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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외교사의 한 상징 ‘이승만-오리버’ 관계의 목격자가 되다
한미외교사의 한 상징 ‘이승만-오리버’ 관계의 목격자가 되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12.14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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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25) 애스베리대에서의 강의와 역사 공부7

오리버 박사(Robert.T.Oliver, 1909~2000)는 펜실베니아주립대의 스피치 학과 주임교수로서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망명생활을 했던 1940년대부터 그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박사의 연설문을 영문으로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문과 각종 주간지 또는 월간 잡지에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글을 많이 기고했다. 이승만 박사가 1948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추대됐을 때 오리버 박사는 홍보담당 고문으로 등용됐으며 이승만 박사 집권 12년 동안 그의 홍보고문으로서 모든 영문 스피치를 기초하고 작성한 스피치 박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의 대통령 임기 12년 동안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한국태평양출판사(Korea Pacific Press)를 창립하고 이승만 박사의 해외 홍보를 담당한 ‘로비스트’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해외공보관장이였던 셈이다. 그 당시에는 해외공보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 오리버 박사

로버트 T. 오리버 박사
나는 1953년에 켄터키주의 애스베리대에서 공부할 때 스피치 과목을 등록하고 스피치를 공부한 일이 있었다. 매주 <바이틀 스피치(Vital Speeches)>라는 격주간 간행물을 도서관에서 읽어야 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스피치를 종종 읽을 수 있었는데, 특히 3·1절 기념사, 혹은 8·15해방 기념사 등의 연설은 참으로 명연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한국말로 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스피치는 매우 더듬고 듣기가 민망할 정도로 잘못하는데 <바이틀 스피치>에 발표되는 영문 연설문은 매우 훌륭한 텍스트였다. 20여년이 지난 후 1980년대에 오리버 박사가 우리집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즉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스피치는 오리버 박사 자신이 미국에서 직접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승만 박사의 고문으로서 대한민국 초기의 한국의 홍보는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홍보에도 공헌이 많았다. 특히 미국의 언론과 지식인에게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홍보는 1950년대에 매우 활발히 전개됐으며 또 매우 효율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리버 박사와 같이 훌륭한 스피치 학자가 고문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스피치는 미국과 전세계의 지식층에게 전달되지 못 했을 것이다.

나의 아내 정현용의 부친 정태시 박사가 공주교육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세계교육자대회 (WCOTP)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돼 세계교육자대회에 매년 참석하곤 했다. 정태시 총장은 그 당시 미국교육자협회(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의 사무총장 윌리엄 카(William Car) 박사의 소개로 오리버 박사를 처음 만나게 됐고, 또 오랫동안 친교를 나누게 됐다. 이후 정태시 총장은 대한교련 사무총장을 지낼 때 오리버 박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현대웅변강화』를 집필, 1955년에 책으로 출판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스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민주사회일수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스피치 기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연설학 책이다.

정태시 선생은 한국의 미국식 스피치를 학술적으로 해설하는 책을 여러 권 출판했다. 또 영문서적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과정에서 펜실베니아주립대의 오리버 교수와 여러차례 서신교환을 하면서 지내다 세계교육자대회에서 윌리엄 카 박사의 소개로 오리버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정태시 선생은 오리버 교수와 영어 스피치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서로 생각이 상통하는 바 있었기 때문에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정태시 총장은 『새 시대의 연설』등 미국 스피치학의 이론과 스타일을 한국에 소개한 스피치학의 개척자 다.

코네티컷에서 만난 오리버로부터 들은 비화들

나의 둘째 처제(정명자)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니아주립대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의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오리버 박사의 지도하에 석사학위를 받고 학위논문을 쓴 일도 있다. 오리버 박사는 펜실베니아주립대에서 정년퇴임 한 후에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한국에도 종종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정년퇴임 후 부부동반으로 뉴잉글랜드의 스터브리지(Sturbridge)의 역사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 우리집에 와서 2박 3일 동안 우리와 함께 지냈다. 코네티컷주의 우리집에서 체류하는 동안 오리버 박사는 이승만 박사와 자기와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또 자유당정권 시대의 정치비화(Inside Story)를 몇 시간 동안 나에게 털어 놓기도 했다. 그는 그만큼 이승만 박사의 신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헌신적으로 이승만 박사를 미국사람들에게 알리고 그의 정치사상과 정책을 미국사람들에게 홍보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친 학자였다.

