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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12일 마침내 뉴욕한인회 창립하다
1960년 6월 12일 마침내 뉴욕한인회 창립하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2.15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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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4)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5

나는 1960년 6월 12일에 출범한 초대 한인회 실행위윈회(집행위원회)의 일원으로 당선됐다. 그 당시 학생대표로 한인회 조직에 직접 참여한 사람은 뉴욕대의 노재봉(후에 제6공화국 국무총리 역임), 롱아이랜드대의 이범선(제6대 회장),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원의 나를 합하여 3명에 불과했다. 나는 제3대 김형린 회장 당시(1962.12.2.~1964.12.20) 학생회장 어근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참가했으나 김형린 회장의 특별한 배려로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뉴욕학생회 회장(1959~1960)과 뉴욕한인회 실행위원(1960~1963)으로 뉴욕 한인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내 나름대로 무엇인가 기여할 생각이었으나 뜻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한인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학업이 더욱 중요하고 나의 박사학위를 끝마치는 과업이 더욱 긴급한 과제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김준성, 강한모, 김형린, 한영교 등이 한인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다. 뉴욕의 유학생을 대표해서 나는 뉴욕대학 대학원생인 노재봉과 함께 참석한 바 있다. 그는 내가 뉴욕한인학생회회장으로 당선됐을 때 문화부장으로 임명됐으며 학생회 소식 뉴스레터를 편집하고 학생회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친구였다. 그는 나와 함께 뉴욕한인회 창립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뉴욕한인회 창립 무렵의 풍경

노재봉 씨는 한국에서 1950년대에 학생운동에도 참여해 본 경험이 있어서 뉴욕지방 한국학생회에는 문화부장으로서 월간소식지 <한국학생 뉴스>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뉴욕한인학생회에 공헌도 많이 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한국 민주화 시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바도 있다. 노재봉 씨는 1960년 한인회 조직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미국에 유학와서 뉴욕에 정착한 연로하신 선배들이 파벌 싸움을 계속하는데 아연실색했다. 그는 뉴욕 교포사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뉴욕한인회 조직에는 동참하기 싫다고 말하면서 뉴욕한인회 조직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 반면에 그는 뉴욕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는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뉴욕한인회가 창설됐을 때 초대 서기를 역임한 이범선 씨(롱아일랜드대 회계학과 교수)는 한인회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 5월 1일 뉴욕한인회 발기 모임이 개최됐고, 5월 22일에는 준비위원회가 조직됐으며, 6월 12일에 소집된 준비위원회 모임에서는 회칙을 채택하고 창립된 뉴욕 한인회 실행위원을 처음으로 선출했다. 한인회 실행위원들이 회장단을 뽑기로 돼 있었다. 실행위원회 조직과 동시에 거행된 선거에서 다수 투표순서로 선출된 11명은 다음과 같다. 윤치창(19표), 강한모(17표), 김일평(17표), 김준성(14표), 김배세(13표), 호기성(13표), 김형린(12표), 이범선(12표), 노재봉(12표), 한영교(11표), 손재승(11표). 그 중에 학생신분으로 뽑힌 실행위원은 김일평 학생회장 외에 이범선과 노재봉뿐이었다고 회의록에 기록돼 있다(『아메리카 대륙의 한인 풍운아들』(하), 조정무 저, 조선일보사, 1988년).

뉴욕한인회 창립멤버로 참석한 나는 뉴욕한인회의 창립을 직접 목격했고, 또 그 후의 발전을 지켜봤다. 1950년대 뉴욕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일대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대부분은 한국유학생이었다. 150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 유학생은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으며 조국의 통일을 생각하는 애국지사들이었다.

한국에서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박사가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하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미국의 3대 방송매체(ABC, CBS, NBC) 중 하나인 아메리칸 방송(American Broadcasting Company) 즉 ABC 방송은 나에게 두 명의 한국학생(남학생 한명과 여학생 한명)을 교섭해서 ‘ABC 시사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노재봉 씨와 그의 약혼녀 지연월 씨(뉴욕대 대학원생)를 설득해 ABC-TV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3대 방송사 중의 하나인 ABC의 뉴스해설 프로그램의 사회자인 세컨더리(Secondry)기자는 우리 세 사람을 오찬에 초대한 것이다. 뉴욕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센트럴 파크에 있는 ‘테반 온더 그린(Tavern on the Green)’ 이라는 식당에 우리를 초대하고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미국 TV에 노재봉 씨의 뒷모습만 방영된 사연

그는 ABC의 시사방송 프로그램이 기획하고 있는 한국대통령 선거와 한국학생들의 데모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끝마친 후에는 TV영상을 찍기로 했다. 노재봉 씨는 자기 얼굴이 뉴스프로그램에 나타나면 한국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피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얼굴은 비치지 말고 뒷모습만 텔레비전 화면에 비처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사회자인 세컨더리 씨는 매우 난처해하면서 할 수 없이 승낙하고 노재봉 씨의 뒷모습만 촬영하면서 간담회의 목소리는 그대로 녹화했다.

