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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3] ‘대중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바뀔 수 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3] ‘대중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바뀔 수 있다
  • 박홍규
  • 승인 2024.02.26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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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데이비드 그레이버 2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데이비드 그레이버. 2020년 9월2일, 59살로 죽었다. 

팬데믹이 한창인 2022년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나는  그레이버가 웽그로우와 함께 쓴 고대사에 대한 유고에서 고대 우크라이나의 초기 도시가 중앙 집중식 통제나 하향식 행정 없이 지역의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평등한 평화 사회였다고 쓴 것을 읽고 있었기에 그 전쟁에 너무나 놀랐다. 그 고대 도시는 르 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나타난 왕, 전쟁, 노예 또는 비밀경찰 없이도 살아가는 상상의 도시와 같았다.

이처럼 고대사를 재발견하려는 이유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대침체 이후 불평등의 문제, 그리고 불평등의 오랜 역사가 논쟁의 주요 주제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의 수준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세계 문제의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계속 확대되는 불평등의 결과라는 점에 대해 지식인과 일부 정치 계급 사이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간극, 인구의 극소수만이 다른 거의 모든 사람의 운명을 통제하고 도시는 그러한 곤경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도시는 원래 그렇지 않았다는 역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소수 부자에게 봉사하는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레이버는 사망 직전에 쓴 에세이에서 팬데믹 이후 우리 사회가 조직된 방식, 즉 소수 부자들의 모든 변덕에 봉사하면서 다수를 폄하하고 타락시키는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언론과 정치 계층은 분명히 팬데믹 이후 사람들이 ‘필수적이지 않은’ 직업으로 돌아갈 수 있고 이것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금융이란 무엇인가? 오로지 남의 빚이 아닌가? 돈이란 무엇인가? 그것도 단지 빚인가? 빚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약속이 아닌가? 돈과 빚이 단지 우리가 서로 만드는 약속의 집합이라면, 쉽게 다른 것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러나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가 닥치고, 생각을 멈추고, 다시 일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찾기 시작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은 거의 즉시 닫혔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우리가 겪은 위기는 꿈에서 깨어난 것, 즉 우리가 서로를 보살피는 연약한 존재들의 집합체이고 가장 큰 몫을 하는 이들이 인간 삶의 현실이라는 현실과의 대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는 이 돌봄 노동 중 과세되고, 임금이 적고, 매일 굴욕을 당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로지 환상에 빠지고, 임대료를 받고, 일반적으로 물건을 만들고, 고치고, 움직이고, 운반하거나 다른 생명체의 필요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꿈에서 흔히 일어나는 무의미한 일들처럼, 이 모든 것이 일종의 설명할 수 없는 의미를 갖는 현실로 다시 빠져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자신의 작업이 다른 사람에게 더 분명하게 이익이 될수록 그에 대한 대가를 덜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완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 아니면 금융 시장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생명체를 파괴하도록 추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 투자를 유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비상사태가 종료되면 실제로 우리가 배운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경제’가 무엇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부유한 사람들의 총체적인 욕구를 도표화하는 방법일 뿐이며, 그들 중 대부분은 적어도 약간 병적이며, 그들 중 가장 강력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계획하는 벙커에 대한 설계를 완료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집단적으로 기본적인 상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그들 하수인의 강의를 믿을 만큼 어리석은 짓을 계속한다면 다가오는 재앙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서양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레이버는 민주주의가 서양의 발명품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부정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개별 도시 국가의 통치자와 그 신민 사이의 사회적 계약을 통하여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음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마야문명에도 민주주의는 존재하여 다양한 작은 도시 국가로 완전히 분권화되었으며 일부는 분명히 선출된 지도자가 있었다.

서양인에 의한 정복은 페루와 멕시코에서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고 마야 공동체는 지난 500년 동안 지속적으로 반항적이어서 적어도 일부는 무장 반란 상태에 있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고, 특히 현재의 글로벌 정의 운동의 물결이 EZLN(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사파티스타는 합의에 따라 운영되고 성인 남성의 전통적 우위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성과 청년 코커스로 보완되는 공동 집회가 소환 가능한 대의원과 함께 평의회에 의해 함께 짜여지는 정교한 시스템을 개발했다.

멕시코 삼현금을 연주하는 사파티스타. 사진=위키백과

그들은 그것이 마야어를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수천 년 동안 스스로를 통치해 온 합의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급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 자치 방법에 대한 초기 경험이 있어 국가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에 속한다.

인도의 간디식 사회주의 직접 행동 단체와 같은 이질적인 그룹을 포함하는 자율성, 수평성 및 직접 민주주의의 원칙에 기반한 국제 네트워크를 형성한 사파티스타는 뒤에 세계시민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사파티스타는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개념과 공동선을 위한 호혜성 및 공동체 사회 조직이라는 토착적 개념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는 당대 인도에 다수 존재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불교 사원의 통치에서 공예 길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으므로 인도는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한 간디와 같은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당대의 마을이나 부족 단위의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매우 제한적인 민주주의이며 압도적 다수의 인구(여성, 노예, 불가촉천민을 비롯하여 외부인으로 정의된 사람들)가 완전히 박탈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대 민주주의의 한계는 아테네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근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한계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임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한계를 이유로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플라톤식의 전체주의를 긍정하는 위험도 안게 된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민주화될 수 없다”

그레이버에 의하면 국가는 본질적으로 진정으로 민주화될 수 없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조직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주의자들이 민주주의가 부의 불평등에 기초한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줄 바로 그 민중을 억제할 수 있는 강제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적 광장 공포증’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의 경우 바로 촛불에 대한 공포증이다. 좌우익 대립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파티스타의 반응은 혁명이 국가의 강압적 장치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문제라는 개념을 버리고, 대신 자치 공동체의 자기 조직화에서 민주주의를 재정립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회의 석상에 함께 앉아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 그들 자신의 모든 일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정직하게 믿느냐에 달려 있다. 무기의 힘에 의해 뒷받침되는 결정을 내리는 엘리트가 그들을 위해 그것을 관리하거나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이 시도하도록 허용될 권리가 있는지 여부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그러한 질문에 직면한 전문 지식인은 거의 보편적으로 엘리트 편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압도적 다수가 여전히 다양한 추악한 거울에 현혹되어 있고 대중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없다. 그러나 이것도 바뀔 수 있다고 사파티스트나 그레이버나 간디는 믿었다. 바로 아나키즘에 대한 믿음이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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