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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과학으로 무장한 ‘괴담’, 과학 정신만이 해결책
유사과학으로 무장한 ‘괴담’, 과학 정신만이 해결책
  • 최승우
  • 승인 2024.03.29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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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㉝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과학기술·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24일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가 「현대 과학적 자연·생명·우주관」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34강은 황정아 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우주론과 우주 개발의 미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과학기술 시대의 교육은 특정 분야의 전문성만 강조하는‘전사(戰士)’가 아니라 폭넓은 학문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함께 전문성을 강조하는 ‘기사(騎士)’의 양성을 목표로 해야만 한다

현대 과학을 교묘하게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유사 과학과 가짜 과학을 선동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반(反)기술적 ‘괴담’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가짜 뉴스,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인공지능(AI)의 환각과 딥페이크도 걱정스러운 사회 문제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가치는 명백하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이 없었으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했다’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진정한 과학 교육만이 현대 사회의 학생들에게 ‘미래 행복’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춤추는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등불이라고 강조했다.

‘우주·자연·생명’을 밝히기 위한 노력

현대의 자연과학은 우주·자연·생명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에서 인류의 보금자리인 지구의 환경에 이르는 모든 것이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이다. 심지어 세상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기는 인간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도 자연과학의 영역이다. 그런 현대 과학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는 “‘인문 문화’와 ‘과학 문화’의 단절을 극복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단순한 단절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대립으로 변화하고 있다”라며 “그런 대립의 결과는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게 치명적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그렇다고 우리가 ‘과학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가 설명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고, 지구상에서 우리의 생존은 여전히 위태로운 형편이다. 현대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거시적 물체의 움직임은 17세기 아이작 뉴턴이 정립한 ‘고전 역학’으로 설명한다. 정지 상태가 모든 물체의 본성이라고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직관적 해석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모든 물체는 새로운 힘이 가해지기까지 운동을 계속하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질량을 가진 물체들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만유인력)의 존재도 알아냈다. 결정론적(기계론적)이고, 가역적인 고전 역학을 이용하면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천문 현상의 과거를 되짚어볼 수도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확실하게 예측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그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한 ‘원자’ 수준의 미시적 입자들은 고전 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 제국의 과학자들이 당시의 첨단 산업이었던 전구(電球)의 표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를 위해 제시한 ‘양자 가설’이 미시 세계의 설명에 필요한 ‘양자 역학’의 출발이었다.

고전역학과 충돌하지 않는 양자역학

양자 역학의 등장으로 고전역학이 ‘무너졌다’는 주장은 섣부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것이라고 믿었던 고전 역학의 적용 범위가 사실은 거시적 물체의 운동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고전 역학은 여전히 거시적 물체의 느린 움직임을 설명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욱이 양자 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이 고전역학과 절대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양자 역학의 설명이 입자의 질량이나 크기가 충분히 커지면 고전 역학의 결정론적 설명과 같아진다는 ‘대응 원리’가 있다. 확률론적 양자 역학으로 표현되는 물리적 실재(實在)의 의미는 물리학적으로 밝혀내야 할 과제이다.

현대 과학에서 생물은 물리적 세상에 실재하고, 외부와 에너지와 물질의 교환이 가능한 열린계이고, 자신을 닮은 후손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정의한다. 그런 현대적 생명체는 생명의 핵심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생명의 책’인 DNA의 존재 가능성을 처음 제시한 것은 양자 역학의 정립에 기여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였다.

