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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론 속에서 찾은 철학적 이데아 개념의 변이(變異)
예술이론 속에서 찾은 철학적 이데아 개념의 변이(變異)
  • 이승건
  • 승인 2020.10.3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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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가 소개할 책은 『파노프스키의 이데아』(에르빈 파노프스키 지음 / 마순자 옮김, 도서출판 예경, 2005)입니다. 독일어 원전은 『예술이론의 한 개념으로서 이데아』(IDEA: Ein Beitrag zur Begriffsgeschichte der älteren Kunsttheorie, Hamburg, 1924)라는 제목으로 거의 100년 전 쯤에 출간된 책입니다. ‘이리 오래된 책을 왜 서평으로 다룰까?’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 책은 도상학(iconology)이라는 미술의 해석적 연구방법론의 제창으로 이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의 초기 저작에 속하는 예술이론서입니다.

 

 

 

저자는 독일식 미술사학(Kunstgeschichtswissenschaft)의 지적 토양*에서 학문적 성장기를 보낸 학자로, 1921부터 ‘33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를 거쳐 교수로 재직하다가 나치스의 유태인 공직 추방 때 미국으로 이주해 1935년부터 ‘62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 교수를 역임한, 미술이론**과 미술사학***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미학이론****의 학문적 전문성을 겸비한 독보적인 인물일 뿐더러, 이 책 『이데아』는 그의 학문적 지평 저변에 깔려 있는 심층수를 만날 수 있는 값진 자료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 미술사학자 포드로(Michael Podro)는 그의 저서 『비판적 미술사학자들』(The Critical Historians of the Art, 1980)에서 독일의 지적 풍토에서 발생한 미술에 관한 일련의 역사적 연구들에 주목합니다. 즉 헤겔미학 내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역사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 슈마르조(August Schmarsow, 1853~1936)의 예술사론을 출발로 하여, 독일식 미술사학의 거장들(정신사로서 미술사 연구계열의 리글(A. Riegl, 1858~1905) 및 양식사로서 미술사 연구계열의 뵐플린(H. Wölfflin, 1864~1945) 그리고 문화사로서 미술사 연구계열의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를 거쳐 그 마지막 주자로서 파노프스키까지의 미술사학사의 이론 및 연구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평자가 보기에, 포드로는 예술의 역사로서 예술사에 대한 학문이 역사주의(Historicism)와 함께 특히 미술 분야에서 19세기에 독일의 지적 풍토에서 등장함을 전제하고, 이러한 학문적 상황은 다양한 예술작품들에 내재된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술사를 기술할 때만이 ‘학문으로서의 미술사’(Kunstgeschichte als Wissenschaft)가 된다는 학적 논의의 미술사 연구의 학문사적 궤적인 독일식 미술사학의 전개를 추적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 「조형예술에 있어서 양식의 문제」(1915), 「뒤러의 예술론」(1915), 『상징형식으로서 원근법』(1927), 『알브레히트 뒤러』(1943), 시각예술의 의미(1955) 등.

 

*** 『도상학 연구』(1939),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1951), 『서양미술에 있어서 르네상스와 르나신스』(1960) 등.

 

**** 『예술론의 한 개념으로서 이데아』(1924) 등.

 

