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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과 학자의 길을 만든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기억
‘박사논문’과 학자의 길을 만든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기억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3.23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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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9)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10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니 60여 년 전의 일이다. 3년간의 격전이 끝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한국전쟁 3년 동안 모두 179만 명의 미국 군인이 참전했으며 이 가운데 4만여 명이 전사하고 실종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국의 대학원에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도 수십 편이 나왔고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서적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일반인을 위한 한국전쟁 수기와 회고록도 꽤나 출판됐다.

지난 2007년에 출판된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inter)』을 저술한 데이비드 할버스탐 (David Halberstam)은 월남전에 관한 책 『제일 훌륭하고 가장 총명한 사람들(The Best and Brightest)』이라는 책을 비롯해서 월남전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또 미국의 퓰리처 저널리즘상을 받은 원로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의 책 『가장 추웠던 겨울』의 서문에 썼다.

그는 6·25전쟁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2004년에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 휴가를 갔다. 그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었기 때문에 마이아미 시립 도서관에 가서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월남전쟁에 관한 책은 88권이나 찾아 볼 수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단 4권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는 책 서문에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

한국전쟁은 3년 동안(1950~1953)의 격전 후에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휴전상태에 있다. 반면 월남전은 10년(1965~1975)이나 넘게 미국이 직접 개입해 싸웠기 때문에 희생자도 많았고 또 참전용사의 숫자도 한국전쟁보다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25전쟁은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북한과 중공 그리고 미군과 유엔사령부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을 체결한 전쟁이었다. 미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반세기가 넘은 오늘까지 아직도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50여 년 동안 전쟁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언제 또 전쟁이 발생할지 모르는, 끝나지 않은 전쟁인 것이다.

그 반면에 월남전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으며, 따라서 미군은 월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월맹은 남북통일을 이룬, 종료된 전쟁이다. 미국역사에서 미군이 외국전쟁에 개입해 참패를 당한 것은 월남전이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한국전쟁은 냉전의 전초역할을 하게 됐으며, 냉전은 20세기 후반에 거의 반세기가 넘게 지속됐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을 비교하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교하는 강의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미국학생들은 월남전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회고록의 앞부분에 밝혔듯이 나는 한국육군 연락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3년 동안 복무했기 때문에 6·25전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또 학술연구의 구상도 많이 해 보았다. 1957년에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나는 한국전쟁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쓰겠노라고 나의 지도교수에게 말한 일이 있다. 주임교수는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육군장교라는 나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며, 또 한국전쟁에 관한 정부의 비밀문서가 아직 개방되지 않아 박사학위 논문을 쓸 만한 자료를 확보하기도 어려우니 좀 더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는 대신 한반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정치에 관한 연구가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그리하여 나는 중공의 정치체제와 소련의 대북한정책 그리고 미국의 대 한반도정책에 관한 비교연구를 할 수 있는 기초연구를 대학원에서 시작한 것이다. 주임교수의 충고는 50여 년이 지난 오늘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으나 아직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연구’로 첫 북한 관련 논문 발표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는 석사학위 과정을 모두 끝마치면 박사학위 후보자가 되기 위해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도록 돼 있다. 석사학위 과정의 일환으로 나는 공산권 연구에 관한 대학원 세미나에 등록했다. 동아시아 문제는 제임스 모레이(James Morley) 교수, 소련과 동구권은 헨리 로버트(Henry Roberts) 교수, 중국문제는 마틴 윌버(Martin Wilur) 교수가 함께 지도를 했다. 박사학위과정의 코스워크를 끝마치고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5~6명이 함께 등록했다. 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와 논문테마를 결정하고 매주 2시간 정도의 발표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1948년 조선노동당전당대회 모습. 김일평 교수는 북한 노동당 제4차 전당대회를 테마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이 그의 학자적 길을 다지게 됐다.

