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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한국군 의사소통의 가교 역할 톡톡히
미군과 한국군 의사소통의 가교 역할 톡톡히
  • 김일평
  • 승인 2012.07.10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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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10)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2

우리는 미군 제9군단으로부터 군단의 조직과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백선엽 군단장을 비롯해 김점곤 참모장, 인사(김길수 중령), 정보(육근수 중령), 작전(김사열중령), 군수(황 중령)의 군단 참모 등 각 부처의 참모는 물론 부참모 등 50여 명이 넘는 군단요원 장교들은 미군 제9군단 사령부에서 미군참모와 여러 전문분야의 요원들로부터 강의를 듣고 군단의 조직과 그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우리 연락장교들은 미군 제9군단의 각 부처에 배속돼 미군참모들로부터 교육재료를 받은 후 밤을 새워 가면서 공부하고, 번역을 했다. 나는 정보참모의 전투정보 편람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영어는 서양 언어이기 때문에 한국말과는 감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때문에 영어를 우리말로 통역하고 또 번역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과 통역은 창작이나 다름없는 작업이다. 첫째는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동문서답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연락장교는 해방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 영어를 책으로만 배웠으나 미국사람들과 접촉하고 미국사람들과 영어회화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군장교들이 사용하는 실용영어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만일 미국장교들이 한국군 지휘관에게 지시하는 사항을 잘못 통역한다면 수십 수백명의 사병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전선에서는 정확한 통역이 필요했다.

한국군 장성들 자부심 컸지만 영어에 약해

한국군의 장성들은 해방직후 군사영어학교 혹은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자랑하지만 영어를 알아듣고 정확히 이해하는 장교는 드물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일본군 출신 장교를 재교육시키는 단기훈련소나 다름 없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영어를 배우는 곳이 아니었으며, 새로 조직되는 한국 국방경비대 장교를 훈련하고 교육하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전신 이었다. 우리 연락장교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영어로 된 군사교재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한국군 장교들에게 미리 건네줬지만, 그들은 읽어보고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장교도 많이 있었다.

훗날 군사영어학교가 되는 조선 국방경비대의 행진 모습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도 많았지만 한국군 창설당시의 한국군 장교의 교육수준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장교는 4년제 육군사관교(대학교의 수준)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10년이 지나 영관급으로 진급한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장교와 장군은 일본군의 사병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또 미국군과 한국군의 생활습관도 매우 다르고 우리의 사고방식도 매우 달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東西文化의 비교연구가 아직 발달되지 못한 1950년대에는 한국군과 미국군 사이의 의사소통은 잘 되지 않는 시대였다. 우리는 한국의 군사문화와 미국의 군사문화의 차이가 너무도 다르고 그 폭이 너무도 넓었기 때문에 같은 군인이면서도 상호간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고 동문서답 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는 것을 회고하면서 웃음을 금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영문을 한국말로 번역하고 미국사람의 말을 한국말로 통역한다는 것은 하나의 창작이나 다름이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통역이나 번역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된 것은 미군 제 9군단에서 미군 참모들의 강의를 한국말로 정확하게 통역할 때였다. 정확한 통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연락장교는 제2군단 창설에 희생적으로 봉사했으며 또 한국전쟁에서 세운 공훈도 많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동료들도 있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통역장교의 역할에 대하여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그는 연락장교의 통역에 의지했고 또 연락장교의 통역에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는 마치 자신이 영어를 잘 알아듣고, 또 미국 군사고문관들과 영어로 대화를 잘했던 것처럼 '카모프라지(camouflage: 군복 느낌의 위장용 얼굴무늬를 말함)' 한다면 과연 한국군의 장성으로서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자서전에는 통역장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없다.

 '브로큰 잉글리쉬'와 통역장교의 역할

백선엽 장군이 <중앙일보>(2010) 에 연재했던 「6·25전쟁과 한국군」이라는 회고록을 읽어보면 그는 영어를 매우 잘 알아듣고 미군 장성들과 의사소통도 문제없는 것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연락장교들이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당시에 경험한 바로는 백 장군이 영어 몇마디를 짐작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미군장교들과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의 옆에서 지켜본 한국 장교들은 누구나 다 백선엽 장군은 통역이 필요했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백선엽 장군이 한국군 제1군단장 시절 연락장교로 근무한 임석두 중위의 말에 의하면 백 장군의 영어는 그 당시 한국군 장성들의 짧은 영어와 똑 같은 '브로큰 잉글리쉬(Broken English)'로 그것도 몇 마디 인사말을 할 정도이지 전략적으로나 혹은 전술적인 용어는 소통을 할 수 없었고, 짧은 영어 '브로큰 잉글리쉬'를 사용하고 있었다. 임석두 중위는 해방 전에 함경남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제형 학구파로 백선엽 장군이 제2군단 창설을 위해 남원에 '100부대 전투사령부'를 창설했을 때 백 장군의 통역장교로 와서 그의 전속통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제 2군단이 미 9군단 산하에서 군단의 조직과 작전 훈련을 받을 때와 화천군 소도고미에 주둔한 제 2군단 시절에도 백선엽 군단장의 전속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미 제9군단 M46전차대대
제 2군단 사령부에서 임석두 중위가 주축이 돼 우리 연락장교 몇 사람은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는 매주 미국 주간지 <타임>지를 공부했다. 임 중위가 <타임>지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우리들의 선배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 장성들은 누구나 다 자존심이 매우 강했고 또 중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日政시대에 사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해방된 후 한국경비대에 편입돼 한국 전쟁동안 승진한 장교들이 많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었다. 당신은 제 2차 세계대전(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함)에서 육군 '쫄병'이었다면, 한국에 나가면 장교가 됐을 것을, 그리고 해군사병으로 있었다면 한국에 나가서 해군참모장이 됐을 것을 왜 일본에 남아서 졸병이나 해군의 선원 노릇을 하고 있느냐고 비아냥대는 소리였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들은 우리 연락장교들이 해방 후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진학한 후 전쟁동안 연락장교로 복무하는 것을 보면서 열등감이 북받쳐 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를 보면 우쭐하고 무엇이든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는 것은 나도 경험한 바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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