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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밝혀준 등불 … 인생의 초석을 다지다
한 사람의 삶이 밝혀준 등불 … 인생의 초석을 다지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4.25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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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4) 영어공부반의 재원들

레어드 선교사는 1948년 겨울방학 동안 기독교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원주시내의 고등학생들을 위해 영어 회화 반을 열었다. 그것은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이 '羅 선생'에게 겨울 방학동안 영어 회화를 가르치도록 설득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영어회화 선생님이 됐던 것이다. 이 인연은 내가 나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엄청난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반은 20여명의 학생이 모여서 시작했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뒤 학생 수는 7~8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 당시 '羅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운 우리 영어반에는 훗날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조성규 박사,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거쳐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UNESCO) 본부 교육담당 전문가가 된 원창훈 선생,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사회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10년간 가르친 후 다시 보스턴대로 돌아와서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정재식 박사,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된 이상훈 박사,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사회사업박사를 받고 세계아동복지기구(UNICEF) 에서 봉사한 후 경남 김해의 인제대 총장이 된 이윤구 박사, 앨라바마 주립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코네티컷州에 있는 사립대학 브리지포트 대(Bridgeport University)의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최규언 박사 등이 있었다.

또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에는 대한교육총연합회(교총) 사무총장을 역임한 후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하신 정태시 박사,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은 후 뉴저지주립대, 럿트거스대(Rutgers State University)의 교수를 거쳐 美 교육부의 국장급 간부로 봉사한 송동수 박사, 뉴욕 총영사관의 3대 총영사로 있다가 에티오피아 대사와 스페인 대사를 역임한 장재용 선생, 그리고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교수를 역임한 김기순 선생 등이 있었다.

레어드 선생의 한국봉사 50여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기『기독교의 여인- 미스 레어드 (Miss Esther Laird, A Christian Lady)』(2000)에 수록된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한 정태시 박사의 헌시는 레어드 선생의 한 평생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114번지 '원주 제일감리교회' 앞뜰에 세운 '미스 레어드를 위한 기념비'에는 "1983년 추수감사절에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님을 사랑한 친우 일동"이라고 쓰여 있다. 필자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것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나애시덕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작은 마음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주의 한 친구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나 선생님의 기념비는 나 선생님이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깊은 사랑의 표시다. 레어드 선생의 기념비 뒷면에는 1946년 강원도 원주의 나 선생님 댁에서 영어회화를 배운 정태시 박사, 신숙철 여사, 장재용 선생 내외, 김기순 선생,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 영어회화반의 조성규 박사와 홍순범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1926년 이 땅에 오신 나 선생님을 기림

젖 없는 아이 찾아서 밤새며 키우시고

깊은 병 앓는 이들 몸소 간호하셨고

길 잃은 젊은이들 꿈도 펴게 하시고

고달픈 이 쉴 집도 여럿 세우셨으니

크고도 따뜻하였어라 당신의 손길 당신

 

스스로는 병도 나이도 잊으신 채

한결같이 일에만 열중 하시더니

아아, 이 곳 다시 못 오시고 끝내 가셨고녀

주님의 십자가를 늘 지신 당신의 뜻

사랑의 밀알 되어 이 땅을 채우리라.

-정태시, 「헌시」

 

앞줄 왼편에서 이창호 장로, 두번째가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사모, 뒷줄 오른편에서 신숙철, 정태시 선생 사모님, 함재영, 조성규 선생 부인, 홍순범 선생, 장재용 선생, 김기순 선생, 채호석 선생, 맨 끝의 8번째가 조성규 선생

레어드 선생과 까까머리 우리 고등학생의 인연은 매우 작은 것이었지만, 우리들은'羅 선생'을 통해 해방직후부터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후 매우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에서 우리 청소년이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하겠다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레어드 선생의 영어교육 덕택이었다.

나는 1947년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8년 겨울 방학동안 레어드 선생은 원주 기독교사회관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셨다. 우리 영어회화 반에서는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에서 뽑은 이야기(Tales from the Shakespeares, by Charles Lamb)』를 교재로 사용했다. 그것은 레어드 선생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이 결정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영어 교과서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그 교재를 매일 한 장씩 읽고 오전 8시에 영어회화를 시작했다. 그 책을 우리의 교재로 선택한 것은 해방 직후 유행처럼 많이 사용되고 있는 책이기도 했지만, 한국학생들은 셰익스피어를 읽어야만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羅 선생은 "고전을 무조건 외우는 식의 공부는 영어 회화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어려운 책을 외우기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영어 단어를 많이 기억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은 집에서 읽기로 하고, 질문할 내용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이 있으면 회화반에서 영어로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실용적인 회화반으로 바꾸었다. 羅 선생님은 미국의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미국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 교과서를 구해서 우리 영어회화의 교재로 사용했다. 미국의 고등하교에서 사용하는 텍스트를 매일 한 장씩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머리 속에 요약해 두었다가 다음 날 회화반에서 회화체로 바꾸어서 그 내용을 자신의 영어로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요사이 말 하는 이른바 회화식 잉글리쉬(Conversational English)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에 대한 전기는 두 종이 출판되었다. 하나는 『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인데 최종수 목사가 저술하고, 한국기독교연구소가 2000년에 출판했다. 영어로는 Life and Works of Ester J. Laird(by Rev. Asbury Jongsoo Choe, D. Min., Korean Institute of the Christian Studies, 2000)이다. 그리고 또 한 권은 『그리스도인의 여인- 미스 에스터 레어드(Miss Esther Laird, A Christlike Lady)』이다. 전자는 좀 더 학술적인 책이고 후자는 대전 기독교종합 사회복지관 48년 역사로 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대전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의 48년의 역사이다.

해방된 한국에는 1945년부터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도했다.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와 장로교(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합하여) 선교사만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수십 개의 종파와 다른 종교를 합하여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각각 여러 종파를 대표하여 한국에 선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는 수십 개 종파가 공존하며 선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에는 서양의 천주교가 조선조 말인 1860년대에 들어와서 일찍 선교 사업을 시작했고, 이어 1903년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들어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연희전문학교 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또 세브란스병원 같은 현대적인 병원을 설립한 것이 기독교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우리 한국의 영어교육이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는 소식을 최근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나 60여년 전 우리가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 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 단어 몇 마디를 사용해 대화 즉 컨버세이션(Conversarion)을 나누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羅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실용영어는 우리 각자의 일생에 매우 긴요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중위로 임관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 주신 영어회화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나 선생님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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