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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학위 예비시험준비
잊을 수 없는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학위 예비시험준비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3.16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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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8)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9

나는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서 허드슨(Hudson River) 강변에 있는 리버사이드 드리아브옆의 인도(길)을 따라 30분 내지 한 시간 정도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한 후 아침식사를 끝내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콜럼비아대 도서관에 매일 출근했다. 아내 정현용은 자원봉사자가 돼 출근해 교수님들의 4~5세 된 취학 이전의 자녀를 돌보아주는 일을 했다.

법과대학 도서관에서 공부에 몰두

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에 200~300쪽의 학술 서적을 소화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책이든 처음 한두 장(Chapter)은 매우 힘들게 읽게 되지만 저자의 스타일과 논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독서의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교재는 하루에 한권정도 읽을 수 있었지만 이론서적은 시간이 두 배나 더 걸린다. 그래서 하루 8~10시간을 독서에 몰두하고 나면 저녁식사 후에는 오락 프로그램을 찾아서 피로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텔레비전을 보든가 아니면 콜럼비아대 근처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다. 때마침 舊소련(러시아)과 미국 사이에 문화교류 협정이 1959년에 체결됨으로서 소련의 영화가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한 달에 한 두 편의 외국 영화를 감상하면서 독서로 지친 머리를 식혀야 다음 주에도 책을 몇 권씩 독파할 수 있었다.

콜럼비아대 로스쿨 버틀러 도서관의 야경. 김일평 교수는 이 대학 법과대 도서관에서 하루 10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박사학위시험에 대비했다.

3개월 동안 문을 닫아걸고 머리띠를 바짝 조이고 책상 앞에 앉아서 독서한 결과 1963년 10월에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보기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전공과목으로는 미국정치, 소련정치, 중국정치로 결정하고, 소련정치는 해자드(John N. Hazrd) 교수, 중국정치는 도크 바네트(A. Doak Barnett) 교수, 미국정치는 사무엘 헌틴텅(Samuel P. Huntington) 교수를 주심으로 모셨다. 부심에는 국제정치 분야의 소련 외교정책은 아랙스 달린(Alexander Dallin) 교수 , 동아시아(일본과 중국) 외교정책은 제임스 몰리(James W. Morley) 교수를 모셨다. 다섯 명의 교수가 한자리에 모여서 두 시간 동안 질문을 하면 나는 책에서 읽은 저자들의 견해를 요약해 대답했다. 질문 가운데 가장 답하기 난처한 것은, 그러면 너의 견해는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왜냐 하면 한국에서 받은 교육은 암기식 주입 교육이어서, 한 권의 책을 읽고 역사적 사실만 암기하는 방식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암기식 공부는 저자의 견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적극적으로 제시하기가 어렵다. 사고훈련과 비판훈련이 빈약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자의 이론을 비판하는 능력은 매우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면 옆의 주임 교수는 자기 자신의 견해는 없냐고 물어본다. 과연 내가 독서를 하면서 내 자신이 좀더 비판적인 생각(Critical Thinking)을 기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5명의 심사 교수들 앞에서

두 시간 이상의 질문을 받고나니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이 아프고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그리고 주임교수가 문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면 교수님들이 서로 상의해서 합격과 낙제를 판결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합격하지 못하면 일 년 뒤에 다시 한 번 종합시험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가서 그랜 페이지 교수와 함께 연구교수(Research Associate) 생활을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하와이로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니까 낙제가 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바네트 교수가 들어오라고 나를 불렀다. 그가 5명의 시험관 교수님 앞에서 합격했다고 발표하는 순간, 나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며 마구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목매인 목소리로 고맙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시험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달음박질 하듯이 막 뛰어서 집으로 달려왔다. 나의 처 현용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합격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우리는 서로 얼싸안았다. 마침내 학자로서의 첫 검증을 마쳤다는 기쁨과 그동안 박사학위 준비에 쏟아 부었던 시간들, 아내의 정성어린 돌봄, 여러 가지 사건과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때의 그 감개무량한 감정을 나누며 매우 기뻐했던 심정은 지금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훗날 한국정부의 외무장관을 지낸 이 아무개 씨도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과정을 공부하다가 낙방하는 바람에 영국 옥스퍼드대로 갔으며, 또 누구누구도 박사학위 종합시험에서 낙방해 뉴욕을 떠났다는 소문이 자자할 때였다. 어찌나 감개무량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하와이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콜럼비아 대학원의 박사학위과정 최종 종합시험(General Examination)이 10월 초에 잡혀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의 고급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 at East-West Center)의 소장에게 편지를 보내고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10월초에 치른 후 11월초부터 근무를 시작하겠다고 전했다. 와이드너 소장은 이런 나의 사정을 이해하고 승낙의 회답을 보내왔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콜럼비아대 법과대학 도서관에는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저녁 6시에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러니 점심식사 한 시간을 빼고 매일 8시간동안 책을 읽었다. 콜럼비아대 법과대학의 도서관을 많이 이용한 것은 순전히 이곳이 새로 지은 건물이라 냉방 시설이 매우 잘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처 현용은 콜럼비아대 부근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시작했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어회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침 7시 반에 아파트를 떠나서 저녁 6시경에 다시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날의 뉴스를 캣취업(catch up)한다. 그리고 저녁뉴스를 보고 또 역사적인 다큐멘터리가 있으면 보고 잔다. 그와 같은 생활을 5~6개월 동안 매일 거듭한 후 나는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 예비시험을 패스했다. 박사학위 예비시험은 처음에 실패한 사람은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었는데 일년 이상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와이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처음 시험에 합격한 것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었다.

