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9-23 17:18 (월)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 … 정일권 장군 도움으로 유학길 올라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 … 정일권 장군 도움으로 유학길 올라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8.29 22: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일평 교수 회고록(13)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5

벤플리트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나는 육군 중위로 임관된 후 벤플리트 장군의 통역을 몇 차례 한 일이 있다. 1953년 5월 제2군단사령부가 있는 38도선 이북의 화천군 소도고미에 주둔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제2대 군단장으로 부임해 온 유재흥 장군은 일본육사(4년제)를 졸업한 지성이 있는 장군이라 우리는 인텔리 장군(智將)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 연락장교의 중요한 역할과 필요성을 높이 평가한 장군 중의 장군이었다. 그는 우리 연락장교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으며 또 서로 간에 말도 잘 통했다. 유재흥 장군은 일본에서 일본군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서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일본군의 육군 소위로 임관돼 진급의 진급을 거듭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군 국방경비대에 편입돼 육군의 장성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우리 연락장교들은 그를 '장군 위의 장군' 이라고 부르며 매우 존경했다. 그의 부친 유승열 장군도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복무한 후 해방이 돼 다시 한국군으로 편입된 국방경비대의 창설멤버인 동시에 한국군의 장군이었다.

유재흥 장군은 일본말을 매우 유창하게 잘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장성에게 편지를 쓸 때는 일본어로 직접 작성한 뒤 나에게 영문으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내가 번역한 유재흥 장군의 편지 중에는 판문점 휴전협상 당시 미국측 협상대표로 함께 참여한 해리슨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그는 일본어로 작성한 편지를 내가 영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고 나의 일본어 실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칭찬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일본말은 19세기 중반인 1860년대부터 서양화가 많이 돼 있었기 때문에 서양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말을 영어로 번역하기는 쉬웠지만 한국말은 아직도 그렇게 서양화가 되지 못해서 그랬는지, 아직은 매우 토속적이었기 때문에 번역하기가 힘들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벤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우리 2군단을 두 번 방문했다. 한 번은 1952년 4월 제2군단 창립1주년 기념행사 때이고, 두 번째는 1953년 4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우리 동료장교들과 나에게 동성훈장을 수여하는 시상식에 참석했다. 나는 그가 한국군 제2군단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통역을 맡았다. 첫 번째 통역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함께 와서 축사도 하고 단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 통역을 내가 맡게 됐는데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밴플리트 장군의 연설은 통역하기가 매우 쉬웠다. 그는 말을 아주 짤막하고 또 천천히 하는 편이었다. 단상에 앉아 있던 李 대통령은 "金 중위가 벤플리트의 통역을 아주 잘한다. 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군단장에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李 대통령은 전방에 올 때 마다 꼭 우리 연락장교들의 영어실력을 칭찬하며 우리의 노고를 위로해 주셨다.

