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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에 대한 세 가지 학문적 지평
놀이에 대한 세 가지 학문적 지평
  • 이승건
  • 승인 2021.04.0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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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 _ 『미학 편지』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 안인희 옮김 | 휴먼아트 | 261쪽

미학의 한 개념으로서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의적 행위를 뜻한다. 또한 순수 쾌감을 야기 시키는 미적 무관심성(ästhetische Interesselosigkeit)과 관련이 깊은 매우 중요한 미학적 개념 중 하나이다. 특히 미적 대상을 마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심미적 경험을 환기시키려는 향수자의 미적 태도를 설명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자기 목적성을 정체성으로 하는 ‘심신의 자기목적적인 자유 활동’이 강조되는 개념적 장치이기도 하다. 

실러, 교육의 테두리에서 놀이를 조망하다

이와 같은 놀이의 개념에 학문적인 초석을 다진 학자를 꼽는다면 아마도 독일 미학자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래의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 식 사유하는 인간(homo sapiens)과도, 그리고 모더니즘적 인간상인 쉘러(Max Scheler, 1874~1928) 식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과도 구별되는, 즉 인간성의 근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생명의 표현으로서 감각계에 있어서 동적인 힘들인 충동(Trieb)에 근거한 인간학적 지평의 성찰로서 교육에 관한 미학적 견해를 피력하는 27통의 편지를 묶은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in einer Reihe von Briefen, 1795)를 통해서 놀이(Spiel) 개념에 의한 인간의 규정을 내 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인희 역, 『미학 편지: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실러의 미학 이론』, 휴머니스트, 2018(1판4쇄), 261쪽

Ⅰ. 중재의 놀이 미학 ―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1795)

실러는 인간학적 지평에서 예술과 미를 논한 근대미학자이다. 특히 그의 주된 연구 대상은 진정한 인간적 활동으로서 예술과 그때의 예술이 추구하는 미 그리고 예술 활동의 주체로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었다(첫째 편지).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인간의 최초의 기본적인 정신활동으로 간주된다. 인간의 원초적 활동으로서 예술은 실러의 말대로 인간의 생명인 충동(Trieb)에서 출발한다. 그는 놀이 개념을 철학 및 미학 개념으로 정립 시킨 사상가답게 인간성의 근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생명의 표현, 즉 감각계에 있어서 동적인 힘들인 충동에 주목한다. 인간은 변화하는 상태(Zustand) 속에서 불변의 인격(Person)을 실현하기에(열한째 편지), 그것의 이성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의 과제는 절대적 형식성과 절대적 실재성이라고 하는 이중의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이것에 상응하는 인간에게는 두 개의 충동이 작용하는 바, 하나는 불변의 자아에 속하는 형식충동(Formtrieb)이라고 부른다(열두째 편지).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상한 변화 속에서 파악해 가는 소재충동(Stofftrieb)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모순되기에 인간본성의 통일을 위해서는 제3의 유희충동(Spieltrieb)의 존재가 요구된다는 것이다(열넷째 편지). 결국 실러는 이 유희충동에 의한 감성이 이성을 용해시키는 우아미(Anmut) 상태의 아름다운 영혼(Schöne Seele)을 우리 인간이 소유하기를 원했으며, 또한 이와 같은 교양 있는 인간을 위해 미적 교육(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을 펼칠 것을 주장하는데, 그의 입장은 인식능력들의 조화나 주관의 역할을 강조한 칸트 식 중재의 놀이(Vermittlungsspiel) 개념과 맞닿아 있는 중재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호이징하와 카이와, 놀이연구자의 계보를 잇다

사실, 실러에게 있어서 놀이는 인간학적 지평의 토대이다.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성질, 즉 감성과 이성을 본성으로 소유한 인간! 이 미학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놀이의 개념으로써만 해석이 되는 유일한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의 경우에만 유희하며, 유희하는 한에서만 온전한 인간인 것이다’(열다섯째 편지)라는 명제와 함께, 놀이를 예술영역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삶의 영역에로 확산시켜 그 의미를 재생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쨌든, 서양의 근대미학에서 실러에 의해 제기된 미학적 용법으로서 놀이 개념은 이후 호이징하(Johan Huizinga, 1872~1945)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와 카이와(Roger Caillois, 1913~1978)의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 1958)의 연구를 거치면서, 중재의 놀이 미학을 넘어 놀이의 문화학(호이징하)과 놀이의 사회학(카이와)으로 확장되면서 신체활동의 놀이영역으로서 무용 및 경기(스포츠)에 관한 신체문화에 이르기까지 미학적 담론의 장을 형성시켰다고 하겠다. 

Ⅱ. 놀이의 문화학 ― 『호모 루덴스』(1938)

그러나 이와 같은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과 관련된 놀이 개념에 의한 인간 규정은 모든 형태의 인간 문화에 있어서 그 기원에는 놀이의 요소가 숨겨져 있으며 인간의 다양한 공동체 생활, 심지어는 ‘전쟁마저도 놀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호이징하의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문화인류학적 인간 규정으로 다시 등장한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라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에서의 호이징하의 놀이에 대한 규정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화는 ‘놀이 정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과 직결되고 있다. 

