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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로비 사건과 노진환 사건 사이에서
박동선 로비 사건과 노진환 사건 사이에서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3.02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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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6)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7

코리아 게이트란 무엇인가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 사건은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 양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으며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모든 방송매체와 언론이 매일 보도했다. 일부의 한인들은 코리아게이트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도 했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국의 한국원조가 삭감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은 당연한 것이라고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삭감하려는 미국의회의 하원 의원과 상원 위원을 무마하기 위한 로비활동이 전개됐을 때 박동선의 대미 로비활동은 미국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박동선 사건은 한국에 대한 미국원조를 지속시키며 더 많은 량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증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박동선은 한국정부로부터 로비활동 자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미국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의 프레이저 위원장은 한국정부의 로비활동을 파헤치는 청문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한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을 역임하고 한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복이었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김형욱 전 정보부장은 박정희정권의 비밀 로비활동을 미국 국회청문회(프레이저 커미티)에서 상세히 폭로함으로써 미국의회의 로비스트 박동선과 청와대 사이의 관계가 백주에 들어나게 됐던 것이다.

한국의 인권탄압에 관한 미국의회의 프레이저 소위원회의 청문회 기록은 다음 회의록에서 볼 수 있다. (Human Rights in South Korea: Implication for U. S. Policy, Hearings Before the Subcommittee on Asian and Pacific Affairs and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and Movements of the Committee on Foreign Affairs, House of Representatives, Ninety-Third Congress, Second Session, July 30, August 5, and December 20, 1974. Also “Human Rights in South Korea and the Philippines, Implications for U. S. Policy” May 20, 22, June 3, 5, 10, 12, 17, and 24, 1975).

박동선과 프레이저 소위원회

이른바 한국 정부의 미국로비 활동은 주로 주한 미군의 철수를 중단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삭감에 반대해 이에 제동을 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로비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로비스트 박동선은 미국법에 위반되는 금품제공 등 불법로비활동을 감행했기 때문에 미국의회의 청문회에서 그의 불법 활동 전모가 밝혀지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박동선은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됐다. 그는 언론으로부터 매우 가혹한 비판을 받았으며 미국의 영주권도 박탈당해 국외로 추방되는 신세가 됐다.

1978년 2월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박동선 씨가 미의회 청문회에 증언을 하기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심경과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청문회는 박동선의 로비활동이 과연 한국정부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사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서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로비활동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정부가 사주한 로비활동이었는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미국하원 소위원회 프레이저 위원회)의 청문회 기록(책 두 권에 이르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청문회 기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박동선은 한국정부를 위한 로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蓄財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 위원회의 한 의원의 말에 의하면 박동선의 로비활동은 한국의 국가이익을 빙자해서 개인의 재산을 축척하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박동선 로비 사건 때문에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자신의 얼굴에 먹칠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신랄하게 비판 하는 동포들도 있었다. 박동선 로비활동은 재미 한인동포의 긍지에도 많은 상처를 남겨 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1970년대의 일이다.

박동선 로비활동이 상당한 진전을 보였을 때 또 하나의 로비사건이 폭로됐다. 이른바 노진환 씨의 정인숙 사건이었다. 내가 노진환 씨를 알게 된 것은 나의 미국 친구 킹 코프만(King Coffman) 대령의 소개 때문이었다. 내가 킹 코프만을 만난 것은 콜럼비아대학원에서였다. 당시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West Point) 출신으로 미군 대위시절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관요원으로 발탁돼 콜럼비아 대학원의 위탁학생으로 와 있었다. 그가 콜럼비아대 캠퍼스에서 나를 보고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혹시 한국에 파견나갔던 젊은 선교사인줄 알고 “네 고맙습니다”로 화답했다. 그리고 커피숍에 가서 함께 코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972년 서울 미 8군사령관과 함께 한 만찬

자신은 미국 육군사관학교(4년제) 즉 미국의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해 복무하다가 웨스트 포인트의 교관요원으로 발탁돼, 미국 정부의 콜럼비아 대학원 위탁학생으로 석사학위에 등록해 이곳에 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모든 학비는 미군 육군에서 지불한다는 것이다. 아직 미혼이고 2년간의 대학원 과정을 마치면 웨스트 포인트에 가서 2년간 교수생활을 하다가 전방으로 배치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매우 총명한 육사출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성경공부반(Bible Study Group)이 있으니 내게 출석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학원 강의도 들어가야 했고 또 석사학위 논문도 써야했기 때문에 성경공부반에 매주 참석할 수는 없지만 한 두 번은 나가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가까운 친구로 지내게 됐으며 그가 얼마 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돌아갔을 때 한번 방문해 달라고 해서 다음해 가을학기 추수감사절 방학 때 그를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그는 콜럼비아 대학원의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 독일항공기를 타고 미국에 올 때 아이린 (Irene)이라는 독일 승무원을 만나 교제한 후 결혼했다. 아이린은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으며 임신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잘 돌아보고 또 코프만 교관이 가르치는 교실에 가서 한국전쟁에 관한 특강도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다시 서울에서 만나게 됐다. 그와의 인연은 이렇게 길게 이어졌다. 서울에서 만났을 때 그는 대령으로 진급해 미군 제8군사령부의 기지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내가 1970년대 서울에서 개최되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할 때는 어김없이 찾아와 격려도 해 주고 또 점심식사도 함께 했다.

1972년에 열린 한 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나의 호텔에다 전화하고 자기가 저녁식사에 초대할 것이니 꼭 참석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는 미군 제8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대장의 부부도 초빙해 함께 식사할 것이라고 귀띔하면서 내게 꼭 참석해달라고 말했다. 마침 그날은 학술대회도 끝나고 2~3일간 지방으로 관광을 떠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킹 코프만 대령의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미8군사령관 스틸웰 대장 부부, 킹 코프만 대령 부부, 그리고 나를 포함한 조촐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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