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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벙커 속에 잠들다 박격포탄 세례 받기도
미군 벙커 속에 잠들다 박격포탄 세례 받기도
  • 김일평 코넷티켓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7.28 17: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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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11)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3

우리 연락장교들은 6·25전쟁에 참전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국군에 희생적으로 공헌한 데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앞서 서술했듯, 우리는 6·25 전쟁 직전에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다가 한국전쟁이 발생했을 때 자원해서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후 연락장교로 임관된 장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한국군에 복무하는 인텔리(지식인)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과 장교들 중에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일본군에 사병으로 나가서 '대동아전쟁'(1941~1945)에 참전한 장교도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사병으로 징집됐다가 나라가 해방됐을 때 한국 국방경비대에 편입돼 장교가 되고 장군이 된 소박한 장성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전쟁 때문에 속성으로 진급의 진급을 거듭해 3개월 혹은 6개월마다 별 하나씩 달고 장성으로 승진한 장군도 있었다.

또 매년 진급해 별을 하나씩 달은 장군도 있다고 들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연락장교들을 대학을 졸업한 한국사회의 엘리트라고 보면서도, 열등감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학식이 부족한 자신을 위장해 보려고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장교로 임관된 것이 곧 대학을 졸업한 것과 동등한 학벌을 갖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교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오만불손한 행동을 하는 매우 무식한 장교도 있었다. (연재 9회분 참고) 미국 군인들이 쓴 한국전쟁에 대한 소설이나 학술서적에는 주로 미국군의 이야기가 많지만 한국군에 대한 코멘트도 더러 있다. 한국군 장성들이 너무나도 무식하고 훈련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내용들이 기록돼 있다.

전장에서 겪은 한미 장성들과 장교들의 경륜 차이

우리 연락장교들은 6·25 전쟁 당시의 미국군 장교와 한국군 장성들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한국군의 장성급 장교를 미국군 장교의 전쟁경험과 연륜으로 비교해 볼 때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 장군은 미국의 위관급 장교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언론인도 있었다. 지식과 기술뿐만 아니라 연륜이나 경륜에 있어서도 미군장교들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매우 열등한 장군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군 군단장(중장) 고문에는 미군 중령 내지 대령, 한국군 사단장 고문에는 미군 소령 정도의 연륜과 지식을 갖춘 이들이 배치됐을 정도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 한국군에도 4년제 육군사관학교(육사 제11기생부터)를 졸업한 한국 장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과 앞 세대 장교들의 교육수준은 천양지판이다. 한국의 육해공군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원에 진학해 전문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은 장교들이 한국 육해공군 사관학교에 배속돼 교관으로 교육에 참여한 이들이 많이 있다. 60년 전 6·25 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장교와 1990년대의 한국군 육사출신 장교들의 수준을 비교해 볼 때 그 수준은 천양지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군에 징집됐던 한국군 장교 혹은 일본 사병으로 복무한 군인들은 해방후 한국군 창설에 크게 공헌했다. 그 반면에 만주군 출신 중 급속도로 진급한 장교들 중에는 한국군 국방경비대 시절 장교가 되고, 한국전쟁 중 장군으로 급속 진급한 장군들 중에는 장군의 자격이 없는 장군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육군 제2군단 사령관을 역임한 유재흥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년제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창립에 크게 공헌했고 또 우리 통역장교들의 존경을 많이 받은 장군이었다.

한국 국방경비대가 1948년에 창설됐을 때부터 한국군 사령부에는 미군 고문단이 배치됐다. 다드 중령이 100부대 창립당시에 고문단장으로 임명됐다. 다드 중령은 벤플리트 장군이 그리스(희랍)에서 게릴라 토벌작전을 지휘 할 때 대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벤플리트 장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지리산 공비소탕전에서 또 한번 공훈을 세울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후 다드 중령은 벤플리트 대장의 추천으로 대령으로 승진했다.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은 그다지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공비토벌 작전은 4~5개월 이어졌다. 토벌작전을 끝낸 후 우리「육군100부대」는 제2군단 창설을 위해 1951년 3월 남원을 출발해 강원도 화천군 북방의 천전리(泉田里)로 이동했다.

미군 제9군단은 철원 후방에 있었다. 우리는 미군 9군단에서 군단의 조직과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백선엽(白善燁) 군단장을 비롯해 김점곤(金點坤) 참모장, 인사, 정보, 작전, 군수 참모 등 각 부처의 참모는 물론 副참모 등 50여명 이상의 제2군단요원들이 미군 제9군단사령부의 참모들과 요원들의 강의를 듣고, 군단참모들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미국참모들이 각 부처의 기능과 역할을 설명했는데, 이들이 영어로 강의를 하면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어로 통역을 했다. 한국군의 영관급 참모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듣고 회화는 더욱 어려워했기 때문에 동시통역이 필요했다.

연락장교들, 육군2군단 창설에 공헌하기도

그리고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육군 제2군단을 창설하는데 동참해 공훈도 많이 세웠다.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나는 한국군 제2군단에 복무했다. 이 시절의 경험은 우리 한국군대와 미국군대를 비교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미군 제9군단에서 미군 참모들이 각 부처의 역할을 영어로 설명하면 우리 연락장교는 그들의 강의 노트를 미리 받아서 밤새도록 번역하고 다음날 미군참모의 카운터 파트와 같이 한국어로 한국군 참모들에게 통역을 하곤 했다.

