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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5] 아버지의 자아통합, 그리고 화해
[한민의 문화등반 55] 아버지의 자아통합, 그리고 화해
  • 한민
  • 승인 2023.02.27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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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5

 

한민 문화심리학자

친구들의 아버님들이 한두 분씩 돌아가시고 있다. 우리 나이도 곧 50줄이니 이제 때가 된 것이겠지. 마음은 늘 어린애지만 이마에 주름은 하나둘 늘어가고 익숙했던 풍경은 하나둘 사라진다. 아이가 언제나 아이일 수 없듯이 부모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계실 수 없을 터이나 이별은 누구에게나 처음인지라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버지 연세도 80이 넘으셨다. 눈을 감고 언젠가 내게도 닥칠 일을 시뮬레이션 해본다. 고작(?) 80이시고 아직까지 현역으로 일하시는 양반을 두고 무슨 불효냐고 얘기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생각은 죄가 아니니까. 어머니는 10년도 더 전부터 상조에 가입해 두셨는데 그게 두 분이 사이가 나쁘다는 증거는 아니지 않겠는가.

아무리 슬픈 일이라 해도 그런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며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별로 바람직한 일은 못 된다. 아무튼, 장례식장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슬픈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원래 슬픔은 늦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장례 일정을 잡고 조문객을 맞고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고 나면 뒤늦게 서글픔이 밀려오겠지.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문득 지난날들의 영상이 스쳐 지나간다. 사실 아버지와 나는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공놀이를 한 기억도 없고 손잡고 어디 놀러 간 기억도 없다. 잘했다고 칭찬을 받은 적도 없고 힘들 때 위로를 받은 적도 없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리에서 신문을 읽거나 난초를 다듬고 계셨다.

두 번 정도 단둘이 여행을 갔었는데 말은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관광 포인트만 찍고 왔었다. 청소년기에 있었던 몇 번의 사건은 부자간에 더 깊은 골을 파 놓았다. 누구처럼 아예 안 보고 사는 건 아니지만 만나면 할 말이 없다. 말을 해도 불편해지기만 하고. 평생동안 아버지하고 대화한 시간이 아마 한 시간이 안 될 것이다. 

쌓인 감정이 없기에 나올 감정도 없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이해하자면 이해가 안 될 것은 없다. 40년대생인 아버지는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일곱 살 때 6.25를 겪은 까까머리 학생은 가문의 명운을 지고 점심시간에 수돗물을 마셔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겹친 불운으로 원하던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그나마 이뤄낸 것들도 부모 형제들에 대한 부담감으로 마음껏 누릴 수 없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가정사이므로 생략.

이는 우리 집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현대사의 격변기를 사셨기에 감정을 인식할 겨를도 감정을 드러낼 여유도 없었던 것이 우리 부모님들의 삶이었다. 그런 부모님과 감정을 나눈 경험이 없는 자식들은 부모가 낯설고 감정이 배제된 부모의 표현이 버거웠다. 그리고 이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을 자아통합 대 절망의 시기로 본다. 모든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서 물러난 노인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살아온 의미를 찾는다. 내가 살아온 의미를 찾지 못하면 절망이라는 감정이 떠오른다. ‘잘못 살았다’는 회한이다. 나의 한평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기에 자아통합의 욕구는 그만큼 강하게 나타난다. 

회상과 옛날이야기로 대표되는 노인의 자아통합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대화할 사람이다. 노년기의 사회생활이 중요한 이유다. 노인들께서는 은퇴하셨다고 집에만 계시지 말고 자꾸 바깥 활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셔야 한다.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살아온 이야기들이 나오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살아온 이유를 돌아보게 된다.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과 대화가 어려운 분들이다. 자아통합의 욕구가 워낙 강하다보니 많은 분들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합리화하는 쪽으로만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그 결과는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와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러냐’는 발언이고, 이는 나이 든 부모와 자식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다. 

아버지의 자아통합을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시작한 게 벌써 사오 년 전이다. 그동안 아버지는 부쩍 마음이 약해지셨고 어머니께 종종 ‘내가 잘못 산 거 같다’는 말씀을 흘리신다고 한다. 여전히 어떤 감정을 느끼기는 힘들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20년 넘게 심리학을 했지만 모를 일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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