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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한인 유학생의 초상 … 선배들이 남긴 유산은?
1900년대 한인 유학생의 초상 … 선배들이 남긴 유산은?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1.24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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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1)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2

4·19 혁명과 뉴욕의 한인 유학생

1960년 4월 19일 한국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를 했다. 그것은 한 달 전 3월 15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졌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은 무효라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12년 동안 장기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은 영구집권을 하기 위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은 3월 선거후부터 산발적으로 부정선거에 항거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4·19 의거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번지기 시작했고 또 일반 주민들에게도 충격을 줬다. 자유당 정부는 드디어 경찰을 동원해 학생데모대에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총격으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다. 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자유와 정의 그리고 인권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한국 학생들의 희생적인 시위를 동조하는 미국의 한국인 유학생들은 그들의 호소를 멀리서 듣고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뉴욕에서 데모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한국 경찰의 무차별한 총격을 받고 희생된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또 총탄에 맞아 쓰러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뉴욕의 한국 유학생은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검은색 완장을 팔에 달고 한국학생의 생명은 귀중하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총을 쏘는 것을 중단하라! 한국학생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라!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는 구호들을 외치면서 데모를 했다.

뉴욕의 언론매체는 우리 유학생들의 시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50년 전 뉴욕 시에는 한국신문도 없었고, 방송매체도 없었다. 서울의 언론사에서 나와 있는 특파원은 한두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의 언론매체는 많은 관심을 갖고 한국인 유학생들의 정의로운 데모를 취재했다. 특히 ABC TV 방송은 그 당시 뉴욕지역 한국학생회 회장이었던 필자(콜럼비아대 대학원 재학)와 노재봉(뉴욕대 대학원 재학, 귀국 후에 국무총리 역임) 그리고 지연월 (뉴욕대 재학, 후에 노재봉과 결혼)을 불러 30분간의 TV 대담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하기로 했다. 한국의 정치현황과 한국의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이유 등 매우 심층적으로 토론이 진행됐다. 우리는 한국 학생들의 4·19 혁명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한국의 학생들이 정부의 인권탄압에 맞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한국사회의 사회정의를 바로잡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다 희생됐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시청자들에게 협조를 호소했다. 나는 뉴욕의 한국인 학생회장으로서 한국의 학생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미국언론에 호소했던 것이다.

한국 유학생들의 용기와 헌신

50여 년 전의 4·19혁명을 회고하면서 오늘날에 거듭 느끼는 것은 1960년의 뉴욕 한국인 유학생은 매우 용감했다는 사실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주UN한국대표부 앞에서 데모한다는 것은 곧 한국으로 추방당한다는 의미였다. 한국영사관에서 우리의 패스포트 (여권)를 연장해 주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유학생들의 여권은 매년 연장하게 돼 있었다. 그와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한국 학생데모에 참가해 한국 학생들의 희생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었다는 것은 참으로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학생들 특히 4·19 학생운동을 시작한 혁명 세대는 한국의 사회정의를 위해서 또 한국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참으로 용감하게 싸웠다. 한국 학생들의 희생적인 투쟁과 뉴욕 한국인 유학생들의 용감한 행동의 결과로 이승만 박사의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다. 바로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의 기류 속에서 ‘뉴욕한인회’가 1960년 5월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뉴욕에는 영주권을 받고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20여명 남짓했다. 특히 유학생들이 한인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므로 뉴욕에서 ‘한인회’를 창립하기 위해서는 뉴욕학생회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했다. 나는 뉴욕에 정착해 살고 있는 원로 한인 몇 사람이 뉴욕한인회를 조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뉴욕한인회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1965년 미국 이민법의 개정과 미국의 민권운동의 결과로 한국인의 이민자수도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의 뉴욕에도 한국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뉴욕의 한국인 이민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유학생의 수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의 한국학생회의 존재도 유명무실해졌다. 그리하여 뉴욕학생회는 1969년에 종막을 내리고 뉴욕한인회로 흡수되고 말았다. 서기 2000년대의 뉴욕에는 30만의 한민족이 살고 있으며 수백 종의 자영업체들이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1950년대의 한국유학생들이 희생적으로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자부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유학생의 역사를 한번 검토해 보는 것도 美洲 韓人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의 역사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2세와 3세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역사적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관비 유학생 유길준과 미국 유학생의 역사

미국에 한국 유학생이 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역사는 매우 길다. 미국의 한국 유학생의 역사는 한미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에 유학하러온 최초의 유학생은 한말의 개화파인 청년 유길준이었다. 그는 1883년 9월, 최초의 渡美 遣美使節團인 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에 발을 디뎠다(兪東濬,『兪吉濬傳』, 그리고 앞서 인용했던 조종무의『아메리카 대륙의 韓人風雲兒들』(상) 참조).

 

그 당시의 보빙사 단원은 전권대신에 민영익, 副대신에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홍택, 최경석 등 11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들은 뉴욕에서 아더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편지를 전한 후, 미국의 각지를 돌아보고 2개월 뒤에 귀국할 때, 유길준을 남겨놓고 돌아갔다. 전권대사였던 正使 민영익은 귀국하면서 미국 국무부에 부탁해 유길준을 유학시키도록 주선하고 한국에 돌아가서 관비로 학자금을 보내 주기로 했다. 그는 이렇게 서양에 유학 온 최초의 관비 유학생이 됐다.

당시 유길준의 나이는 27세였으며, 5년간 미국에서 공부하기로 돼 있었다. E.S. 모스라는 교사에게 8개월간 영어 지도를 받은 뒤 1884년에 메사추세스洲 바이필드에 있는 명문고교 더머 아카데미(Dumar Academy) 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불과 4개월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자주적 개혁을 위해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한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개화당이 파멸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유길준은 미국에 온지 1년 6개월 만에 대서양을 건너서, 유럽을 둘러본 후 한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자마자 연금상태가 됐다(편집자주: 역사학자 이광린은 이 부분과 관련, “4개월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체포돼 처음에는 포도대장 韓圭卨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유길준이 귀국한데 반해,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개화당 지도자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김옥균을 제외한 3명은 곧바로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상선 ‘차이나’호를 타고 1885년 4월 하순경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박영효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서재필, 서광범 두 사람만 미국에 남게 됐다. 그 뒤 서광범은 언더우드 목사의 형이 보낸 여비로 뉴욕에 가서 뉴저지주의 럿거스주립대(Rutgers State University)에 입학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조카인 서재필은 혼자 처져 있다가 그해 여름에 미국인 實業家를 만나 펜실베이니아洲 와이키 베러시에 있는 헤리 힐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열심히 공부하고 미국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많이 알게 됐다.

서재필은 4년 과정을 3년 만에 끝마치고 미국시민으로 귀화했으며 1888년에는 라파에트 대학(Lafayete College) 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의학에 흥미를 보여 1889년 워싱턴에 있는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가필드 병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서재필이 대학을 다닐 당시, 조지아주 에모리대(Emory University)에는 윤치호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윤치호는 1893년에 에모리대를 마치고 귀국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1898년에 도미해 유학한 이화학당 출신인 박 에스더는 볼티모어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가 돼 1900년에 귀국했다. 1905년에 일본과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 있기 이전에는 뜻 있는 한국 청년 학생들이 미국으로 유학했는데 그들 중에는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이 있었다. 나는 반세기 이전인 1900년대에 미국유학의 길을 밟은 그들의 경험을 통해 1950년대의 우리 젊은 세대는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면서 그들의 경험담을 읽어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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