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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연극을 읽다
미술로 연극을 읽다
  • 이승건
  • 승인 2021.10.29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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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명화의 실루엣』 | 박연실 지음 | 이담북스 | 424쪽(부록 제외)

미술로부터 비극으로 다시 비극으로부터 미술로
그리스 신화·문예작품이 원작인 읽는 미술 세계

한 끼 식사로 중국음식을 정하노라면 메뉴 선택에 망설이던 시절이 있었다. 짜장면으로 할까? 짬뽕으로 할까? 그러나 고맙게도 언제부턴가 차림표에 짬짜면이 올라와 욕심 많은 우리의 입맛을 충족시켜 주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두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술의 한 장르를 넘어서 두 개 이상의 예술을 동시에 감상할 수는 없을까? 최근 미술작품을 통해 연극에 빠져들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선보였다. 

163쪽(그림84)에 수록한 앤서니 프레더릭 어거스트 샌디스 作, 「트로이의 헬레네」(1867, 워커 아트 갤러리)를 표지 모델로 삼은 책의 겉장

『명화의 실루엣』! 책 제목만으로 보면 여지없이 미술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니, 실루엣이란 제목 속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실루엣이란 인물이나 사물의 외관을 대충 나타내는 그림 또는 그러한 현상을 뜻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실루엣을 ‘명화에 담긴 그리스의 비극 이야기’ 쯤으로 제시(서막, 7쪽)하고 있는 듯하니, 이 책은 명화(미술)와 비극(문학),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관련을 맺는 시각예술이 주인공인 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서막, 제1극(그리스 비극의 제1인자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개 작품), 제2극(당시 일반 대중들의 사랑을 가장 듬뿍 받은 극작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11개 작품), 제3극(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로 소포클레스의 비극 6개 작품)’으로 목차를 구성하고 있음으로 해서, 극을 다루고 있는 서적의 성격을 스스로 강하여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시각예술이 주인공

이처럼,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들이 탄생시킨 비극 작품 20개를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당대 및 후대의 시각예술 작품(회화, 조각, 도자기 등) 201점을 수록하고 있는바, 특히 미술 작품이 지니는 조형적 특성(형과 색 및 구도, 비례, 대비 등)의 설명을 통해 시각성을 디딤돌로 하여 우리를 비극의 세계로 초대한다. 미술로부터 비극에로 또한 그 역으로 비극에서 미술에로 심미적 감상의 폭과 깊이의 확장을 제안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마치 동양예술에 있어서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처럼 시화일률(詩畫一律)의 입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미술작품들은 화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해 독창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신화나 문예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재창조된 소위 보는(視) 작품이 아니라 읽는(讀)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비극작가들이 그 내용을 응용하거나 변형하여 새로운 플롯으로 구상한 창작극”(서막, 7쪽)이라고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그리스 비극은 하나의 ‘있음직한 이야기’(mythos)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자면, ‘가능하나 믿을 수 있는 이야기보다도 불가능하나 믿을 수 있는 이야기’(『시학』, 9장)의 모방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무엇보다도 비극시인은 청중이 동감할 수 있도록 개연성과 필연성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잘 꾸며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훌륭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나뉘는데, 바로 비극의 제1요소인 뮈토스(플롯)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하기에 읽는 작품의 범주에 속하는 미술작품이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으려면 비극작품과 닮아야만 했다. 그 결과 이미지 예술로서 회화(시각예술)는 언어예술로서 시(비극)를 자신의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르네상스 미술론의 거장 알베르티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실인데, 그는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며 줄거리를 구성하는 읽는 그림으로서 역사화(istoria)를 최상급의 회화작품으로 언급하는 이곳저곳에서 화가가 시인이나 수사학자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노성두 옮김, 『알베르티의 회화론』, 서울: 사계절, 1998, 74쪽~106쪽).

알베르티와 동시대의 예술인문학자들은 의미심장한 인간행위를 다루는 회화(역사화)야말로 진지한 화가의 주된 과업이라고 여겼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비극의 정의 중 ‘진지한 행동의 모방’(『시학』, 6장)과 맞닿아 있는 바, 시각예술에 있어서 이와 같은 기류는 르네상스를 거쳐 신고전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명화의 실루엣』에서 수록하고 있는 미술작품들 역시 이 대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서평의 대상인 『명화의 실루엣』은 기본적으로 미술서적이다. 읽는 작품을 수록할지라도, 미술책은 뭐니 뭐니 해도 도판이 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나 「라오콘 군상」(그림68, 134쪽)의 전체 형태가 잘리거나, 원작에 훨씬 못 미치는 색감의 이미지 제시(그림147, 291쪽 및 그림152, 303쪽 등)는 편집상의 아쉬움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작품을 시각화한 회화를 다루면서 구도의 분석(그림21, 49쪽 / 그림27, 60쪽 / 그림69, 137쪽 / 그림111, 219쪽 등)이나 색채에 대한 해석(그림1, 17쪽 / 그림69, 137쪽 / 그림200, 415쪽 등)에 의한 저자만의 미술작품을 대하는 심미안은 우리를 한발 짝 더 비극 이야기 곁에서 오래 머물게 하고 있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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