧 시뮬라크르의 시대임을 역설한다. 시뮬라크르의 시대에는 가상과 실재·현상과 본질의 경계는 완전히 무의미해지거나 사라진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헤겔의 반성(반조)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실재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실재 세계라는 근본적인 환상이 자리한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것이 이런 상황이다. 이는 불이의 논리가 전일의 논리로 전도돼 일어난 허무주의적 귀결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가상과 현실이 둘이 아니라는 믿음이 일반화돼갈 수밖에 없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