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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감정이입’ 충동…예술창작의 근원적 두 성향
‘추상·감정이입’ 충동…예술창작의 근원적 두 성향
  • 이승건
  • 승인 2023.05.2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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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추상과 감정이입』 | 빌헬름 보링거 지음 | 권원순 옮김 | 계명대학교출판부 | 1982 | 167쪽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 또는 서정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 그리고 이지적 추상 등 추상화에 대한 얘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사실, 추상이라는 말이 미술론에 도입된 것은 미술 평론가 리드(Herbert Read, 1893~1968)의 지적대로(『근대미술의 철학』, 1955,) 현대미술에서 추상화의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보링거(W. Worringer, 1881~1965)의 저서 『추상과 감정이입: 양식심리학을 위한 기고』(Abstraktion und Einfühlung: Ein Beitrag zur Stilpsychologie, 1908)와 깊은 관련이 있다. 크게 두 부분(제1편 이론 / 제2편 실제)으로 나뉘는 이 책은 모두 다섯 개 장으로 구성하고 있다. 즉, 제1편에 두 개(제1장 추상과 감정이입, 제2장 자연주의와 양식) 그리고 제2편에 세 개(제3장 장식미술, 제4장 추상과 감정이입의 관점에서 골라낸 건축 및 조각의 예, 제5장 르네상스 이전이 북방예술)로 묶고 있다. 여기에 부록(예술에 있어서 초월성과 내재성)이 첨부된 현재와 같은 판형은 1910년에 다시 출간(제3판)하면서부터이다.

 

저자는 ‘조형예술 영역에 속한 예술작품의 미학에 대해 얼마간의 기여’를 하고자 이 책을 저술한다고 밝히고 있다(11쪽). 특히, 당시 독일 미학계에 있어서 예술에 대한 하나의 이론, 즉 테오도르 립스(Th. Lipps, 1851~1914)의 감정이입 개념을 받아들이는(12쪽) 동시에 미술 발전의 내재적 동인으로서 미술사학자 리이글(Alois Riegl, 1858~1905)이 주장한 예술의욕(Kunstwollen) 개념을 광범위하게 참조하면서(19쪽), ‘추상충동(Abstraktionsdrang)에서 출발하는 하나의 미학’(13쪽)을 감정이입충동(Einfühlungsdarng)에 반대극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통해, 이 두 충동이 예술창작의 근원적인 두 뿌리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선다(제1장). 

 

사실적 묘사, 외부세계에 대한 범신론적 친화관계
추상, 정신적 공간공포의 해소

보링거에게 있어서 유럽의 전통적인 미술은 ‘인간과 외부 세계의 현상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관계를 조건’(27쪽)으로 하는데, 특히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유기적인 생명으로 돌아가려는 ’행복감의 가치‘(Beglückungswert)(24쪽)를 추구하는 예술로 간주한다. 반면에 외계 현상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커다란 내적 불안에서 생긴 결과인 추상충동은 정신적 공간공포(geistige Raumsheu)라고 부르며(27쪽), 특히 피라미드의 생명 없는 형태나 비잔틴의 모자이크에 나타나는 것 같은 생명억압의 표현(25쪽)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보링거는 인간과 외계 현상 사이의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관계에 근거하는 감정이입충동과, 외부 세계에 의해 야기되는 인간의 내적 불안에서 기인하는 추상충동이라는 두 가지 심리적 방향을 들어, 특히 후자의 개념을 통해 그동안 등한시 되어 왔던 원시민족이나 동방민족의 미술을 정당하게 평가하고자 했다. 더욱이 추상충동은 원시민족에서와 같은 인식 이전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을 넘어선 것이라고 한다(28쪽). 다만, 미개인의 추상충동은 자연 속의 합법칙성을 구하려다가 정신력의 무력감을 느끼고 대담한 비유형식을 채용한 것에 비해, 현대와 같은 ’높은 문화단계의 사람들에게 다시 추상충동이 일어난 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난 수천 년 동안 합리적인 인식의 길을 더듬어 오다가 ’비로소 다시 지(知)에 대한 궁극적인 체념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6~30쪽).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미술과 조우(遭遇)

미술사에서 추상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의 출간과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다. 이 시기는 예술가들에 의해 산업화된 도시의 추한 모습을 현실적인 주제와 왜곡된 형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을 이끈 그룹 중 하나인 다리파(Die Brücke)에 속한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28)와 놀데(Emil Nolde, 1867~1956)와 같은 화가들은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불안을 전통적인 유럽 미술의 표현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단순화된 선이나 격렬한 색채를 통해 비사실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표현주의 미술가 그룹인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는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을 접하며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데, 이 책을 읽은 이 그룹의 일원인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가 칸딘스키(W. Kandinsky, 1866~1944)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상에 대한 보링거의 인식이 자신들의 그룹에서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그 결과 그들이 추구하는 추상회화의 이론적인 초석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을 통해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두 그룹은 현대미술사에서 각각 형상적 추상과 서정적 추상을 이끈 아방가르드로 평가한다.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하나의 시선, 양식심리학

미술에서 추상은 현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독일의 미학적 미술사학의 계보에 위치한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 책에서 독일 표현주의 미술과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과 연관된 당대의 추상미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추상충동으로 해석되는 과거의 예술(고대동방의 미술이나 비잔틴의 모자이크 등)을 정당하게 바라보는 폭 넓은 시야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링거 덕분에 미술의 역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밝은 눈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 즉 심리적인 부분에 기초한 그의 예술이론이 서로 다른 문화의 영역이나 시간적인 간극을 아우르는 예술의욕에 관한 양식심리학의 미술사로서 말이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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