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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공병대 군용차 타고 상경…미 8군에 자리 잡다
대전에서 공병대 군용차 타고 상경…미 8군에 자리 잡다
  • 김일평
  • 승인 2012.05.23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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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7) 한국전쟁과 연락장교시절-1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다고 해서 나는 피난민 속에 끼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향인 원주에 들렸으나 우리 가족들은 벌써 산속으로 피난 갔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피난민 속에 끼어서 남하하여 대전까지 갔다. 그러니 피난민들은 "미군이 곧 들어올 터이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말했다.

대전 피난민 수용소에서 지내던 중 1950년 9월 2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진하는 한국군 공병대의 군용차를 타고 원주의 우리 집에 돌아와보니 한국군 공병대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우리 집을 점령하고 중대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공병대 중대장은 서울이 수복되어서 서울 청량리를 지나서 춘천까지 간다는 것이다. 나는 공병대장에게 부탁하여 서울의 청량리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했다. 나는 서울이 수복되었으니 서울에 가겠다고 말했다. 공병 중대장은 청량리를 거쳐 강원도 춘천으로 가니 타고가라고 했다. 새벽에 원주를 떠나서 서울 청량리에는 오전에 도착했다.

청량리에 내린 나는 신설동에 사는 친구 강신웅(6?25전쟁 당시 연락장교로 있다가 서울대 사범대학에 복학하고 졸업함)의 집을 찾아갔다. 내가 동대문을 지나서 신설동 시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자네 김일평이 아닌가?"하고 물었다. 강신웅이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서로 얼싸안고 포옹했다. 그는 어머니를 소개해주고 시장을 본 후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며칠 묵고 가라고 말했다. 오래간 만에 만난 친구의 우정에 눈물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기뻤다. 신웅이 어머니께서도 반가워하시면서 집으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서울대 문리과대 진주한 미8군사령부 찾아가

신설동에 있는 강신웅의 집에서 며칠 묵으면서 서울이 복구된 후의 안정을 찾기 시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신웅은 "우리 함께 나가서 일자리를 구해 보자"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선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주둔하고 있는 미 8군사령부에 가 보기로 했다. 미 8군이 서울이 수복된 직후 서울대학 문리과대학 본부를 8군사령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군과 나는 일직 아침식사를 마치고 미8군사령부에 갔다. 민간인을 고용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미8군사령부가 민간인을 고용하는 일자리는 두 가지 분야였다. 하나는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를 구하는 분야와, 다른 하나는 영어를 통역할 수 있는 민간 통역관 모집 분야였다. 강군은 서울대 사범대학에 들어갈 때 영어시험을 치렀지만 미국사람들과 영어회화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다고 근심했다. 나는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시절 미국 선교사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국 한국이 해방된 후 5년이 지난 후 6·25 전쟁이 일어났으니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나는 원주에서 해방 후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달리 영어회화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히어링'(영어를 알아듣는 능력)도 매우 익숙하게 잘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미8군사령부의 통역관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서울대 동창 강신웅 집에서 매일 한 시간씩 걸어서 동숭동에 있는 미8군사령부까지 통근 했다. 9·18 수복 후에는 정신없이 미8군에서 일하는데 3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전방에서 돌아오는 미군 장교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까지 진격했던 미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군사비밀이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미군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공의 인민의용군이라고 자칭하였지만 중공의 팔로군이라고 말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그들의 공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후퇴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 아직 군사 비밀이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였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10만 대군이 중공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으며, 여기에는 중공군에 가담하여 중국해방전쟁에 참여한 한국인 4만5천 여명도 포함된다.

미군 장교에게 들은 '중공군 참전' 소식

미군 장교들이 전해준 말처럼, 얼마 뒤 12월 말경에 미군 제8군 사령부는 대구로 후퇴하고 말았다.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고 미군장교들에게 물었다. 미8군의 한국인 종업원은 다 함께 후퇴한다는 것이다. 안심은 되었다. 서울대의 친구 강신웅은 홀어머니를 서울에 남겨두고 자기만 후퇴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신설동 집을 지키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나는 강신웅과 그의 모친께 작별 인사를 하고 신설동을 떠났다. 미군 제8군 사령부의 인사과는 한국인 종업원을 남하시키기 위해 서울역의 화물차 한대를 전용으로 사용했다. 화물차에 타고 보니 객실은 없었으며 화물을 싣고 다니는 창고열차였다.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에 서울을 떠나라는 8군사령부의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이 화물차를 타고 서울역을 떠났다. 남녀 종업원을 가리지 않고 다 함께 화물차에 수북하게 올라 탔다. 기차는 밤새도록 달리고 또 달려서 그 다음날 새벽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민간 고용인(Civilian Employee)으로 미군 제8군 사령부에 근무한 시절은 참으로 낭만적인 학생시절이었기 때문에 내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대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일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토론도 하며 우리의 미래 구상도 해 보았다. 미군 제8군 사령부는 대구의 대봉동에 있는 대구사범대학 교사와 부속 중학교 교사를 사용했다. 대구사대 와 부속 중학교 교정을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경비는 매우 삼엄하여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했다. 미 육군 제8군 사령부의 민간 종업원은 정문이 아닌 종업원 출입구에서 신분증을 보이고 출퇴근하기 때문에 규칙도 매우 엄했다. 미군 제8군 사령부 정문에는 미군 헌병이 교대로 24시간 수비를 서 있었으며, 한국인 종업원은 다른 종업원 출입문으로 출퇴근했다. 후문은 주로 화물트럭 만이 출입할 수 있게 수비하고 있었다.

대구로 후퇴 … 피난 대학에 복학 못해

우리는 미8군 종업원 신분증을 출입문에서 보초로 서 있는 미군헌병에게 보이고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나는 특히 야간근무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밤에 일하고 오전 중에는 잠자고 오후에는 대구 시내에 나가서 책방에도 들려 책도 사보고, 또 특별강좌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대학들이 대구에서 개교하고 대학을 따라 함께 내려온 학생들과 대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시작한다는 공지사항도 보았다. 그러나 피난도시 대구에서 이들 피난 대학에 등록하고 복학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또 불가능한 것이 나의 솔직한 형편이었다. 나는 나의 식생활을 해결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구에서 대학에 복학 한다는 것은 매우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미군 제8군 사령부에서 그대로 10개월 동안 더 근무했다.

미8군사령부의 장교식당에서 근무할 때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장교식당의 여성 봉사원 (웨이트리스)은 대부분 서울에서 경기여고 혹은 이화여고교에 재학중인 어린 학생들이었다. 남성 종업원 중에는 나와 같이 서울에서 내려온 강신웅(서울 사범대학) 등 몇 사람이 있었고, 또 해방직후 미군부대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이른바 미군종업원도 있었다. 학생들은 학생들끼리 몰려다니고, 미군부대 고용원 경험자들은 미군부대의 창고에서 미제품을 후치는 일에 능수였다. 그리하여 미8군 고용원 중에는 학생층과 미군종업원 원로들이 항상 갈등을 빚어 미군감독의 중재를 받기도 했다. 미군은 항상 정직하고 순수한 학생들의 편을 들어 주고 직업적인 미군 고용원들은 처벌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학생종업은 그대로 남아서 정직하게 일을 잘하고 있었으나 직업 종업원은 미군물자를 도둑질해서 돈을 버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에 미군들은 그들을 다루는데 골치를 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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