 

그 당시 북한의 제4차 노동당 대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모레이 교수는 북한 노동당의 제4차 전당대회에 관한 세미나 페이퍼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나는 공산권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으로서 한번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북한노동당의 제4차 전당대회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콜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 (East Asian Library)에는 주로 중국, 일본, 한국에 관한 영어로 된 책은 물론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로 된 책과 신문잡지 등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었다. 북한의 제4차 노동당대회에 관한 자료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 <노동신문>과 북한 정부의 <민주조선> 그리고 조선노동당의 이론 월간지인 <근로자>를 읽어서 기초자료로 삼았다. 또 일본에서 발행되는 북한관계 자료를 수집해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자료를 수집하고 읽고 분석함으로써 나의 석사학위 논문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 논문심사 위원회에서 모레이 교수는 석사학위 논문의 한 장을 수정 보완해서 아시아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태평양 문제(Pacific Affairs-an International Review of Asia and Pacific Affairs)>라는 학술지에 기고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나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한 장을 뽑아서 <태평양 문제>라는 계간 학술지에 보냈던 것이다. <태평양 문제> 라는 학술지는 1928년부터 뉴욕에 있는 태평양외교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서 1년에 4회발행한 학술지다. 미국의 학술연구는 주로 유럽을 중심적으로 연구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동아시아 와 태평양 지역의 정치와 역사까지 연구하게 됐다.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힘을 모아서 ‘태평양문제연구소’라는 학술단체를 조직하고 학술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태평양 문제>였다.

<태평양 문제>라는 학술지의 주필 겸 편집인 윌리암 홀랜드(William Holland) 교수는 내 논문을 한번 읽어본 후 수정할 부분과 보완할 부분을 지적하며 한 달 이내에 수정 보완해 보내달라는 서신을 보내 왔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친구와 함께 나의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해서 다시 보냈다. 1962년에 발행된 <태평양 문제>지에는 나의 논문 「북한의 제4차 당대회(North Korea’s Fourth Party Congress)」라는 논문이 수록돼 있다. 어찌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한국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영문 학술지에 북한에 관한 학술논문을 발표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모든 한인학생들은 물론이고 한국정부의 외교관들까지 나의 학술논문을 다 읽어보았다고 말했다. 북한에 관한 학술 논문이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미국 학계에 발표된 것이다.

