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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신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
그리스·로마 신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
  • 이승건
  • 승인 2022.12.3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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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 『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 지음 |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제1판 4쇄) | 328쪽

그리스ㆍ로마 신화, 인문학 정서 함양의 필수 아이템

고등학교 재학시절,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고전100선’이라는 독서목록이 있었다. 아마도 교양인에 걸맞은 인문학적 지식을 고전 서적으로부터 채워보라는 교육적 의도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서평자 역시 이때 한국문학 단편을 비롯해서 청소년을 위한 그리스ㆍ로마 신화 이야기를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에서는 인문주의(Humanism)를 표방한 르네상스 시대 때, 이탈이아 대학에서 중세의 자유7학예(septum artes liberales: 문법, 수사학, 변증론,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에다 도덕철학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시, 역사를 포함시킨 문예를 가르친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을 통해 인간다움에 근거한 고전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바 있다. 사정은 다르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 또한 자신의 저서 『에밀』(1759)의 제4부(15세부터 20세까지의 청년교육)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교육과 더불어 역사와 시를 통한 정서교육을 빼놓지 않고 있다. 

서양의 고전 문학작품 중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대한 우리나라에서의 관심은 때론 열광적으로 또 때론 미비할 만큼 그 진폭이 컸다고 보인다. 한편으로 이 분야의 전공자들에 의한 연구 및 원전의 번역에 의해 촉발된 세간의 관심이 잔잔하게 흘러왔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신화를 기반으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이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다시금 작품의 원전격인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대한 재조명이 대중들에 의해 크게 강렬하게 펼쳐졌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대한 후자의 관심이 폭넓게 확산되기 이전에도, 전자와 같은 관심과 열정은 꾸준히 존재해 왔고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ㆍ로마 신화의 1차 원전과 신화 연구서들에 관한 우리말 번역은 이런 상황의 최전방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관한 몇 권의 1차 원전 중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Theogonia)는 총 1022행의 서사시인데, 우주의 기원과 탄생, 제우스와 아폴론 같은 인격신뿐만 아니라 대지, 밤, 잠과 죽음 등 자연의 형상까지도 신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기에 ‘신들의 탄생과 우주의 탄생을 노래한 것’으로 평가받곤 한다.

일찍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는데, 최근 것으로는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신들의 계보』(도서출판 숲, 2015(제1판 4쇄))를 꼽을 수 있겠다. 특히 이 번역서는 헤시오도스의 또 다른 서사시(‘일과 날’, ‘헤라클레스의 방패’, ‘여인들의 목록’)를 함께 묶으며, ‘그리스 신화의 주요 신들’(227쪽~243쪽), ‘주요 신들과 영웅들의 가계도’(244쪽~273쪽), 역자 후기에 해당하는 ‘헤시오도스 작품의 이해’(274쪽~306쪽), 참고문헌(307쪽~308쪽)과 찾아보기(309쪽~328쪽)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번역자의 또 다른 번역서(『신통기』, 한길사, 2004)(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16)와 거의 동일한 번역서로서, ‘여인들의 목록’과 ‘헤라클레스의 방패’의 순서만 바꾸었을 뿐 내용을 같다.

 

예술의 신 9명 등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신들의 이야기

서평자는 번역자의 2004년 판 번역서(한길사 출판)를 먼저 보았다. 특히 ‘서사’(序詞)(1행~115행) 부분에서 예술의 신, 즉 9명의 무사이(mousai, 단수 mousa 무사)를 처음으로 명명한 이가 헤시오도스라는 점에 끌려 한참을 읽었었다. 그래서인지 속표지 안쪽의 참고도판(4개)의 첫 번째 것 역시 무사이와 관련한 이미지(안톤 라파엘 멩스의 〈파르나소스〉, 1761)를 이 책은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번 서평의 대상인 『신들의 계보』(도서출판 숲, 2015(제1판 4쇄))에서도 본문에 앞선 14개의 참고도판 중 맨 마지막 것으로 무사이와 관계된 〈파르나소스〉(안톤 라파엘 맹스 작)를 제시하고 있어 본문 서사의 내용과 바로 연결되는 독서의 흐름을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동일 번역자의 두 가지 번역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무사이 관련 참고도판의 작가는 사실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 1728~1779)가 아닌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이다. 작품의 제작연도 역시 〈파르나소스 산〉(1497)이다. 번역서에서 작가와 제작연도를 다르게 제시하고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해당 작품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들의 이야기를 왜 좋아할까?

만테냐가 그린 작품의 제목인 파르나소스 산은 아폴론 성소로 유명한 그리스 중부에 위치해 있는데, 로마 시인들 사이에서 영감의 원천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림을 보노라면, 화면 중앙에 아홉 명의 무사이가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이들 양 쪽으로 오른쪽에는 페가수스와 함께 서 있는 메르쿠리우스가, 왼쪽에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는 아폴론이 보인다.

이 둘은 화면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실은 구도나 주제 면에서 서로 대응하는 등장인물들이다. 왜냐하면 화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봤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페가수스와 무사이를 통제할 뿐 아니라 화면 중앙 상단의 마르스와 베누스가 벌였던 불륜의 연애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던 인물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파르나소스 산 정상에는 두 연인이 침대를 옆에 두고 서 있다. 그러나 화가는 자신의 여인에게 배신당한 헤파이스토스(『신들의 계보』, 945~946행에서 등장)가 분노에 휩싸인 채 대장간에서 복수의 그물을 짜고 있는 장면을 화면 왼쪽 원경에 배치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듯 이 그림은 무사이들에 초점을 맞춰 읽을 것인지, 아니면 두 연인의 불륜과 분노에 찬 배신당한 남편에 맞출 것인지에 따라 읽는 깊이가 달라진다. 서평자는 당연 예술의 신들 모습에 시선을 멈추었었다. 오늘날에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가져다주는 인물이나 사건 등을 ‘예술가의 뮤즈’로 그 의미를 달리 잡는 경우도 목격되지만(예를 들어, 유경희 지음, 『예술가와 뮤즈』, 아트북스, 2003), 그리스ㆍ로마 신화 속 무사이는 언제나 9개의 예술영역을 담당하는 대표선수였다. 특히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4) 제5부 ‘무사이의 탄생 외’에서 천문학의 무사 우라니아를 시작으로 무사이의 맏이 서사시의 무사 칼리오페의 예술행위로 이들을 소개한다.  

 

시대를 달리하는 문헌을 읽기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거기에 문화의 차이까지 존재하는 서양의 신화 책을 독파하기엔 더욱 그렇다. 우리에겐 이방의 신들 이야기이지만, 우리도 서양인들처럼 그리스ㆍ로마의 신들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살아 숨 쉬게 하자면, 신화를 비롯한 서양의 1차 고전 문헌의 번역과 그와 관련한 연구들이 왕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언제든지 그때그때 시대에 맞는 현재적 상황 속에서, 우리의 미술이나 연극 그리고 영화 등 예술이라는 보편적인 옷을 입혀, 우리들 정서로써 우리들과 함께 생생하게 곁을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한국 신화 속 이야기(집을 지켜주는 성주신, 화장실에 있는 측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그리고 도깨비와 삼신할매 등)가 특수하게 곁들인다면, K-Pop과 K-Film에 이어 K-Food나 K-Myth에 세계인이 주목하며 한 번 더 K-Culture의 깊은 맛에 빠져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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