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9:20 (토)
멀티버스 내 실종된 인간의 존재가치는 뭘까
멀티버스 내 실종된 인간의 존재가치는 뭘까
  • 김재희
  • 승인 2023.12.13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㉔ 김재희 을지대 교수(교양학부)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18일 김재희 을지대 교수(교양학부)가 「메타버스와 자아 동일성」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5강은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메타버스는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의 기술적 잠재성이 현실화된 상태이자 동시에 
새로운 미래 현실을 창조할 잠재적 발판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제 유니버스와 메타버스가 공존하는 멀티버스 안에서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정보적 가분체로서 동등한 행위자들과 어떤 가치 지향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메타버스 안에서 나는 아바타로 거주한다. 아바타는 현실 세계의 나를 대신해서 메타버스에서 활동하는 디지털 캐릭터다. 메타버스의 아바타는 ‘자아 동일성’에 관한 오래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자아 동일성은 나라는 개체를 다른 것들과 구별해 주며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나를 나로서 인식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와 전혀 다른 성별·체형·인종·나이·직업의 아바타 모습으로 메타버스에서 활동할 때, 나는 과연 현실 세계의 나와 동일한 나인가?

전통적으로 나의 동일성은 기억의 연속성에 의해 보장받았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서로 다른데 여전히 동일한 나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로크는 ‘기억’이 나의동일성을 보장한다고 봤다. 한 개인이자 인격체(Person)로서의 나는 자기 자신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자기 자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의식적 존재이다.

김재희 을지대 교수(교양학부)는 “알파고와 챗GPT의 등장은 비인간도 얼마든지 인간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더 상위 버전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라며 “인간은 이제 바이오스피어(Biosphere: 생명권)의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여러 인포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김재희 을지대 교수(교양학부)는 “알파고와 챗GPT의 등장은 비인간도 얼마든지 인간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더 상위 버전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라며 “인간은 이제 바이오스피어(Biosphere: 생명권)의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여러 인포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요컨대, 심리-생물학적 개체로서 나의 동일성은 3차 기억인 디지털 기술 환경 안에서 구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동일성 문제는 이제 존재론적 차원이나 실존론적 차원이 아닌 기술적 차원에서 재조명돼야 한다. 메타버스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나’를 어떻게 구성하고 변화시키는가? 디지털 가상 세계의 나는 현실 세계의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선, 메타버스의 아바타는 현실의 나와 불연속적인 면이 있다. 3차원 그래픽 기술과 생성 AI의 발전으로 자유로운 꾸밈과 변신이 가능한 아바타는 타고난 외모·인종·성별·나이 등 현실 세계의 제약을 넘어서 나를 ‘다른 나’로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성별 전환이나 신체 구성의 자유로움은 젠더와 장애에 대한 편견과 고정 관념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외모와 성별의 변형만으로도 소심하고 조용한 인물이 적극적이고 과감한 행동의 모험적 인물로 달라질 수 있다. 현실 세계와 다른 신체 이미지 구현은, 다른 인종이나 성별의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현실에서라면 함께 할 수 없었을 사람들과 관계 맺을 수 있게 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자신의 일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대안적 생각과 새로운 변화의 시도를 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바타로서의 나는 현실 세계의 나와는 다른 나로서 오직 메타버스 안에서만 거주하는 독립적 존재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메타버스의 아바타는 현실의 나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게임과 오락의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업무·교육·경제 활동 등에서 아바타는 현실의 나를 그대로 대리하는 행위자로서 현실 세계에서의 책임·의무·권리 등을 위임받아 행위 할 수 있다. 특히 실사 형태의 아바타는 현실적 나와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메타버스에서의 사회적 활동 역시 현실의 내가 지닌 사회성·친화력·기술력 등 행위 역량에 의존한다. 가정에서 사무실로 이동하듯이, 현실 세계에서 메타버스로의 공간 이동이 있을 뿐, 시간적 연속성에 근거한 나의 동일성은 유지된다. 

무엇보다 아바타는 ‘탈신체적 탈물리적 존재’가 아니다. 아바타 구현은 메타버스 플랫폼이 제공하는 디지털 기술 조건에 의존한다. 아바타의 움직임 역시 키 패드나 컨트롤러를 통해 조종하는 물리적 신체의 동작에 의존한다. 메타버스 체험은 참여자 자신의 실제 몸의 활동으로 이뤄진다. 화려한 VR·AR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메타버스로 진입하는 헤드셋을 장시간 착용했을 때, 생물학적 신체와 디지털 신체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나타나는 현기증·두통·구토 등의 사이버 멀미(Cybersicknes)는 아바타가 물리-생물학적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 불연속적이면서도 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나의 동일성을 잡아주는 것은 몸이다. 디지털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는 탈신체성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가상의 두 세계를 묶는 안정적인 고정점으로서 몸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이 몸은 영혼·정신·생명과 대립하는 기계적 신체가 아니다. 기술-문화적 환경과 연결돼 있는 살아 있는 몸이다. 기술적 환경과 결합된 몸으로 체화된 기억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며 나의 동일성을 보장한다