호이징하는 ‘놀이는 태초부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기에 이르기까지 항상 문화현상 속에 함께 있었고 그 속에 충만해 왔음을 우리는 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김윤수 역, 『호모루덴스』, 까치출판사, 1991, 14~15쪽)고 주장하며, ‘놀이로서의 문화’(67쪽) 개념을 상정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놀이란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67쪽)이기에, 문화 속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 규정되고 있다. 특히 그는 ‘문화의 창조적 기능’으로서 놀이가 ‘독립적 범주’(17~18쪽)임을 확인하며, 경기 및 법, 전쟁, 지식(철학을 포함하여) 그리고 예술(시, 음악, 무용, 조형예술 등)의 근저에는 놀이가 자리 잡고 있음 강력히 주장한다.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도서출판 까치, 1991(7판)

그런데, 호이징하는 현대의 문화가 아쉽게도 이와 같은 놀이의 성격을 상실해 간다고 진단한다. 특히 ‘현대의 스포츠는 점점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어 순수한 놀이적 특질이 불가피하게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스포츠는 더 이상 고대의 올림피아 제전처럼 생생한 놀이가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즉, 현대의 스포츠는 놀이 집단이 그리고 경기가 이제 더 이상 놀이가 아닌 사람들을 분리시켜 경기능력으로는 우월하지만, 그 지위로는 진정한 놀이꾼보다 낮은 등급을 그들에게 매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이징하에게 있어서 현대 스포츠의 프로페셔널 정신은 진정한 놀이의 정신이 아니다(255~256쪽).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놀이의 형식적 특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이것을 통해 ‘사회적 단체의 형성을 촉진’시켜야하기 때문이다(26쪽). 그런데 현대 스포츠의 프로페셔널 정신은 이와 같은 놀이의 특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런 상황은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현대 스포츠를 고대의 올림피아 제전과 비교해 볼 때, 자유정신에 의한 고대의 제의적 경기들은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 사회의 여러 문화 현상들을 파생시켜 사회적 형성을 이룬 반면, 현대의 스포츠는 삶과는 완전히 유리된 스포츠 자체의 형식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현대 스포츠에 대한 호이징하의 이와 같은 진단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이런 이유에서 그에게 있어서 현대의 스포츠는 ‘점점 더 진정한 놀이 영역과는 거리가 먼’(256쪽) 곳으로 치닫는, 그래서 마침내 놀이와는 별개의 고립된 것이 되고 마는 신체활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하튼, 놀이를 문화사적 조망에서 접근하여 신체활동으로서 경기와 스포츠 그리고 신체활동의 예술로서 무용에 관해 문화적 특성을 규명한 호이징하 덕분에 우리는 신체활동의 원천으로서 놀이에 관한 신체미학적 담론의 장이 적극적으로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Ⅲ. 놀이의 사회학 ― 『놀이와 인간』(1958)

그러나 이와 같은 호이징하의 놀이에 관한 문화사적 고찰은 프랑스 문화사회학자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 1913~1978)의 비판적 연구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 1958)에서 좀 더 정교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카이와는 먼저, 호이징하가 그 이전에 누구도 놀이의 존재나 영향을 인식하지 못한 곳에서 놀이를 발견하여 그 증명작업을 훌륭히 해냈다고 평가한다(이상률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2003, 25쪽). 이와 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카이와는 호이징하가 ‘놀이 자체에 대한 서술과 분류를 당연한 것처럼 고의로 빠뜨렸고’ 또한 ‘놀이가 모두 똑 같은 욕구에 대응하며 한결같이 똑 같은 심리적 태도를 표현한 것처럼 취급’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카이와에게 있어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는 ‘놀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문화영역에서의 놀이 정신의 ―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느 특정 종류의 놀이, 즉 규칙(régle)이 있는 경쟁 놀이를 지배하는 정신의 ― 창조성에 대한 탐구’라고 그의 놀이 연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25~26쪽). 물론, 카이와에게 있어서도 놀이(jeu)의 본질적 특성은 ‘놀이꾼(joueur)의 자유로운 개성의 표현’이다. 즉, 이 말은 음악가나 배우 같은 연기자(놀이꾼)의 스타일, 즉 양식을 뜻하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역(役)을 연기하는(노는) 독자적인 성격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대본이나 악보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연기자(놀이꾼)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뉘앙스나 변화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놀이의 특성이라고 주장하듯이(11~12쪽)하듯이, 그에게 있어서도 놀이 정신은, 호이징하에서처럼, ‘자유로운 행위’에 닿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와는 호이징하의 놀이 연구에서 행하지 못한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즉 ‘놀이의 분류’에 착수하여 놀이 영역을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로 범주화하고 자신만의 매우 독창적인 놀이 연구를 개진시킨다(37쪽). 다시 말해, 카이와는 다음의 네 가지 범주의 놀이 영역을 ‘규칙’과 ‘의지’의 두 개념을 작동시켜 명확히 함으로써 놀이 연구가로서 입지를 확고히 한 듯 보인다.