한국의 문필가들 중에는 외국어 작품번역이 창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또 창의력이 풍부해야만 훌륭한 번역작품이 나온다고 역설하는 작가도 있다. 다시 말하면 번역은 창작과 똑 같으니 창조적인 능력이 필요하며, 정신 차리고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작고한 리영희 교수(한양대)도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육군 소령에 진급하고 퇴역한 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의 교수로 재직했던 '연락장굑' 출신이다. 미군 제9군단 참모들의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한국군 제2군단은 강원도 화천 북방에 있는 천전리 소도고미에다 제2군단 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는 제2군단 정보처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적정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분석한 후 매일 아침 브리핑을 하는 정보처 (G-2)의 브리핑 장교로 복무했다.

우리 한국군 제2군단 산하부대인 6사단, 8사단, 수도사단 등 3개 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전방을 교대하기 시작했다. 우리 연락장교는 최전방에 배치돼 미군 중대본부에서 적정상황을 브리핑 받은 후 임무를 교대했다. 나는 미군 제45사단의 최전방의 중대장 벙커(참호)에서 하룻밤을 미국 중대장과 함께 지내면서 미군과 한국군의 교대를 도운 일이 있다. 미군 제45사단의 중대본부에는 대위가 참호 속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대장의 참호에서 함께 지낸 것이다. 마침 야전 침대가 있었기 때문에 잠은 잘 수 있었다. 나는 군복은 벗어놓고 내복만 입은 채로 침대에 들어갔다. 내가 잠이 들 무렵, 새로 배치될 중대의 중대장이 찾아와서 미군 중대장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리노이 주의 시골 고등학교 선생 출신들로 예비역 장교로 있다가 한국전쟁이 나서 소집명령을 받고 현역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전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와이담(섹스에 관한 일본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잠이 들까 말까 하던 중에 나는 귀를 기울이며 그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그렇게 얼마동안 두 중대장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느닷없이 적군이 쏜 포탄이 벙커 옆에서 폭발했다는 급전이 날아들었다.

최전방 벙커에서 한밤중에 포탄 공격 받아

두 미군 중대장은 기겁을 하고 전투모를 뒤집어쓰고 뛰쳐나가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중대의 모든 대원은 완전 무장을 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나도 일어나서 전투복을 입고 전투 준비를 했다. 다행히 북쪽의 박격포 포격은 잠시 뒤 멈췄다. 다시 조용한 밤이 됐다. 그리고 미군 대위는 옆의 침대에서 자고 나는 다른 야전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미군들이 먹는 C레이션으로 벙커 속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또 물을 끓이고 봉투에 든 가루 커피도 타 마셨다. 한국군 중대가 미군 중대를 교체한 후, 한국군 중대장이 미군 중대장의 참호(벙커)에서 임무 교대해 지휘하는 것을 지켜 본 뒤, 나는 다시 제2군단 본부로 돌아 왔다. 이것이 내가 휴전협정 직전에 최전방에서 겪은 아슬아슬한 전쟁 경험의 하나라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남북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이 대구의 낙동강 전선까지 처내려왔지만, 미군과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해 38선 이북까지 진격하는 전세의 변동이 이어졌다. 1950년 가을 국군과 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평북 초산까지 전진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1951년 10월 중공군(중국에서는 중국인민의용군이라고 함)이 개입해 한국군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강원도 원주까지 점령했다. 내가 살던 원주는 잿더미로 변했다.

한국동란때 피난가지 못하고 원주에 남아서 원주에 진격한 중공군을 보고 또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미군(UN군)이 원주에 들어온 것을 볼 수 있었다는, 전쟁의 참상을 진술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원주에서 치른 전쟁 경험을 책으로 낸 콜먼 중사는 미군 187 연대에 소속돼 있었으며 미군이 원주에서 중공군에 공격당한 경험을 『원주(Wonju: 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by J. D. Coleman, 2003)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한국전쟁에 관한 미국학자와 지식층의 역사적 인식에 관한 책으로는『한국전쟁에 관한 미국의 인식』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는 대구에서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하고 군사훈련을 마친 후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지리산 공비소탕 전투 사령부에 배치돼 군수참모실에서 복무했다. 이후 100부대에 배속돼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저수지 북방의 소도고미에 주둔했을 때 나는 100부대의 정보처 (G-2)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적정상황을 분석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조회후 브리핑을 담당했다. 6·25 전쟁 중 매일 아침 조회에는 브리핑 시간이 따로 있었다. 나는 조회시간 한시간 전에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정보처 상황실에 가서 정보처의 야간근무 장교와 상의한 후 그날 군단조회 때 적정상황을 보고 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미군의 고문당장을 비롯해 각 부처에 배속된 미군 고문단도 다 함께 조회 브리핑에 참석한다. 우리 정보처(G-2)의 미군고문은 윌리엄 이너스(William F. Enos) 소령이 고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미군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이다. 미군장교들 사이에서도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는 엘리트라고 존경받는다. 6·25 전쟁 당시 한국에 파견된 미군 장교들의 대부분은 예비역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엘리트 장교로 명성이 매우 높았던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도 대거 참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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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옥 2012-08-12 11:57:31
김일평교수님의 회고록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한 가지 의견은 6.25전쟁 관련 군 내용입니다. 육군 제2군단 창설은 1950년 7월 15일 경북 함창중고등학교에서 했으며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2군단이 해체되었다가 1951년 3월 재창설되었음으로 '재창설'이라는 용어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