나는 연락장교 시절부터 미국 유학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1946년부터 미국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 선생의 영어 공부반에서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미국유학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8?15해방 후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해 조국의 독립에 공헌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여러 장관, 그리고 미국 박사들과 같이 미국에 가서 새로운 서양문명을 배우는 것이 일본 식민지통치의 쓰라림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군 제2군단의 미군고문단의 동료 장교인 시슬 브랜든 중위에게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나고 싶다는 의향을 말했다. 그는 노스 캐롤나이나주에 있는 남장로교 계통의 데이빗슨 대학 (Davidson College)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ROTC 장교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돼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으로, 한국군 제2군단 미국고문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자기 모교인 데이빗슨 대학의 입학처장으로 있는 자신의 동기동창생에게 편지를 보내 입학서류를 보내 왔다. 나는 입학원서를 우편으로 접수시켰다. 물론 브랜든 소위의 군사통신(APO)을 이용하는 편리도 있었다. 앞의 연재(12회차)에서 이미 밝혔듯 미9군단에서 만나 가깝게 지나던 군목 피터 홈스(Peter N. Holmes) 소령이 켄터키주에 있는 애스베리 대학(Asbury College)에서 입학 허가서를 얻어서 내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4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미군 9군단의 軍牧이었던 피터 홈스 소령의 정성은 지극했다. 그는 미군 제9군단의 채플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 마다 나의 미국유학을 위한 특별헌금을 모아서 나의 왕복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야말로 '풀 스칼라십(Full Scholarship)'을 제공해 준 은인이다. 1950년대 초반의 미국왕복 여비는 800달러였다. 한국 공무원의 급료로 계산하면 5~6개월분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공무원 생활로 1년을 저축해도 800달러의 목돈을 만들기는 매우 힘들 때였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데이빗슨 대학에서는 등록금 장학금 즉 등록금을 면제해 주는 장학금은 줄 수 있으나 기타 학비는 나 자신이 부담해야 된다고 통보 해왔다. 따라서 나는 등록금, 기숙사비와 식비를 포함하는 장학금 (Full Scholarship)을 주는 애스베리 대학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한국 육군에서 퇴역하는 절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던 1953년 6월 당시, 한국 육군장교로서 육군에서 제대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미국유학을 위한 제대라는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유학을 위한 제대 혹은 전역이라는 제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때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한국군 제1군단에서 연락장교로 근무하던 승계호 중위가 우리 연락장교 중에서는 제1호로 한국 육군에서 제대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승계호 중위에게 군사통신 전화로 통화를 하기위해 여러 번 시도했다. 1953년의 전화 시스템은 주로 미군이 사용하는 유선전화를 사용해 통화하는 것이었다.

 

제2군단본부에서 벤플리트 대장과 통역. 좌로 부터 요재흥 군단장, 백선엽 참모총장,필자, 벤플리트 대장

그러나 그는 벌써 한국군 제1군단을 떠나 부산에 내려가서 도미유학의 수속을 진행중이라고 당번 하사관이 귀띔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유학을 떠나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의 길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내가 한국육군 장교로서 전역할 수 있었던 데는 정일권 군당장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한국군 제2군단에서 제대한 후에도 문교부의 유학시험과 외무부의 여권 수속 등 여러가지 절차도 이어졌다. 물론 미국대사관의 영어테스트와 면접시험 등 어려운 문제들이 첩첩산중이었다. 문교부의 역사시험과 영어시험 그리고 미국대사관의 영어 면접시험 등 미국유학 수속절차는 높은 산을 여러 개 넘어야만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수속절차는 '천로역정'이나 다름없다고 유학지망생들은 말할 정도였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轉役 허가

나는 육군 장교로서 만 3년간의 복무를 끝냈으니 유학의 길을 떠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나는 제3대 군단장으로 부임한 丁一權 장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참모총장으로 영전해 육군본부로 간 白善燁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써서 보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정일권 장군은 내가 육군에서 전역하는 데 필요한 신원보증서를 써 주었다.

그분이 써준 신원보증서를 나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丁 장군은 제1항의 '사상'에 관한 란에 "지극히 온건, 滅共사상이 투철하다"고 썼다. 후에 육군본부에 제대 서류를 접수하러 갔을 때 어떤 부관장교가 "반공사상이 투철하다는 건 말은 되지만, 멸공사상이 투철하다면 빨갱이는 다 찔러 죽이겠다는 말이냐"고 웃으면서 물었다. 매우 못마땅한 눈치였다. 나는 "그렇게 써주신 분에게 직접 물어 보시라"고 회답을 해 주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1953년의 군대 내부의 모습과 한국 사회상의 한편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참고삼아 신원보증서 사진을 첨부한다.