이상률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2003(1판 6쇄)

먼저, 그가 분류하는 놀이로서 아곤(Agon, 그리스어로 시합, 경기를 뜻함)은 규칙이 있으면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즉, 아곤은 규칙에 입각한 경쟁의 놀이이기 때문에 운동경기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 경쟁을 통해 자신의 우수성 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표현하는 놀이로 규정되고 있다. 이 범주의 놀이에서는 순위와 명성이 중요하며 축구(스포츠), 구슬치기, 체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알레아(Alea, 라틴어로 요행, 우연을 뜻함)는 규칙은 있으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즉, 아곤과는 정반대로 놀이하는 자에게 달려있지 않은 결정, 그가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결정에 기초하는 모든 놀이(우연놀이)가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이때의 기대심리는 또 다른 ‘운'을 기대하면서 놀이에 끊임없이 몰입하게 하도록 막연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 놀이 범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알레아는 요행을 바라는 기대심리로 옮겨질 때 가장 강한 중독성을 지니며 룰렛, 제비뽑기(추첨), 주사위 등이 이 놀이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또한 미미크리(Mimicry, 그리스어 미메시스가 어원. 흉내, 모방, 의태(擬態)를 뜻함)는 규칙은 없으나 의지를 반영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즉, 흉내 내거나 가장하여 노는 일에 규칙이 있을 수 없지만 어떤 것을 따라하고 싶은 의지가 반영되는 놀이의 범주로서, 놀이하는 자가 가면을 쓰거나 가장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가 즐거움을 일으킨다는 것이 미미크리가 주는 재미의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범주의 놀이에서는 자기 정체성의 표현 및 인격의 표현이 중요하며 가면무도회, 연극, 소꿉장난 등이 여기에 위치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링크스(그리스어로 소용돌이를 뜻함)는 규칙도 없고 의지도 반영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고 맑은 의식에 일종의 기분 좋은 패닉(공포) 상태를 일으키려는 시도로 이루어진 놀이 범주로서, 현기증(ilingos)의 추구를 기초로 하는 놀이라는 것이다. 일링크스의 대표적인 영역은 회전이나 낙하 등의 빠른 운동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 기관의 혼란과 착란의 상태를 일으키는 오락(롤로코스트, 번지점프 등)이 여기에 속하며, 현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일종의 경련(가슴졸임), 실신상태(흥분) 또는 크게 놀라는 상태(얼떨떨함)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39~57쪽).

그러나 호이징하를 비판하며 이와 같은 독창적인 새로운 놀이 연구를 행하는 카이와에게서도 호이징하의 놀이 연구를 참조한 흔적이 목격된다. 앞선 호이징하의 놀이 연구에 대한 카이와의 평가 ― 문화영역에서의 ‘규칙’이 있는 경쟁놀이에 대한 탐구 ―에서도 보았듯이, 카이와의 놀이 분류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개념(규칙과 의지) 중 하나, 즉 규칙은 호이징하의 놀이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갖는 개념적 장치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카이와 덕분에, 미학적 개념으로서의 놀이는, 우리시대의 스포츠계 및 무용계에서도 관심의 영역으로 부상되었다. 예를 들어, 놀이는 체육ㆍ스포츠 및 무용의 고유한 성질과는 맞지 않는 어린이의 장난과도 같아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는 신체 활동이라는 놀이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태도라든지, 또는 놀이는 노동을 끝낸 후에 몸과 정신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으로서 ‘순수한 오락성’을 갖는다는 주장과는 달리, 놀이는 이제 ‘놀이 정신’(l'esprit de jeu)에 의한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서 신체활동의 놀이성에 관한 의미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쨌든, 서양의 근대미학에서 쉴러를 통해 제기된 미학적 용법으로서 놀이 개념은 20세기 초반의 호이징하와 카이와의 연구를 거치면서, ‘중재의 놀이 미학’을 넘어, 문화적 용법으로 자리 잡아 신체활동의 놀이영역으로서 경기 및 스포츠에 관한 신체문화에 이르기까지 미학적 담론의 장을 형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놀이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 호이징하와 카이와! 이 두 학자들은 놀이를 문화현상으로 인식하여 신체활동을 포함하는 모든 형태의 문화가 그 기원에서 놀이의 속성을 지니며, 또한 인간의 공동체 자체가 놀이의 형식을 갖는다는 ‘놀이 문화론’과 ‘놀이의 사회이론’을 펼쳤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유래가 없는 팬데믹으로 인해, 외출과 만남을 자제하고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외로움이나 고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는 요즘, 실러 식 유희충동을 음미하며 ‘잘 노는’ 인도어(indoor)의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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