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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39] 능력주의와 긍정적 환상
[한민의 문화등반 39] 능력주의와 긍정적 환상
  • 한민
  • 승인 2022.06.27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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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39

 

한민 문화심리학자

메리토크라시, 즉 능력주의는 출신이나 가문 등이 아니라 실적과 능력, 즉 메리트(merit)에 따라서 지위나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체제 또는 그러한 주장을 뜻한다. 능력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미국이다.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는 능력주의는 미국이란 나라의 기본 이념에 가깝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했던 영화 「파 앤 어웨이」에는 미국이 초기 이민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토지를 분배했는지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한 사람 당 일정한 수의 깃발을 주고 하루 동안 그 깃발을 꽂고 다닌 면적이 자기 소유가 되는 식이다. 말 그대로 능력껏 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부와 지위 및 그에 따른 차등을 받아들이는 미국식 개인주의 문화가 등장했다. 문화심리학에서는 이를 수직적 개인주의라고 한다. 부나 지위에 따른 개인 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북유럽 국가들의 수평적 개인주의와는 영 다른 분위기다. 

한국은 이 능력주의가 가장 거세게 발현하는 나라들 중 하나다. 자신의 능력껏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차지한 것에 대해서 다른 이들은 어떠한 불평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최근 들어 사회적 불공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 역시 이 능력주의의 신봉자들로 여겨지는데, 개중 과격한 이들은 자신들이 능력껏 갖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세력이나 능력 있는 이들의 기회를 가로막는 능력이 아닌 다른 어떤 기준도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능력주의에는 장점도 많다. 타고난 핏줄이나 계급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실제로 미국의 능력주의는 아메리칸 드림의 이론적 배경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아름다운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중에 몇이나 그 꿈을 이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메리칸 드림에는 능력주의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담겨있다. 미국에 간다고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에는 기반이 필요하다. 차근차근 능력을 쌓을 수 있고 실패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이민자들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은 이유는 언어와 문화 등 적응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소위 유리천장, 주류사회의 저항이 크다. 게다가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능력도 없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 예를 들었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이 기득권에 편입하는 일은 어디서나 쉽지 않다. 성공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들은 그 어려운 일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여러 사회현상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 사실보다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문화심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자신에 대한 강한 긍정적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긍정적 환상이란 ‘남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사건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남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좋은 일들이 나에게는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럴 확률은 사실상 크지 않기에 긍정적 ‘환상’이라는 말이 붙었다. 

적절한 수준의 긍정적 환상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 환상은 자존감과 자기탄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을 지나치게 믿는다면 이는 망상이 된다. 망상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마저 심각하게 위협하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심각한 정신병리다. 

긍정적 환상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려면 객관적인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이른바 메타인지 능력이다. 나는 어떤 분야에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내 능력으로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내 능력은 오로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메타인지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된다. 자기객관화가 안 된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청소년기가 길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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