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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19] 사회변화의 욕구와 부친살해의 은유
[한민의 문화등반 19] 사회변화의 욕구와 부친살해의 은유
  • 한민
  • 승인 2021.09.0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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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두 가지 사건으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꼽힌다. 산업혁명이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면, 시민혁명은 신이 일부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권위를 걷어냄으로써 개인과 개인들의 모임인 시민이 주체가 되는 시대를 연 것이다. 

심리학, 특히 정신역동이론에서는 이 과정을 부친살해라는 은유로 설명한다.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세계 많은 지역의 신화와 전설, 동화와 민담에서 나타나 보편적인 주제다. 예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데(세대갈등의 심층심리), 아버지는 기존 사회의 질서와 권위를 뜻한다. 즉,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과거의 질서와 권위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의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정신역동이론의 관점에서 근대란 아버지를 죽인 자식들이 새롭게 연 시대다. 신(자연)의 명령에 복종했던, 신이 부여한 권위에 복종했던 아버지는 이성(과학)과 자유의지를 내세운 자식들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분석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발발했던 서구문화권에서는 타당해 보인다. 반면 그렇지 못한 문화권, 대표적으로 동양 문화권에서는 부친살해의 모티프는 발견하기 어렵다. 근대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본의 사례도 구질서를 타파하고 새 질서를 열었다기 보다는 기존 질서 위에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인 경우다(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

과거 어느 시점까지의 한국은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기 전, 조선 역시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을 내세워 근대화를 시도했다. 오히려 한국의 전설, 설화, 민담에는 부친살해가 아니라 ‘자식살해’라는 모티프가 나타나는데, 흉년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거나(손순매아, 동자삼 등) 영웅이 태어나면 부모와 동네 사람들이 후환을 막기 위해 아이를 죽이는(아기장수 설화) 등이 그것이다.

자식살해의 서사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순종과 헌신을 의미한다. 효(孝)를 으뜸 가치로 쳤던 한국의 역사에서 부친살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패륜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랫동안 자식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해왔던 한국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면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손에 살해당한 셈이다.

아버지를 죽인 타인은 자식들의 존재 역시 부정했고 자식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근대 이후 한국인의 무의식에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무력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한 타자에 대한 부정이 공존하게 되었다.

한국의 현대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아버지가 나타나고 자식들은 그 아버지를 죽이는 상황의 연속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진 광복 이후의 사상투쟁, 독재와 싸웠던 4.19, 5.18, 6월 항쟁, 가깝게는 2016년의 촛불까지, 한국의 현대사는 부당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물리치고 주체로 서기 위한 자식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꼭 정치적인 측면에서만도 아니다.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제사 갈등, 권위적인 직장문화를 둘러싼 꼰대 논쟁, 전통적 성역할에서 비롯된 남녀 갈등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서 전통과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다.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터이다.

아버지를 죽인다는 의미는 기존질서에 대한 태도와 관련있다.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죽이고 새 질서를 구축하려 노력해 왔다는 것은 한국이 그만큼 빨리 변화해 왔다는 의미다. 그 결과, 한국은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급변하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물론 워낙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다보니 그만큼 해결해야 문제도 많긴 하지만,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해 나갈 것임을 믿는 이유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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