정일권 제2군단장이 필자에게 써준 신원보증서

 

한국 육군에서 제대하는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자 정일권 장군은 "제2군단 창설 3주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오시면 한번 자네의 미국 유학 문제를 얘기해 볼 것이네"라고 말했다. 1953년 4월 李 대통령은 제2군단 본부가 있는 화천군 천정리에 헬리콥터를 타고 도착했다. 미8군사령관으로 임기를 끝마치고 떠나는 벤플리트 장군도 이임인사차 함께 도착했다. 벤플리트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매우 가깝고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벤플리트 장군이 군에서 퇴역한 후에도 이승만 박사를 많이 후원하고 미국에서 홍보했다. 그는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1957년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를 뉴욕에 창설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이승만 정부 홍보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한국 홍보에 그의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뉴욕에 본부를 두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미국사람들에게 소개하며 한국의 전후복구 사업을 위한 재정원조는 물론 한국의 군사원조를 위해 미국의회와 정부에 로비활동을 많이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반세기가 지난 1990년대부터는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도날드 그래그(Donald Gregg) 대사가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직을 맡으면서 경제원조에서 벗어나 한국문화를 미국사회에 홍보하는 데 모든 힘을 다 하기 시작했다.

1953년 4월 제2군단 창설 기념식 겸 벤플리트 장군의 이임식 석상에서 나는 그의 이임 연설을 통역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단상에 올라가 벤플리트 장군의 이임사를 통역한 후 단상에 앉아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고 내려오려고 했다. 李 대통령께서 어떻게 나를 기억하고 계셨는지 "金 중위, 아직도 미국 유학을 안 갔나"라고 묻는 게 아닌가. 정일권 군단장은 "유학수속을 진행 중인데 육군에서 제대하는 문제가 잘 안 풀리는 모양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경무대에 연락해서 빨리 수속을 하도록 도와주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내렸다고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정일권 장군은 내가 군 복무를 시작한 후 3년 동안 최전선에서 복무했고, 또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으로부터 동성(Bronze Star) 훈장을 받았다는 등의 업적을 기록해서, 국방부와 경무대로 전역 허가를 요청하는 서류를 발송했다.

나는 한국 육군에서 전역하는 허가서는 아직 받지는 못했으나 문교부에서 치르는 국사시험은 무난히 통과하고 외무부에서 보는 영어실력 테스트는 힘들었지만 통과한 상태였다. 그 당시 외무부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외교관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8.?5해방 후 영어회화를 배운 사람들이고 또 국제관계에 대해 별로 조예가 깊지 못했다. 대부분의 외교관은 영어를 잘해서 외무부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또 외교관으로 해외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50년대의 한국 외교관은 일본 외교관과 비교해 보면 매우 소박하고 외교절차도 잘 모르면서 현직에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정일권 장군은 제2군단장 시절의 인연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온 뒤에도 나는 그에게 종종 문안편지를 보냈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으로 바쁜 공무생활을 할 때에도 잊지 않고 나의 서신에 반드시 회신을 보냈다. 정장군이 국무총리시절에 나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학술회의에 몇 번 참석했다. 정일권 총리는 삼청동에 있는 총리공관에서 개최된 만찬에 나를 초대해 주신 일도 있었다.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나갔을 때 한번은 삼천동 총리공관에서 조찬(Breakfast)을 하고 정 총리의 승용차를 타고 중앙청 집무실까지 함께 갔다. 차내에서 총리수행 비서관 원창훈 씨는 그날의 행사일정을 보고했다. 매우 인상적인 브리핑이었다.

6·25 전쟁 이전 나는 강원도 원주에서 원창훈 씨와 조성규 씨등 5~6명의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에스터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 시절을 회상했다. 6?25전쟁 1년 전이었지만 레어드 선교사의 영어교육 덕분으로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연락장교(후에 통역장교로 명칭변환)로 대한민국 육군에 복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총리수행 비서관이 된 원창훈을 유학생이 돼 다시 만나게 됐다. 레어드 선교사와 맺어진 인연은 이렇게 되풀이 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에게 깊이 감사한다. <계속>

*김일평 교수 회고록은 매주 수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