오리버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3·1절 스피치를 비롯하여 8·15 독립기념 스피치 등 이승만 대통령의 모든 스피치를 미국스피치학회가 발행하는 <바이틀 스피치>에 실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도 집필했다. 그는 1944년에 『Korea: Forgotten Nation(잊어버린 한국)』 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The Truth About Korea(한국에 관 한 진실)』을 출판했으며, 1952년에는 『Verdict in Korea(한국의 심판)』, 그리고 1960년에는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이승만-신화속의 사람)』이라는 이승만 박사의 전기를 집필했다.

오리버 박사의 이 책은 그와 이승만과의 관계가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두 사람의 인간적 관계가 한미관계의 한 상징임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오리버 박사가 부부동반으로 1985년 코네티컷 주의 우리집을 방문 했을 때, 그는 방문 기념으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이승만과 미국의 한국개입, 1942-1960』이라는 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책은 오리버와 이승반 박사와의 친분 관계를 한미관계의 측면에서 잘 설명한 책이다. 당시 그는 자신이 직접 친필사인을 한 책을 내게 주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책을 보유하고 있다. 그 책에 의하면 오리버 박사는 1942년에 미국 씨라큐스대에서 저널리즘과 홍보학 교수로 있을 때 이승만 박사를 워싱턴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 박사의 공중연설을 듣고 그에 대해 매혹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인품이 매우 온화하고 또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고 느꼈으며, 언젠가는 한국사람들의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워싱턴에 한국위원회(Korea Commission)를 설립하게 된 것도 그런 이승만 박사의 설득이 작용했다. 한국위원회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의 허점과 국민의 탄압을 물리치고 한국 독립을 궁극의 목표로 홍보하고 있었다. 독립적이고 애국적인 이 운동을 미국의회인 상원과 하원 그리고 미국 연방정부에 자세하게 알려주고 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오리버 박사의 로비활동이 시작됐다.

이렇듯 오리버 박사는 자기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12년간(1942~1960)의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한미외교역사와 연결시켜서 매우 상세하게 이 책에 설명해 놓았다. 때문에 한미관계 속에서의 이승만 대통령과 오리버 고문 사이의 두터운 우정과 인간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명한 책이라고 말 할 수 있다(이 책은 1978년 서울의 판문서점에서 영문으로 출판됐다).

나는 오리버 박사와 2박 3일간 함께 식사도 하고 또 매사추세츠 스터브리지까지 운전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리버 박사가 왜 이승만 박사를 존경하게 됐는지, 또 헌신적으로 이 박사의 독립운동을 미국의 의회뿐만 아니라 미국의 일반사람들에게 널리 홍보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도 그와의 이런 만남을 통해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오리버와 같은 인물을 알게 되고 또 그에게 미국의 홍보를 전적으로 맡긴 것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오리버 박사의 인간관계는 한미관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조우가 남긴 과제들

내가 미국유학을 위해 한국을 떠난 지 반세기가 훨씬 넘은 세월이 흘렀다. 지난 60년 동안 나는 항상 공부하는 마음으로 미국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유학생들의 학위논문을 지도했다. 나는 국제정치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중국과 일본을 연구하면서 내 인생을 살아왔다. 이 대통령의 훈시는 내가 미국유학 60년 동안 공부하면서 또 미국학생들에게 동아시아 정치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관계를 가르치면서 학문의 길을 달리고 있는 나에게는 “배우면 알고, 알면 미래가 보인다”는 좌우명이 됐다.

우리 유학생 몇 사람은 이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끝난 후 드레이크 호텔 커피숍에 모여서 서로 생각하고 있는 감상을 나눴다. 그리고 조국의 당면한 문제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토론도 했다. 이 대통령의 미국유학 시절의 일화부터 시작해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반대하고 반공포로를 석방시키고 미국과 외교마찰을 감수하면서도 미국 대통령을 상대해 싸우는 애국투사라는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우리는 이 박사가 미국유학시절 미국사람들에게 남긴 일화 등을 기억하면서 이 대통령의 미국유학 시절을 한번 되짚어 보았다.

우리들은 이승만 박사의 유학생시대의 미국상황과 1950년대 우리의 현실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변화한 것인지 비교하고 연구해 보기로 했다. 이 대통령의 애국적인 연설을 듣고 나서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이 대통령은 어떤 경로를 거쳐 미국유학생으로 오게 됐으며,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는지 한국의 현대역사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서로 나누면서 토론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우리 유학생들의 롤모델 (Role Model) 로 삼기 위해서는 그의 유학생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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