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8:10 (금)
불안·충돌의 한국 이념사, 화려하게 꽃피다
불안·충돌의 한국 이념사, 화려하게 꽃피다
  • 최승우
  • 승인 2023.03.29 08:45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㊶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4일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역학 관계」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42강은 전재성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위기」, 제43강은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동서양의 ‘자유’ 비교」,제44강은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국제대학원)의 「미·중 관계와 패권 경쟁의 미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한국은 동서조우 이후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불안과 동요가 컸고, 또 가치와 이념, 
제도와 문명의 충돌 정도가 높았다. 그러나 일단 생존에 성공한 한국에서는 
그 동요와 충돌만큼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의 수용과 확산이 빠르고 깊었던 것이다

거시적 관점으로 한국에서 자유의 발전 문제를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준거의 하나는 국제질서의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일차적으로는 외부로부터 주어졌던 것이다. 

2차대전 종전 이후의 국제분할점령 및 세계전쟁으로서의 한국전쟁의 결과에 따른 세계 분단으로서의 휴전선을 경계로 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난 80년 동안의 자유의 향유 정도가 보여주고 있는 거의 완전한 대비처럼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냉전의 해체에 따른 동구의 자유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북한의 ‘부자유’ 상태는 이 문제가 외부요인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먼저 오늘의 지표를 보자. 무엇보다 강조돼야 할 점은 표면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안정과 지속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절차적 최소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도전받지 않았다.

한 세대에 달하는 오랜 군부는 권위주의 통치의 역사와, 북한과의 안보 대치상황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가 한 세대 이상 안정적으로 지속됐다는 점은 상당한 성취였다.

군부독재로 인한 장기간의 인권탄압과 억압의 역사를 고려할 때 한국에서 자유의 발전은 주목할만하다.

정부별로 약간의 후퇴와 변동을 보여주었지만, 국가 자유등급 및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에 대한 프리덤 하우스의 지표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확인시켜주는 한 거시적 발전지표로 삼기에 충분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각각 추동하는 쌍방 압력의 폭발적인 분출은 상호 간의 격렬한 충돌과, 그 충돌에 바탕한 빠른 전진을 가능하게 했다”라며 “자유로의 전진이라는 세계 보편적 역사의 매우 빠르고도 압축적인 한 성공사례였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즉 이 거시지표는 근대로의 진입 이래 한국사회 발전의 뚜렷한 표징이기에 충분하다. 

표면을 볼 때,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점차 근대 이후 인류가 오랜 투쟁을 통해 성취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유와 뛰어난 통치양태인 민주주의 지배양식의 효과를 처음으로 전면적이면서도 안정적으로 누리기 시작했다.

이는 짧게는 1948년 건국 이래, 그리고 길게는 한말의 초기 공화주의 등장 이래의 국가 차원의 최초의 전체적인 향유였다.

이 점에서 한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성취는 산업화의 업적 못지않게 상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각각 추동하는 쌍방 압력의 폭발적인 분출은 상호 간의 격렬한 충돌과, 그 충돌에 바탕한 빠른 전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요컨대 자유로의 전진이라는 세계 보편적 역사의 매우 빠르고도 압축적인 성공사례였던 것이다.

한국은 전통 질서하에서 세계 어느 곳보다도 전쟁이 가장 적은 지역이었다.

이른바 전통 제국질서 하의 한국의 안정적인, 다른 말로 해 평화적인 초장기 반주권국가를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공동체의 자유 발전, 특히 하층과 피지배층의 자유의 발전 문제에 관한 한 크게 불리하게 
영향을 끼쳤다.

국제체제의 안정과 장기지속은 국경의 빈번한 이동과 국가·왕조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에 따른 체제 변동과 민중 동원의 가능성을 낮춤으로써, 대신 조공국가의 정통성과 안정성을 확고하게 보장함으로써 자유와 권리의 확장에는 매우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 노비제의 동요와 해체로 대표되는 하층의 자유 문제가 막간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양차 호란의 결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서조우로 인한 중화체제의 붕괴와 개항으로 인해 비롯됐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세계인식에 있어 한국의 사유체계에는 두 번의 예외주의 시기가 존재했다.

사상과 역사로서의 종속과 지배·간섭의 시기, 그리고 성리학과 주자학 시기의 독점과 정의 대 불의 양분 시대와 그 연장의 시기를 말한다.

이후부터 위정척사를 거쳐 일제 강점시기를 겪는다.

후자의 예외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항일 대 친일, 민족 대 외세, 아와 비아, 법통 대 이단, 두 가지 길, 반공 대 공산, 분단 대 통일 등이, 고전적인 한국 주류 사상 및 역사와는 크게 다른 대표적인 예외주의들이자 비융합적, 비공존적 사유와 특질들이었다.

우리는 이제 국제문제에 관한한 한국 역사와 사상의 본질과 특성을 짧은 예외주의 시기의 그것과 단절하고 전체 한국에 걸친 역사와 사상의 그것으로 다시 확장하고 전환해야 할 때가 됐다. 

성리학·주자학의 ‘사문난적’으로 시작된 이분법, 흑백논리, 양자택일, 선악 강요, 정의 독점의 사관과 결별·지양할 때가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예외주의 시기를 넘어 한국 사상과 역사 본래의 융섭, 융합, 경계, 절충, 화융, 화충, 통합, 변융, 화합, 공존, 교량, 통섭, 보편의 특질을 회복해야 할 때다.