박사논문 준비 중에 찾아온 새로운 인연

(회고록 28회차에 잠깐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환기하고자 한다.) 내가 1962년에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전부 합격하고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새로운 인연의 한 끈이 조심스레 맺어지기 시작했다. 프린스턴대에서 한국전쟁의 정책결정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을 끝마치고 미국에서 한국학을 개발하고자 매우 열정적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나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는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가 창립됐는데 자신은 1년간 개발정치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참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내가 박사학위 예비시험에 합격한 후 자기와 함께 하와이에 가서 개발행정에 대한 세미나에도 참여하고 또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이니 함께 하와이로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나는 매우 흥분했다. 미국에 와서 처음 학계에 직장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집에 가서 나의 처와 상의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후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달려왔다.

당시 우리는 허드슨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400번지에 살고 있었다. 허드슨 강과, 허드슨 리버사이트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허드슨 리버사이트 파크 크리스토퍼가의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Riverside Drive) 400 번지였다. 8층에 살았기 때문에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허드슨 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리버사이드 파크(강변공원)는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강변공원에는 벽에 대고 정구연습을 할 수 있는 오락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이와 같이 좋은 환경을 버리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솔직히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와 상의하며 대화를 나눈 결과, 우리는 하나의 모험이기는 하지만 또 미래의 도약을 위해 모험 삼아 하와이로 점프해(도약)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나는 떠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모아온 책은 200여 권이 넘었기 때문에 우선 책을 상자에 넣어서 하나씩 묶으면 적어도 15 내지 20 상자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한 후 장만해서 사용하던 가구도 누구에게 빌려 주든가 아니면 창고에 보관하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뉴욕 총영사로 부임해 오신 장재용 총영사님은 나의 고등학교시절의 은사였기 때문에 나의 모든 짐을 뉴욕총영사관 지하실 창고에 보관해도 좋다는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영사관의 현지 채용 직원을 시켜서 승용차로 짐을 나르고 또 보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1963년 10월말에 하와이로 출발 했다. 나의 처 정현용은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라 하와이에 정착하는 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나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역사에 흥미 보였던 프랭크 볼드윈

내가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 에피소드 하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위해 미국정부가 지급하는 ‘지 아이 빌(GI Bill)’이라는 장학금이 있었다. 그 장학금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만 제공하는 장학금이다. 그 장학금을 받으면서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한국역사를 전공하겠다는 미국 학생을 한 명 만난 일이 있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한국역사의 사적지를 다 찾아다니고 한국의 역사유물은 다 관광해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역사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한국 사람들보다 한국의 역사유적을 더 많이 탐방해 보았기 때문에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 유학생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박사학위 논문은 3·1운동을 주제로 썼다. 한국의 현대사를 전공한 것이다.

우리 한국학생들은 전쟁에 시달리고 또 전쟁 후 수복된 서울에서 일상생활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느라고 여행할 시간의 여유도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학생도 역사의 유적지를 탐방할 생각보다 외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그들 젊은 학생들의 꿈이었다. 우리의 것을 찾고 우리의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책을 읽고 역사사실을 암기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역사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역사공부도 많이 했다.

그러나 요사이 젊은 세대는 역사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케케묵은 역사는 무엇 때문에 왜 배우냐고 반문한다. 유학생들에게 역사시험도 필수 과목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암기하는 과목이라고 인식돼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 나는 대학시절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미국의 대학에서는 미국역사를 많이 공부했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역사를 모른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가서 미국외교사와 미국정치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이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피력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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