우리의 좌담회가 끝나고 그날 저녁 ABC뉴스 프로그램에 방영됐을 때 콜롬비아대의 내 동창들과 친지는 그렇게 TV 방송에 방영됐으며 한국의 자유당 정부의 부정투표를 적나라하게 비판했는데도 무사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에서는 우리의 학생여권을 박탈하지도 않았으며 또 우리는 미국의 유학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했다. 미국의 ABC 방송국은 만약 우리의 여권이 연장되지 않고 우리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자기들이 영주권을 얻는데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미국친구들도 있었다. 미국의 ABC방송 영상은 30분 프로그램이었는데 4·19 학생 데모가 계속 됐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에도 재방송을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시청자들이 봤다고 전해 들었다. 나에게 오는 전화는 비 오듯 쏟아졌고, 한국에서는 콜롬비아대 대학원 내 이름 앞으로 보내온 감사편지도 수 없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4·19 학생혁명 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의 장면 정부도 10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군사정부가 20여년(1961~1979) 동안 통치한 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민권운동의 결과로 군사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종말을 고하고 또 다시 민주정부가 수립됐다. 민주주의적인 자유선거를 통해 노태우 정권이 츨범했다. 군사정권시절 독재정치와 인권탄압으로 한미관계는 매우 악화됐다. 한미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환영 리셉션이 있었다. 뉴욕한인 사회의 대표자와 유지들을 초빙한 자리에 강한모 씨 부부도 참석했다.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뉴욕한인회 창립시절을 회고했다. 그는 이번이 한인회가 주최하는 마지막 행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나에 말하면서 처음으로 미국인 부인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의 미국인 부인은 강한모 씨와 함께 롱아이랜드 모 중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은퇴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강한모 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밴 코트랜드 공원에서 개최한 야유회

강한모 회장 재임 당시 뉴욕 한인회는 한인사회를 위한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한 것이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한국에서는 4·19 학생운동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미국의 뉴욕 영사관의 남궁련 총영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직계로서 4·19 직후에는 물러났다. 민주당정부에서 파견한 공관장 문덕주씨(외교관)가 뉴욕 총영사로 부임해 왔을 때다.

새로 조직된 뉴욕한인회에서는 뉴욕의 한인학생들을 초대해서 야유회를 개최한 것이다. 한국유학생은 주로 콜롬비아대 부근과 뉴욕대 부근에 많이 살고 있었다. 뉴욕한인회는 100명에 가까운 한인 유학생들을 전부 야유회에 초청한 것이다. 야유회 장소는 브로드웨이 전철(Broadway Subway)를 타면 종점에 있는 밴 코트랜드 공원이었다. 대부분의 한인 학생들은 전철을 이용해서 야유회 장소에 모였으며 뉴욕한인회 간부는 식사와 음료수를 준비해서 자동차에 싣고 야유회 장소에 왔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지만(늦게 도착했다가 식사만 끝마치고 다른 일 때문에 떠난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70~80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김준성 목사는 야유회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했는데 뉴욕 한인학생회 회장인 나에게 간략한 축사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뉴욕한인회의 원로들이 우리 한국유학생들을 초대해 주시고 또 유학생들을 위해 베풀어 주시는 여러 가지 후의에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뉴욕한인회와 우리 뉴욕한국학생회 사이에는 상호협조를 많이 할 것을 다짐했다. 뉴욕 한국학생회가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는 한인회의 간부는 물론 뉴욕한인회 회원 여러분도 반드시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뉴욕한인회 행사에는 우리 한국학생회의 간부와 일부 대학원생들이 적극 참여해 상호간의 협력관계는 잘 이뤄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내가 뉴욕 한국학생회 회장으로 있을 때 우리 한국학생회와 뉴욕한인회의 상호협조 관계는 매우 잘 이뤄졌다. 우리 한국학생회는 간부회의에서 1960년 가을에 ‘한국문화 대축제’를 콜롬비아대 강당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나는 한국유학생회장 임기 내에 한국문화 대축제를 개최해 미국사람들에게 한국문화의 특유성과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새로 창립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찾아가서 벤플리트 회장(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육군 제2군단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의 통역을 한 경험도 있고 해서)을 만났다. 한국문화 대축제를 공동 주체하자고 건의했다. 자기는 출타 중이지만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사무총장인 찰스 매카티 대령(예비역)에게 말해 놓을 터이니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라고 부탁해 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화 대 축제의 경비 일부도 부담하겠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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