이와 같은 예술에 관한 다각도의 연구업적을 지닌 파노프스키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학계에서는 그를 미술사의 한정된 시각에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파노프스키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의 학문이 미술의 양식(style) 연구로부터 출발해서 도상(icon)에 관한 기술학(graphy)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의미를 파헤치는 도상학(iconology)이라는 미술사 연구 방법론을 확립시켰기에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일 것 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파노프스키의 미술사론 심연에 자리 잡은 미학적 태도가 엿보이는 초기 저서인 『이데아』 책으로부터 그를 심층적으로 조명하면서 그의 학문세계 전체를 아우르려는 좀 더 큰 스케일의 학술적 연구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를 미술사의 울타리에 묶어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초판 서문(foreword)에서 파노프스키가 “이 책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는 에른스트 카시러 교수가 바르부르크 도서관에서 발표하고 『바르부르크 도서관 강연집』에 수록한 「플라톤의 대화록에서의 미의 이데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의 연구는 그의 강연에서 체계적 의미를 명백히 밝힌 바 있는 미의 이데아란 개념의 역사적 운명을 추적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미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미학사적으로 최초로 제시한 플라톤의 미학적 견해에 집중하여 이후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역사적 전개를 이루고 있는가를 멜란히톤(Melanchthon, 1497~1560)에 이르기까지 인문주의(Humanism)의 예술지평에서 세심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기에, 그의 예술에 대한 지적 편력을 쫓아 관련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그 자체가 너무나 난해하여 어지간한 독자들에게는 독해가 허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평자가 미학적 견해가 물씬 풍기는 파노프스키의 이 책 『이데아』를 만난 것은 1987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과정에서 논문을 준비 중인 연구조교 신분이었는데, 스승이신 미학과 학과장 임범재(林範宰) 선생께서 이때 막 신설된 예술학과 학부생들의 스터디 그룹을 결성시켜 5~6명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히는 향도(嚮導)의 역할을 서평자에게 부여하면서였습니다. 이후 스터디 그룹의 멤버들이 졸업을 하고, 또 다른 멤버들이 채워지면서, 소위 ‘이데아 팀’은 파노프스키의 『이데아』 책을 비롯하여 『시각예술의 의미』와 『도상학 연구』 및 『서양미술에 있어서 르네상스와 르나신스』, 『상징형식으로서 원근법』, 「예술의욕의 개념」 등 그의 주요 저서들을 독해(讀解)했고, 파노프스키에 관한 연구서들(예를 들어 Michael A. Holly, Panofsky the Foundation of Art Histor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4)와 Silvia Ferretti, Cassirer, Panofsky, and Warburg (tr. by Richard Pierce, Yale University Press, 1989) 등)을 미학과 박사과정 재학시절까지 10여 년간 책상 위에서 내려놓질 않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평자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이데아』 책을 처음 손에 잡은 것은 “미술학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미술의 역사적 안목이 숨어 있으며 그것을 미학적 혜안으로 꿰뚫어 보는 최고 인문학자의 글일세!”라고 하며 스승께서 건네주신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영역본(Icon Editions, 1968) 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독일어로 집필되었던 내용인지라 결정적인 부분에서 오역(예를 들어, 독일어 원본의 경우 ‘Bild’(像)와 ‘Abbild’(模像)를 영역본에서는 모두 ‘image’로 번역하는 등)이 의심되어 독일어 원본을 찾게 되었고, 때 마침 불어 번역본도 손에 넣게 되어 파노프스키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조금이라도 가깝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한국어 번역본(예경출판사)이 나왔고, 2007년 1학기에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출강하여 박사과정의 ‘미학특강Ⅱ’ 과목을 맡으면서 다시금 파노프스키의 『이데아』를 영ㆍ불ㆍ독ㆍ한역판을 펼쳐 놓고 독해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손에 잡은 지 실로 3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서평자는 요즘도 이따금씩 파노프스키의 『이데아』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펼쳐보곤 합니다. 꿈 많았던 대학원 시절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상기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거니와, 이론적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창작의 관점에서도 예술의 인문학적 지평을 펼치고 있는 학문적 거장의 아이디어를 훔치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모두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데아』 책은 서양 고대에서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이데아 개념과 그것이 미술이론과 맺는 미학적 관계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는 플라톤이 미의 형이상학적 의미와 가치를 성립시킨 인물임을 강조하면서도 그의 이데아론이 조형예술 그 자체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했다고는 말 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데아론이 조형예술의 미학에서 점점 더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데아론과 조형예술의 이론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문제를 제기한 뒤, 2장부터 6장까지는 각각 고대, 중세, 르네상스, 매너리즘 시기에 변화된 이데아 개념의 미학적 의미를 살피고, 7장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뒤러의 미술이론 속 이데아의 잔향(殘香)을 다루고 있습니다.

 

파노프스키는 이 책 『이데아』를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형예술의 이론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과 시대에 따른 변화상, 한 마디로 ‘미의 이데아라는 개념의 미학적인 역사적 운명’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1장 서론(‘멜란히톤’ 부분, 번역본 15쪽~16쪽)도 밝히고 있듯이, 16세기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멜란히톤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통해 살피고 있습니다. 즉, 

 

“플라톤이 모든 곳에서 이데아를 완전하고 명료한 관념으로 부르고 있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화가) 아펠레스는 인간 신체의 아름다운 모습(image)을 그의 정신(mind) 속에 품고 있는 관념으로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파노프스키는 두 가지 이유에서 멜란히톤의 언급을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첫째는 이데아의 개념이 미술 이론에 대한 개념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한 점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플라톤이 미술 행위의 열등함을 연역해 내곤 했던 이데아 개념이 어떻게 해서 미술의 특별한 이론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파노프스키는 이 문제에 대해, 멜란히톤 자신이 이미 해답을 찾은 키케로(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충)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즉, 고전 고대(classical antiquity) 시대 자체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에 대항하는 무기로 변형시켰고, 그 결과 이데아 개념에 대한 르네상스적인 미학적 견해의 초석을 이미 그 시대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멜란히톤이 생각한 이데아는 더 이상 감각적 외관의 세계나 인간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저절로 존재하는 관념(notions) 또는 개념(conceptions)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아울러, 16세기 사상가들은 이데아를 명백히 예술적 행위를 통해 현시될 수 있는 자명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고전 고대 시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변증론자만의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를 사용하는 화가가 그 예로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1장 서론 맨 앞 페이지에서 제시하고 있는 G.P. 벨로리, 『화가의 생애』(로마, 1672)에
수록된 클루에 作, <이데아> 삽화(번역본 12쪽)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서술되는 내용으로 모두 7장을 구성한 점이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입니다. 다소 딱딱하고 현학적인 문장으로 전개되는 내용이지만, 예술에서의 이론이 어떤 역할을 하며 또 창작에 있어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한 독자가 계시다면, 이 『파노프스키의 이데아』 책을 꼭 한 번 만나 천천히 그 내용을 음미해 보길 권유합니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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