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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육군연락장교' 시험… 3개월 훈련 받고 전방 배치
우연하게 '육군연락장교' 시험… 3개월 훈련 받고 전방 배치
  • 김일평
  • 승인 2012.06.09 0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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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7) 한국전쟁과 연락장교시절-2

한국전쟁중 나는 대구에 피난 와 미 제8군 사령부에서 민간인 군속(Civilian Employee)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앞에서 말했다. 나는 휴일이 되면 대구 시내에 종종 나갈 수 있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육군본부 앞을 지나가다 눈길이 자연스레 게시판을 향했다. 그야말로 무심하게 바라봤을 뿐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운명을 다시한번 바꿔놓을 줄은 그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육군본부 게시판에는 연락장교 제 7기생을 모집한다는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으며, 영어회화에 능통한 대학생이나 20세 이상의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날 나는 연락장교 지원서를 받아 갖고 대봉동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 육군연락장교 시험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열기와는 달리 길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대학 재학 증명서와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갖춰야 하는데, 어떻게 대구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대학 대구분교에 문의 했더니 우선 등록금을 지불하고 등록을 해야만 재학증명서를 하나 떼어줄 수 있다는 회답이 왔다. 그리고 경찰서의 신원보증서도 함께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대학증명서는 학생 신분증을 복사해서 대체하고 대구 달성경찰서의 신원보증서는 대구의 동료친구에게 부탁해 형사를 만나서 인터뷰한 후에 가까스로 만들 수 있었다.

레어드 선교사가 원주에서 해방 후 1940년대에 가르친 영어회화 공부 덕분에 나는 6·25전쟁 당시 제7기 연락장교 후보생 선발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연락장교 선발에는 영어회화 시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와 영문 번역 시험도 포함돼 있었다. 영어회화 능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영어책도 읽고서 영미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말로 잘 번역할 수 있는지 등 어학 능력을 종합적으로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도 잘 쓰고 표현력도 갖춰야만 한다는 방침이었던 듯하다. 사실 번역과 동시통역은 매우 힘든 어학분야로 전문적인 직업에 속한다.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한 우리는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은 후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할 수 있었다.

우리 7기생은 대구의 보충대대 본부에서 3개월간의 훈련을 받았다. 대구보충대대 본부 안에는 야전 천막을 치고 미군이 사용하는 야전침대 (영어로는 캇트라고 함)를 두 줄로 18개를 펴고 잤다. 내가 야전 천막생활을 해 본 것은 6·25 전쟁이 나기전인 1948년에 진해 해군 사관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 훈련을 받을 때 처음 경험했으니 두 번째였던 셈이다. 새벽 7시에 기상해 30분 이내에 세수하고 야전군복으로 갈아입고 연병장에 나가서 새벽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천막으로 된 군인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한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식기에 밥 한 그릇, 배추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 한 공기를 트레이에 올려놓고 숟갈과 젓가락을 들고 식탁에 가서 식사를 한다. 이와 같은 한국식 식사생활은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최전방에서도 3년간 더 계속됐다.

 훈련은 매우 힘들었고 또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1948년 전국의 각 고등학교에서 2명씩 선발해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훈련을 받을 때 이미 기초훈련을 겪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난 후 나는 미 제8군 사령부에 근무할 때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몸이 상당히 무거워져 있었다. 녹이 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군사훈련을 무난하게 잘 해 낼 수 있었다. 원주 판부면 단계리에 살면서 원주농고를 다닐 때 나는 매일 매일을 3시간 이상을 걸어서 통학했기 때문에 근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됐던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자란 동료 훈련생들은 거센 군사훈련을 참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아우성들이었다.

 육군 장교 후보생의 훈련은 강도도 매우 높아서 체력적으로 견뎌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는 이 훈련이 실제 전투에서 겪게 될 갖가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치밀한 인내심을 길러 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아침저녁으로 추운 11월에 맨발로 물속에 뛰어들었던 고통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에는 인내심이 강해서 참을 수가 있었지만, 기초훈련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38선을 넘어 북한강 이북에 있는 제 2군단 본부에 배치돼 전방근무를 할 때 왜 그와 같이 힘든 군사훈련을 거쳐야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3개월의 보병장교 훈련을 무난히 끝마치고 우리 육군 연락장교 7기생은 각기 여러 부처로 배속됐다. 육군본부에 배속된 동료도 있었고, 또 육군대학에 근무하게 된 3 명의 동료도 있었다. 그리나 대부분의 우리 7기생은 지리산 공비토벌을 하기 위해 새로 창립된 제100부대 (후에 육군 제 2군단으로 재편됨)로 배치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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