일제 강점과 냉전·분단 시대에 한정해 제한적으로 사유와 적용이 가능했던 아와 비아, 분단 대 통일, 자주 대 종속, 애국 대 매국, 민족과 통일지상주의, 두 가지 길론(위로부터의 길 대 아래로부터의 길), 분단시대론, 분단체제론은 현실에서는 더 이상 적실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주류적 대안적 사유체계에 대한 반대진술이기에, 이 언명은 이론적 분석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가치적 현실적으로는 비판받을 소지가 매우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문제제기는 불가피해보인다.

물론, 우리는 예외주의 시기의 이분법 사상이 갖는 시대적 도덕과 힘의 결집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채호를 잇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보수적 혁명사관과 진보적 반성사관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빈곤과 가난 시대의 박정희와 제국주의 강점 시대의 함석헌 사관에 의해 대표된다.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함석헌의 경우는 고난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과 반성을 위한 사유라는 점에서 출발은 크게 다르다.

또 전형적인 동서, 내외융합 사상의 완성이라는 점에서도 다르다.

그러나 과거 역사해석은 크게 보아 신채호의 범주에 가깝다. 

한국 사상이래야 불교 사상 아니면 유교 사상일 것이요, 불교나 유교가 모두 남의 것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논법으로 일관한다면, 서양의 여러 문명국에는 하나의 문화밖에 없고, 아마도 이렇다 할 각자의 독자성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 서양 문화라는 것의 독자성마저 엄밀하게는 없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동양에서 시작된 종교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의 특색이 없다고 한다면, 그에 대해 그 사람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반대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만 불교나 유교가 외방에서 전래됐다고 해 사상적인 독자성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한국사회의 한 특징으로서 보편의 수용과 한국적 통합에 유능한 한 이유는, 과도한 민족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하나의 인간공동체로서 자기애와 자기 안정성의 장구한 보지(保持)가 아닐까 싶다. 

사실 자기와 또 다른 자기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우애, 타자 수용, 상호성은 자기 주체성, 자기애 및 자기 안정성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와 가까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자기가 안정되지 않고는 주체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철학적으로 말해 하나의 보편으로서 자유의 상호 수용에 관한 한 자기 주도권과 타자 주도권, 내부와 외부의 논란은 불필요해 보인다.

거시적으로 볼 때 둘 사이에 일정한 단절과 요동을 거쳐 현대에 들어와 세계질서와의 길항과 타협을 이룬 한 경로가 한국사회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에서 과도한 종족주의랄까 민족주의는 일제 강점과 분단 및 한국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시기의 예외상태로 인한 단기적 현상이며, 그 이전에는 사랑과 충성의 대상은 종족과 민족과 혈통이 아니라, 거의 항상 국가·주권·나라·국민(백성)·조정이었다.

그 점에서 한국의 최초 민족주의조차 일본과 서구를 향한 종족적 저항적 민족주의가 전혀 아니라 중국을 향한 근대적이며 시민적인 민족주의였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 독립문, 독립관을 포함해 당시 사용된 초기의 ‘독립’ 개념조차 전적으로 중국을 향한 것이었지 일본과 서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을 향한 의미는 추후 일본의 침략기도 이후 추가된 의미였다. 한국은 동서조우 이후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불안과 동요가 컸고, 또 가치와 이념, 제도와 문명의 충돌 정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생존에 성공하자 한국에서는 그 동요와 충돌만큼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의 수용과 확산이 빠르고 깊었던 것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3-03-30 04:45:56
출신인 추종세력들에 의해,대중언론이나 소설.야사.루머등을 통해 생경하고 황당한 주장을 되풀이중.@동양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수천년 유교문화가 지배해옴.인도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일어난 불교의 발상지이나,인도가 다시 불교를 배척, 천 몇백년동안 브라만의 힌두교를 믿으며 그렇게 이어짐.불교는 큰나라에들서 외래신앙인 주변부신앙(,중국등 유교문화권),천민으로 배척(인도)되면서 이어졌을 뿐임. 다만 야만족이던 일본이 막부시대 기독교에 대항하면서 불교국이 된점은 잘 알려지지 않음.@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윤진한 2023-03-30 04:44:46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고려 국자감은 고려말에 성균관이 되고, 조선 성균관, 해방후 성균관대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부처 Monkey처럼 창조신보다 높다는 불교에 영향받아 일본불교계 일본 신도는 하느님보다 높다는 성씨없는 점쇠賤民일본천황(후발로 하급군인들이 옹립)의 존재때문에 종교성이 없어, 일제 강점기때, 한국영토에서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를 왜곡하다가, 원자탄 맞고 패전.이후 유교국으로 복귀한 한국에서 문제없다가, 최근 다시 루머.야사 형식으로, 학교교육을 무시하고, 일제잔재로 남은 세력들을 통해 일본 신도처럼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며 생경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주권.자격.학벌없는 불교 Monkey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초급대출신(해방후 4년제로 승격), 공립 중.고등학교 출신

윤진한 2023-03-30 04:43:42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윤진한 2023-03-30 04:42:26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