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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대의 한국문화축제를 빛낸 숨은 조력자들
콜럼비아대의 한국문화축제를 빛낸 숨은 조력자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2.22 1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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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5)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6

뉴욕의 쥴리어드 음악대의 한국 유학생과 또 미국 동부지방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여러 학생들 중 지명도가 높은 한국예술인을 초빙해 ‘한국문화 축제(Korean Cultural Festival)’에 등장시킴으로써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미국사람들에게 알리자는 것이 문화축제의 목적이었다. 우리 한국학생회의 간부는 인디아나대 음악대학에 유학생으로 와 있는 원경수 바이올리니스트를 초청해 연주를 부탁했다. 뉴욕의 쥴리어드 음악대학에서는 백낙호(서울대 음대 교수), 이정희, 김복희, 이혜경 제씨를 교섭해서 성악과 피아노 연주를 부탁했다.

 ‘한국문화 대축제’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제1부에는 주로 성악과 피아노 등 악기를 연주하고, 제2부에서 한국의 무용과 장고, 그리고 부채춤 등 다양한 연기를 선보이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 내에서 그렇게 풍성하고 찬란한 한국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한국유학생회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매우 감동적인 평가를 했다. 이와 같이 성공적으로 한국문화를 미국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이들 가운데는 숨어서 공헌한 한국 학생들도 있었다.

콜럼비대학원 학생이었던 백선기, 정영엽, 장혜원, 뉴욕대학원의 노재봉, 김명회 등 많은 대학원 학생들 다수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문화축제’는 불가능했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록에 남기고 싶다. 1960년대 이후 그와 같이 찬란한 한국문화의 대축제는 더 이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물론 미국이민의 문호가 개방된 197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많은 예술인과 문화행사가 뉴욕에서 개최됐지만 그렇게 단결되고 또 한국문화의 긍지를 갖고 예술축제를 콜럼비아 대학에서 개최한 일은 없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학생 부인들도 나서서 밥상 차려

축제는 앞에서 보면 화려하지만, 이를 준비하고 관리하는 측면에서 보면 어렵고 힘든 일도 많게 마련이다. ‘한국문화축제(Korean Cultural Festival)’를 개최할 때 멀리 보스턴과 뉴잉글랜드 지역, 그리고 워싱턴에서도 참석한 한인 유학생과 한국인 방문교수 등 다양한 참석자들의 저녁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큰 문제로 대두했다. 마침 방법을 찾던 끝에 콜럼비아 대학원의 화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장혜원 박사가 성악가 김복희 씨와 함께 한국 여학생들과 한국유학생 부인들을 동원해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115가의 한인교회 지하실에 있는 취사장(부엌)에서 쌀로 밥을 만들고, 불고기와 소고기 요리를 만들어서 김치와 함께 저녁식사를 제공했다.

1960년대 뉴욕에는 한국식당이 하나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중국식당에 부탁해 저녁식사를 맞출 계획도 세웠으나 한인학생 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음식을 만들서 한국문화제 참석자들에게 제공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한국문화제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 4월 서울의 학생혁명이 일어난 후 뉴욕의 한인사회에서도 유학생들에 대한 태도가 변했고, 또 한국정부의 공관직원들의 태도도 많이 변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종식시키고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트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명실공히 성취했다. 때문에 뉴욕 교포들이 한국 유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뉴욕한인회의 각종 행사에는 한인학생회의 간부들 모두가 초청됐으며 뉴욕의 한국학생회 간부도 뉴욕한인회의 간부 혹은 이사로 등용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정치적 변화에 따른 결과였다. 한인 유학생도 고국의 학생운동의 여파로 새로운 역할을 담당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KBS '현대사의 증언' 자료화면

따라서 미국 내의 한국인 유학생들의 역할을 돕기 위해 한국유학생회 연합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워싱턴의 조지타운대 학부에서 공부하던 박동선이 워싱턴 한국학생회장이 돼 워싱턴 학생들을 대표했고, 나는 뉴욕지역에서 뉴욕한국학생회 회장으로서 뉴욕한인 학생들을 대표했다. 보스턴에서는 보스턴 대학원 학생인 강래문 씨가 학생회장이 됐다. 워싱턴의 박동선 회장은 서울의 본가에서 미륭상사를 운영하며 미국에서 석유와 휘발유(가스)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사업을 크게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적적 여유가 많이 있었다. 그는 워싱턴에 살면서 미국국회에도 로비활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박동선과 김일평의 유학생 역할론

워싱턴 학생회장 박동선은 미주학생회 연합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뉴욕에 올라와서 뉴욕한인학생회와 공동으로 미주한국학생 연합회를 조직하자고 나에게 건의한 바도 있다. 그리고 미국의회에 로비활동을 시작해 한국전쟁 후 감소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원조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도록 로비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임무는 우리에게 맡겨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위를 받은 후 우리에게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주변정세에 관해서 미국사람들에게 홍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득했다. 미국의회에서 경제원조를 삭감하는 것을 반대하는 동시에 한국의 안보를 미국이 지켜줄 수 있도록 이해시키는 로비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나는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회에 대한 로비활동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나의 충고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궁극에 가서는 워싱턴의 미국국회에 대대적인 로비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한국에 경제원조의 일환으로 제공할 수 있게끔 대대적인 로비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박동선은 결국 코리아게이트라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됐다. 어느 면에서는 박동선에게 로비활동에 대한 조언을 해준 나에게도 일부의 책임이 있었다.

박동선은 미국의회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로비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의 정치인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 조지타운 주택가에 4층 벽돌 주택을 사서 미국의 상원(Senate)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의 외교위원회 의원들을 초대해 매일 디너 파티(Dinner Party)를 벌였다. 서울에서 일류급 요리사를 데려오고 또 한국의 전통 음악과 무용을 보여주며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동시에 한국문화를 감상하고 또 한국과 미국사이의 우호관계와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미국의 국방원조와 경제원조를 삭감하지 않고 더욱 늘려달라는 로비활동을 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박동선의 개인적인 외교활동이었지만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한국에 대해 미국의회 의원들이 호감을 갖고 원조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물론 박동선의 로비활동에는 수십만 달러의 경비도 들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재산을 축적하는 도구로 사용됐다는 비난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곧 코리아게이트 사건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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