 <태평양문제>와 <계간 중국>에 잇따라 논문 발표

영국 런던의 문화자유협의회(Congress of Cultural Freedom)가 편집하고, 런던대의 아프리카-동양학 대학원(School of Africa and Oriental Studies of London University)에서 발행 되는 학술지 <계간 중국(The China Quarterly)>의 편집장이었던 로더릭 맥파쿠어 (Roderick MacFarquha)는 내게 편지를 보내어 <태평양 문제>에 기고한 「북한의 제4차 당대회」를 매우 흥미 있게 잘 읽었으며, <계간 중국>에서 1962년에 북한에 대한 특집을 출판할 계획이 있는데 기고할 수 있겠냐고 문의해 왔다.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 교수도 기고할 것이며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스칼라피노 교수가 특집의 편집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도교수와 상의한 후 북한의 행정제도에 대해 세미나 페이퍼를 쓰고 있으니 기고하겠다고 회신했다. 그리하여 나의 두 번째 논문 「북한의 행정과 사법구조(Administrative and Judicial Structure in North Korea)」를 저명 학술지에 기고할 수 있었다.「북한의 제4차 당대회와 북한의 행정구조」는 나의 석사학위 논문의 일부라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미국의 학계에서는 인간관계보다는 자기의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를 계기로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계간 중국>과 <태평양 문제>. 이 두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김일평 교수는 학자로서 길을 확신하게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 교수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개최되는 개발행정 세미나에 나를 초빙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논문이 발표된 무렵의 일이었다. 두 번째 논문은 인디애나 대의 씨핀 교수가 읽어보고 정치학과장 라베스 교수에게 나를 추천해 내가 조교수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사학위 논문은 좀 더 새로운 어프로치를 선택해서 집필한다면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도 하고, 또 미국의 일류대학 교수로도 등용될 수도 있을 것이며, 테뉴어(종신교수직)를 받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 교수는 나에게 북한정치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당 역사는 이미 2~3명의 한국 유학생이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이정식 씨가 스칼라피노 교수의 지도하에 북한공산주의 연구의 권위자가 됐고,, 또 다른 한국 학생도 북한에 대한 석사 혹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중공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 당시에는 박사학위 논문만 쓰고 한국에 빨리 돌아가서 교수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미국에서 교수직을 구하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해 인정받는다면, 박사학위 과정이 있는 일류대학에서 교수직을 시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내가 관심을 갖고 집필하고 싶었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다시 검토해 보기로 결심하고 중공에 관한 연구를 대학원에서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끝마치고 박사학위를 할 당시에 미국 국방장학금(Natioal Defense Education Fellowship)을 신청한 일이 있다. 지도교수와 다른 교수 두 명이 함께 매우 고무적안 추천서를 써 주었고 또 치열한 경쟁 끝에 국방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장학금을 활용해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내가 국방장학금으로 중국과 소련의 대 한반도 정책에 대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58년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일이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은 1954년의 북한 노동당부터 제4차 당대회까지 북한의 내부 정치와 행정을 주로 다뤘다. 6·25전쟁에 대한 관심과 연구계획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자라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 영문으로 출판되면 반드시 구입해 뒀다가 시간 날 때마다 읽었다.

한국전쟁의 최전선, 그리고 히긴스와 올리버

나는 6·25전쟁 때 강원도 화천군 38도선 북방에 있는 한국군 제2군단 사령부의 정보처 브리핑 장교로 복무할 때 체험을 종종 회상하곤 했다. 한국군 참모급 이상의 장교와 미국군 고문단 장교들에게 매일 아침 8:00시에 상황실에 모여서 조회 겸 브리핑을 할 때 북한과 중공군의 현황을 보고하곤 했다. 정례 브리핑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북한과 중공에 관한 <뉴스위크>와 <타임>지 같은 주간지를 읽어야 했고, 또 영문책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올리버 박사의 책.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졌던 김일평 교수가 두 번째로 접한 관련 영문 저작이다.

하루는 조회 브리핑이 끝나고 나오는데 정보처(G-2) 고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윌리엄 이너스(William F. Enos) 중령이 포켓북(소책자) 『War in Korea』(1951) 라는 책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한번 읽어 보라고 말했다. 그 책은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의 일간지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의 한국전쟁 특파원으로 한국에 나와 있는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라는 종군기자가 쓴 책이었다. 포켓북이니 미국사람들은 3~4 시간이면 다 읽어치운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는 영어 단어를 영한사전에서 찾아가면서 천천히 읽었다. 그 책이 한국전쟁에 대하여 내가 읽은 첫 번째 책이었다. 미국인 여기자로서 한국전에 종군해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매우 자세하게 쓴 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또 한국말을 일정한 규칙 없이 영문화해서 사용했던 책으로 기억한다.

내가 읽은 두 번째 책은 1950년에 출판된 올리버 박사(Robert T. Oliver)의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나?(Why War Came in Korea?)』였다. 이 책은 내 서재의 책장에 아직도 꽂혀 있는데, 나는 그 책을 1950년대에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대학에 다닐 때였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매우 학술적인 책이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인 배경과 전쟁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서평도 있었다.

올리버 박사가 이승만 박사의 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편견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저자는 객관 적으로 한국전쟁을 분석하고 한국의 입장을 해명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6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학자의 입장에서 쓴 객관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올리버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을 홍보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해 미국의회의 로비활동을 많이 한 교수이기 때문에 편견이 많고, 객관적인 학자의 견해가 아니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이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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