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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야전천막 얻어다 군인교회 만들어 … 삶을 바꾼 기회들
미군 야전천막 얻어다 군인교회 만들어 … 삶을 바꾼 기회들
  • 김일평 코넷티켓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8.25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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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12)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4

한국군의 군목제도

6·25전쟁 당시 한국군에는 군목제도가 새로 생겨서 박 목사가 1952년 육군본부 군목실의 파견을 받았다. 박 목사님은 군복차림으로 십자가를 목에 걸고(그 당시 군목제도가 시작 될 때는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 육군 제2군단 본부에 부임했다. 박 목사님은 군단본부의 인사과에 가서 우선 장교들 중 기독교신자를 찾았다. 인사과의 최 대위, 정보처의 김일평 중위, 방첩대 포로심문반의 김철우 중위(중국어 통역장교, 후에 서울 영락교회 장로 역임) 등을 찾아서 연락을 했다.

나는 박 목사님의 연락을 받고 만나기로 했다. 우선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천막 교회가 필요했는데 전방에서는 야전 천막을 구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 몇 사람은 박 목사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천막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천막교회 위에는 십자가를 세우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천막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소속돼 있는 정보처의 참모 육근수 중령에게 말해 정보처에 배속된 지프차를 하나 빌려서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 군단본부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군 공병대를 찾아갔다.

미군 공병대는 미9군단 산하에 있는 부대이다. 미군 공병대에는 미국군목이 미9군단 군목실에서 파견돼 있었는데 피터 홈스(Peter N. Holmes) 목사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홈스 군목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나와 박 목사님을 맞이했다. 그는 자기가 공병대 대대장에게 부탁해 야전 천막을 하나 보급 받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약속대 야전 천막을 쓰리 코터(중형 트럭)에 실어서 우리 군단본부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야전 천막 교회를 세운 뒤 박 목사님이 설교할 수 있는 강단도 만들어 주었다. 또 교인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간이식 의자도 만들었다. 간이식 의자는 송판 밑에 다리를 달고 땅에 박은 것이었다. 그런대로 땅바닥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송판의자에라도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편리했다.

박 목사님의 거처는 교회천막 뒤쪽에 칸을 막고 접이식 침대를 하나 넣어 만들었다. 땅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미군이 사용하는 커트 침대에서 자는 게 그나마 모양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은 천막 안에서 혼자 쓸쓸하게 있는 것은 너무 외롭고 적적하니 나보고 그곳에 와서 함께 지나며 예배드리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 정보처 장교들의 숙소에서 합숙을 하고 있으니 한번 물어보고 오겠다고 대답했다. 정보처의 부참모인 최재방 소령과 상의했더니 목사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박 목사님과 함께 천막교회에 칸막이를 하고 야전침대를 두 개 넣고 그곳에서 자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자연 박 목사님의 신상에 대하여서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은 평양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서 장로교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이 해방되기 직전이라고 하니 박 목사는 50세 가까이 되신 분이다. 그리고 해방 후에 북한에서 목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월남했다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월남했는지 아니면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이 평양에 입성했을 무렵 남하했는지는 확실하게 이야기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과 가깝게 지냈다.

군인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10명 내지 20여명의 군인 신자들이 군인교회에 예배드리러 왔다. 장교도 있었지만 사병들이 더 많았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있는 한 대위가 매우 적극적으로 예배에 나왔다. 그는 전주에서 장로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목사님을 많이 도왔다. 이렇게 해서 육군 제2군단 군인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장교식당에 가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우리는 교회부근의 야외에 나가서 찬송가도 부르면서 야외예배를 종종 드렸다.

어느 날 박 목사님은 최 대위, 김철우 중위, 그리고 나를 군인교회의 장로로 안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1952년 가을 어느 주일날 아침예배를 드릴 때 우리 세 사람은 육군 제2군단 군인교회의 장로안수를 받았다. 우리가 장로 안수를 받은 날 점심식사 후에는 야외예배를 드렸다. 감사기도는 내가 인도했다. 다음 사진은 우리가 야외 예배를 드릴 때 찍은 60년 전의 사진이다. 그리고 군인교회 앞에서 박 목사님과 필자가 함께 찍은 사진(1952년 강원도 화천군 천정리 제2군단 사령부 군인교회 천막 앞에서)은 비록 색이 바래긴 했지만, 내겐 그 시절을 증거 하는 뜻 깊은 자료다.

필자와 박 목사님(오른쪽). 장로안수를 받고 천막으로 된 군인교회 앞에서

나는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국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고 또 원주감리교회의 주일학교에도 다녔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연락장교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나의 군 복무 기간은 매우 짧은 3년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은 나의 일생을 통해서 기억에 간직하고 싶은 매우 귀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뒷줄 왼편부터 김일평 중위, 박 목사님, 김철우 중위, 최 대위, 앞줄의 김 상사와 이 문관. 장로 안수를 받은 후 야외예배. 1952년 가을 강원도 화천 육군 제2군단 본부에서 찍은 사진

나는 3년간 연락장교로 복무할 때 한국주둔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의 통역을 할 수 있는기회도 얻었으며, 또 나의 미국유학을 주선해 준 종군목사 피터 홈스(Peter N. Holmes) 소령을 만나서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결정적인 삶의 기회를 만날 수 있었다. 6·25전쟁이 시작된 직후 미군 8군사령부에서 잠시 민간인 통역관으로 근무한 후 제7기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하고 한국군 제100부대(제2군단)에 파견을 받고 나의 육군복무는 시작됐다. 우리 100부대는 지리산 야전사령부의 토벌작전을 끝마치고 제2군단으로 개편됐다. 우리가 전방의 철원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제9군단에서 훈련을 받고 한국군 제2군단을 창립했을 때, 나는 미군 제9군단 군목으로 있는 피터 홈스 (Peter N. Holmes)를 만날 수 있게 됐다.

피터 홈스 소령은 내가 미국유학의 장학금(Full Scholarship)을 받아 도미유학을 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은인이다. 따라서 나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캔터키 주에 있는 애스베리 칼리지(201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로 종합대학교로 승격)에서 4년간 학비 전액을 장학금(Full Scholarship)으로 받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 때문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했는데 홈스 군목 덕택으로 미국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으니, 홈스 군목의 厚意에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 계속>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은 매주 수요일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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