정보 철학자 플로리디(L. Floridi)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정보를 주고받는 우리의 디지털 생활 환경을 ‘인포스피어(Infosphere: 정보권)’로 정의한다. 인포스피어는 상호작용이나 반응이 없고 학습도 불가능한 ‘죽은’ 사물들의 공간이 아니다. 거기에는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나 생성형 AI가 장착된 ‘정보기술체들(ITentities)’이 존재하며, 모든 것에서 모든 것으로 가는,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정보 처리 과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이들을 플로리디는 사이보그(Cyborg)에 빗대어 ‘인포그(Inforg)’라고 부른다. 인포그는 인포스피어에 접속된 정보적 유기체로서 “인포스피어와 연결이 끊어질 때마다 마치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무언가 박탈되고 배제되고 장애를 얻고 빈곤한 느낌을 갖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찾고 잠자리에 들 때도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이나 심지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손목에 차고 자는 스마트워치는 세계와 접촉하는 우리의 신체 기관이자 사유를 담당하는 대뇌피질이 됐다.

초연결 네트워크의 인포스피어는 이제 인간 실존의 근본 환경이다. 그런데 인포스피어에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만이 아니라 AI를 비롯한 기술적 존재자들도 동등한 ‘정보 행위자’로서 거주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가 데이터 꾸러미로서 동등한 정보적 구성물이기에 인포스피어 안에서 자연물과 인공물·생명체와 비생명체·인간과 기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알파고와 챗GPT의 등장은 비인간도 얼마든지 인간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더 상위 버전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인간은 이제 바이오스피어(Biosphere: 생명권)의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여러 인포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메타버스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이질적 행위자들의 네트워크 효과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세상만사는 행위자들의 네트워크 효과로 이뤄진다. 행위자란 스스로 행위를 하거나 타자에 의해 행위 능력이 부여된 존재를 의미하며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메타버스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는 인간 아바타와 AI 아바타가 모두 동등한 아바타 행위자이다. 심지어 장차 메타버스를 돌아다니면서 마주치게 될 아바타들은 인간보다 AI일 가능성이 더 크다. 

메타버스 역시 지구 시스템을 위협하는 인류세의 환경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뉴욕 크리스티 온라인 경매에서 비플의 NFT 예술 작품이 최근 약 830억 원에 거래돼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 디지털 작품이 거래되며 배출한 탄소가 13가구의 1년 치 전기 사용량과 맞먹는 7만8천597kg이었다는 점은 잘 조명되지 않는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연결된 컴퓨터들이 막대한 양의 전기를 쓰지 않는다면 메타버스의 디지털 미술관도 존속하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온라인 가상 세계를 오프라인 현실 세계와 연결된 전체로서 조망하는 시선이 개체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왜 메타버스인가? 디지털 기술의 메타버스적 활용은 인류에게 과연 어떤 미래를 약속하고자 하는가? 문자로부터 디지털로 기억 기술이 발달하면서 문학적 상상력이 기술적 상상력으로 대체되고 있다. 

인물과 스토리텔링으로 허구적 세계를 구축해 보임으로써 현실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들었던 소설처럼, 메타버스 역시 디지털 이미지와 콘텐츠로 현실 세계와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현실 세계의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현실 우주를 넘어서 새로운 우주로서의 메타버스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이 제공되는 공간으로서, 기존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참여자들의 잠재적 역량을 현실화하고 모두가 공유할 만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기존 현실을 거울처럼 반복하며 단순 연장하거나 새로운 소비 시장 창출에 그친다면, 또 현실 세계와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실현함으로써 나의 역량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많은 기술적 노력과 비용과 환경적 부담을 감수하며 메타버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을지 고려해야 한다.

자동화된 습관은 탈-자동화된 사유를 위한 토대이다. 메타버스와 생성 AI의 시대, 자동화의 편리함에 ‘중독’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자동성을 익히고 활용해 비-자동화된 창조적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자적 방식의 주의 양식들과 구분되는 디지털 방식의 주의 양식을 발명하고 정교화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 정보적 가분체로서 비인간과 네트워크된 자아는, 사유 무능력자의 궁핍한 삶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디지털 기술을 토대로 ‘삶에 주의하는 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면서 더 높은 자유도의 삶을 실현할 수도 있다.

메타버스는 파르마콘이다. 현실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가상 세계가 될 수도 있지만, 디지털 격차를 강화하며 가상 자산을 사고파는 화려한 3D 시장에 머물 수도 있다. 메타버스는 지금 생성 중에 있다. 메타버스는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의 기술적 잠재성이 현실화된 상태이자 동시에 새로운 미래 현실을 창조할 잠재적 발판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제 유니버스와 메타버스가 공존하는 멀티버스 안에서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정보적 가분체로서 동등한 행위자들과 어떤 가치 지향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