결국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해주는 단백질 합성의 정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진화의 과정에서 DNA에 남겨진 흔적들이 우리에게 생명의 빅 히스토리를 읽어낼 수 있도록 해준다. 한편 우주의 생명은 단백질이 아니라 RNA나 DNA에서 시작됐을 것이라는 ‘중심 원리’도 있다.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 풍요를 누리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실제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16억이던 인구는 5배나 늘어나서 80억을 넘어섰고, 평균 수명도 31세에서 73.3세로 늘어났다. 인류의 총생산은 4조 달러에서 136조 달러로 34배가 증가했고, 에너지 소비도 15배가 늘어났다. 10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는 능력도 갖췄다. 21세기의 인류가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건강하고·평등하고·안전하고·편리하고·민주화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세상에는 공짜 점심이 없는 법이다. 현대의 과학적 기술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서 편익을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현대의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심각한 과제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 현대적 기술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인류의 과욕과 탐욕에 의한 과도한 기술 개발이 지구촌 파국의 핵심 원인이라고 한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환경을 파괴했다’는 것이 공통적인 주장이다. 200년 사이에 10억의 인구가 80억으로 늘어났지만, 인류는 오히려 비만과 인구의 노령화를 걱정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괴담 공화국’에 살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기업의 노이즈·공포 마케팅·특종에만 매달리는 황색 저널리즘·엉터리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유사·가짜 과학으로 무장한 ‘괴담’이 온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현대의 교양은 민주 사회에서 품위와 인격을 갖추고,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개인적·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독립적·합리적·이성적 판단과 자신의 호기심 충족에 필요한 폭넓고 풍부한 지식과 상식을 말한다. 본래 ‘자유 교양’이라고 부르던 중세 유럽의 교양은 자유로운 신분이 보장된 시민에게 요구되는 특권적 품성이었다. 현대의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에는 모든 국민이 자유로운 시민이다. 

시민은 누구나 교양을 갖춘 교양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충분한 교양을 갖추기 위한 합리적이고 공정한 교육의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해야만 한다. 국가나 시민의 교양에 대한 책무는 모두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인문 문화’와 ‘과학 문화’의 단절을 극복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단순한 단절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대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과학은 인문학이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이라는 인식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과학이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대립의 결과는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게 치명적이다. 

국민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인문학과 과학을 모두 외면했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 우려하는 청소년의 이공계 기피와 인문학계에서 걱정하는 인문학의 위기가 바로 과학과 인문학의 오랜 대립이 가져온 결과다.

인문학과 과학기술 두 축의 교양 교육

인문학 중심의 교양 교육을 과감하게 개편해야 한다. 사회를 뿌리부터 바꿔놓고 있는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학생들에게도 읽기·쓰기·말하기로 시작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인문학적 교양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미래의 세상을 현재와 전혀 다르게 만들어줄 현대 과학과 기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상식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대학에서의 교양 교육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두 축으로 확실하게 개편해야 한다. 

인문학을 소홀히 하는 교양이 무의미한 것처럼, 과학기술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교양 교육도 용납할 수 없다. 과학 교육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쉽고 재미있는 단편적인 과학 상식의 교육은 의미가 없다. 현대의 과학을 인문학적 평가나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양자역학의 이중성이나 불확정성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은 의미가 없다. 

과학 지식의 증진에 도움이 될 수도 없고, 인문학을 살찌우는 노력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활용되는 환원주의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도 의미가 없다. 환원주의로 밝혀낸 과학적 진리를 거부할 이유도 없고, 인문학이 환원주의에 포획될 우려도 공허한 두려움이다. 환원주의가 과학에서 활용되는 유일한 방법론인 것도 아니다. 현대적 교양에서 단편적인 과학적 지식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과학적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비판적 합리성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 정신’이다. 

과학의 탈을 쓴 ‘가짜’ 과학 지식의 식별에 필요한 사고방식이 바로 과학 정신이다.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기적과 신비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그 출발이다. 능력에 따라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진정한 ‘공정’과 ‘정의’이고, 그것이 바로 과학 정신의 핵심이다. 과학기술 시대의 교육은 특정 분야의 전문성만 강조하는‘전사(戰士)’가 아니라 폭넓은 학문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함께 전문성을 강조하는 ‘기사(騎士)’의 양성을 목표로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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