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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만난 이민 1세대 … ‘미주이민사’ 영감을 얻다
하와이에서 만난 이민 1세대 … ‘미주이민사’ 영감을 얻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4.06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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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41)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생활 2

우리가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63년 가을이었다.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시험을 다 합격하고 떠났기 때문에 원래 예상과는 달리 두 달이나 늦게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이다. 무엇보다 호놀룰루의 집값이 비싸고 또 생활비는 미국의 본토보다 50%가 더 비싸 우리 부부는 적잖이 놀랐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우선 체류할 아파트를 구하기 시작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걸어서 10분 내지 15분 거리에 있는 초라한 아파트 단지를 찾아 갔다. 한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아파트 단지에 주로 한국 유학생이나 미국 본토에서 단기간 연수차 온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빌려주는 아파트였다. 동서문화센터에 유학생으로 와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는 학생은 대부분 기숙사에 들어가서 살았으나 결혼한 부부를 위한 아파트는 따로 없었다.

이곳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석사학위 과정에 있는 부부 학생들은 주로 하와이 첫 이민 세대인 선우 씨 가 운영하는 판자촌같은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었다. 우리도 동서문화센터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선우 씨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기로 했다. 방 두 개에 골방같은 응접실 그리고 매우 작은 부엌이 달려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동서문화센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 아파트는 좋고 더 편리하지만 자동차를 사서 출퇴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비가 더욱 비싸게 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선우 씨

그렇게 해서 우리 두 사람은 선우 씨가 소유한 아파를 계약하고 2년 동안 살기로 했다. 선우 씨는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겔릭호로 미국 땅에 들어온 한인 이민자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한인 초대이민자 102면 중의 한사람으로 제물포(인천)에서 일본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미국상선 겔릭호로 갈아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 선우씨와 나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김일평 교수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첫 근무할 때 만난 선우 씨는 바로 이 배(겔릭호)를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사진= 미국 이민사 사진집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중에서
선우 씨는 자신의 과거사를 들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매우 관심을 갖고 들어주니 저녁식사가 끝나는 즉시 우리 아파트로 달려와서 자기의 이민 역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던 것이다. 선우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한국 나이로 18세 되던 해에 조선조 왕실의 경비대 대원모집에 응모해 경비대원이 됐다. 1년 정도 근무한 후 한일합방이 돼 황실의 경비대가 해체됐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황실의 한국인 경비대를 모두 해체시킨 것이다. 그는 직장을 잃고 다른 직장을 구하러 다니던 중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를 구한다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 가서 노동하기로 결심하고 응모했다.

선우 씨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 13일 새벽이었다. 그가 타고 온 배는 미국상선 겔릭호였다. 그 배에는 조선인 102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도착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었다. 평안도가 고향인 선우 씨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자무식쟁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경우가 매우 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거의 매일 밤 그가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됐으며 또 어떤 곤경을 극복하고 오늘과 같이 아파트 단지를 소유하게 됐는지 그 경로를 들었다. 그가 고생한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었다.

사진=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탄압을 피해서 상선 ‘메이 플라워(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매사추세츠에 있는 프리머스 록(Plymouth Rock)에 도착한 것과 비슷한 천로역정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미국대륙에 정착한 역사책은 많은데 왜 한국이민역사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나의 논문이 끝나고 교수생활을 시작한 후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미국의 한국인 이민사를 반드시 기록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먹게 됐다.

2003년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 서적을 만들다

2003년 한국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 나는 뉴욕한인회의 위촉을 받고 『대뉴욕 이민 100년사』의 편집위원장이 됐다.『대뉴욕 한인 100년사』 (500 쪽) 와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영문판)을 편집해 출판했다. 100년사의 편찬위원장은 김일평, 부위원장에는 서진형, 그리고 편찬위원은 하동수, 조종무, 황미광, 송의용 등이었다. 미주이민 100년사는 구하기 힘든 자료와 집필진의 기고문을 모아서 『뉴욕의 한인 100년사』를 잘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제본과정에서 누가 결정했는지는 몰라도 보통 책보다 두 배가 되는 화보사이스로 500여 쪽이 되기 때문에 도서관에 전시할 수는 있지만 개인이 휴대하고 다니며 읽기에는 매우 힘든 책이 됐다.

김일평 교수가 편집위원장이 돼 펴낸 한인 이민 100년사와 관계된 책.

반면에 영문으로 된 『Korean-American: Past, Present, and Future』는 보통 책 크기(4*6배판)으로 교과서로 사용한 대학도 있었다. 특히 미국의 한인사회에 대해 역사적·인류학적 혹은 사회학적 논문을 집필한 경험과 지적 기반이 있는 젊은 학자가 원고를 집필했기 때문에 『Korean-American』이라는 책은 한국인 이민 1세의 자녀들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할 때 좋은 참고 자료가 됐으며, 나아가 미국에서 동아시아 역사는 물론 인류학,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의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도서관학회의 기관지인 <초이스(Choice)> (도선관 학보)지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리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잉 교수는 “재미한인사회에 관한 영문 책으로는 제일 잘 편집된 책이다”라고 평가하면서 교과서로 추천했다. 미국의 많은 대학의 도서관에서 주문했다는 소식이 출판사에서 왔다. 매우 기쁜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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