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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4.18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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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3) 8·15 해방과 나의 영어공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이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다. 내 나이가 15세였을 때다. 한국이 해방된 후 6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방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일본 식민지 통치 36년 동안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은 해방된 조국을 찾아왔다. 그들은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우리 중학생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식민지 통치 밑에서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식민지 통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 청년 학생들은 일본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군수공장에서 일했으며 또는 농장에서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됐었을 때 우리 청년학생 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갈구했다. 우리 중학생들 중 한사람도 빠짐없이 조국해방의 감격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것이 어제만 같은데 벌서 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선으로 남북으로 분단했다.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완전히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한반도 분단이 정착되기 시작했고, 남북 간의 분단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됐다.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소산물이다. 주한 미군은 6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해방 전후의 우리들의 역사를 어떻게 한권의 회고록에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국이 해방된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깊숙이, 또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을 뿐이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시 원주에 돌아와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1946년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에서는 영어의 알파벳 정도만 공부했는데 일본 선생들의 영어 발음은 웃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홋도 이즈 잣또” (What is that?) “잣도 이즈 캿도” (That is a Cat) 식의 일본식 영어 발음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였다.

강원도 원주의 일산동에는 벽돌 양옥집이 3채가 있었다. 6?25전쟁 중 원주시내에 있던 모든 건물은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했을 때 미군 항공기의 폭탄세례를 받고 다 파괴됐지만 일산동에 세운 양옥 벽돌집 세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오른편의 붉은 벽돌 양옥집 한 채는 미국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그의 한국명은 羅 愛施德이다)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 다른 한 채는 켄터키 주의 애스베리대학(Asbury Collge)(200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듀크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찰스 스토크스(Charles Stokes) 박사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세번째 양옥집 역시 미국 켄터키주 의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한국에 파견된 감리교 선교사 벅크홀더(Buckholder) 부부가 입주하고 있었다.

스토크스 박사 부부와 버크홀더 선교사 부부는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해외파견 선교사로 자원한 인물들이다. 1945년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던 그들은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겨울 방학에는 영어회화반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원주농업고등학교 선생들 중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송동수 선생 등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이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느끼고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 몇 명을 선발해 레어드 선교사(나 애시덕)가 겨울방학동안에 이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주 주일날 오후 2시에는 레어드 선교사 자택에 선생님들과 학생들 10여 명이 모여서 영어예배(English Worship Service)도 보기 시작했다. 영어회화반에 다니던 우리 고등학교 학생도 초대됐는데, 영어회화를 실제로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0여 년 가까이 지난 오늘 그 당시의 영어공부 하던 시절의 일들은 내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실용적이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선교사의 헌신적인 영어교육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한국전쟁 당시에 육군 연락장교로서 미국군과 한국군 지휘관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영어로 공부하고, 또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터 레어드 선교사를 비롯해 앞서 말한 이들, 그리고 세디 모어 (Sadie Moore)선교사, 단기 선교사로 파견된 젊은 스핀드로우(Spindlow) 선교사의 덕택이었다. 나는 늘 이들에게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헌신적인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영어교육을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개척정신과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 나를 영어 성경반에 인도해 주신 고등학교 은사님 정태시 선생 (대한교련 사무총창을 거처 공주사범대학 총장 역임), 장재용 선생 (한국 외무부에서 주 뉴욕 총영사, 스페인 대사 역임), 그리고 김기순 선생 (한국외국어 대학 영어교수 역임)의 지도와 편달에 항상 깊은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ster Laird (羅愛施德)선생, 그는 누구인가?

 

Ester Laird(나애시덕) 선교사(1960)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훗날 김일평 교수가 있게 만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은 나의 은사이며 잊을 수 없는 미국 사람(Unforgettable American) 이기 때문에 나의 운명적인 선생으로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생시절 겨울방학 동안 나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 나 선생 때문에 성경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며, 한국동란 때는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임관해 연락장교로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애시덕 (Ester Laird) 선생은 누구인가?

 

레어드 선생은 1901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고 딕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종교교육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모닝 선 스쿨(Morning Sun School)에서 교편을 잡은 경험도 있다. 1926년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1930년부터 기독교여자사회관, 영아원, 결핵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부녀자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끈질긴 선교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녀는 안식년인 1927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1930년까지 3년간 고향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해 1931년 원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원주 기독교 여성회관 관장의 책임을 맡아서 10여 년 동안 봉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 일본제국주의 군부지도자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식민지 조선에서 추방했다. 레어드 선교사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있는 베데스타 병원 부속 간호대학에서 간호사 전문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그녀의 삶은 봉사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관됐다. 그녀는 이후 병원에서 일하며 전문 간호사를 교육할 수 있는 간호사교육 자격증도 받았다.

레어드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된 후 1947년에 원주로 다시 돌아와서 6·25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 기독교 사회사업을 계속하면서 기독교 청년 지도자를 많이 육성했다. 그녀는 원주의 사회봉사회관에 유아원을 설치하고 어린아이가 출생했을 때 모유가 부족한 어린 영아들을 모아 우유를 공급해서 새로 출산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주는 구명사업도 원주 기독교 사회사업관에서 함께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의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해(그 당시 원주에는 여성이 승용차를 스스로 운전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몇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달려가서 모유가 부족한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분유를 먹였다. 당시 시골의 어머니들은 외국인 여성에게 자기의 갓난아이를 선뜻 외국인에게 맡길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유를 먹이는 것도 반대하는 전통적인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레어드 선교사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성어린 사업에 감복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강원도 원주의 여러 동리에서 레어드 선교사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원주 시민들 사이에는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 원주 사람들은 그녀를 '羅 부인' 또는 '羅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에스터 레어드'였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羅 愛施德'이라고 지어 주었다. 사랑을 널리 베풀고 덕이 많은 羅 선생이라는 말이다.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들은 羅愛施德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더 훌륭한 영어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한국동란 후에는 외교관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또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전기는『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최종수 지음,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를 참조하기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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