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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몰랐던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
우리도 몰랐던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
  • 교수신문
  • 승인 2020.05.2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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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한다_한국인 이야기│이어령 지음│파람북│432쪽

수미상관 형식으로 이야기 풀어내
이야기꾼의 특성은 인간의 타고난 천성
삼신할매에 대한 역사적 접근 아쉬워

금세기 들어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바이러스 창궐로 인해 지구촌 전체가 하나임을 실감하고 있을 즈음, 세계 각국은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하늘길 바닷길 땅길 할 것 없이 자국으로 유입되는 모든 경로에 대해 하나 둘씩 고강도 폐쇄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아울러 각국의 방역 당국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 등 생활 방역과 개인의 위생관리도 철저히 해 줄 것을 당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의 자가 격리야 그런대로 참을 만하겠지만, 지금껏 나름의 자유를 누려온 현대인들에게 2주 또는 그보다 더 긴 기간 동안을 사회와 단절된 상태로 홀로 지내라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자가 격리에 강한 DNA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니 힘내자!’는 누리꾼들의 기발한 격려 메시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즉, 그 옛날 단군신화의 웅녀가 빛도 없는 깜깜한 동굴에서 삼칠일(21일)을 마늘과 쑥만 먹고 버텨 여인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 후손답게, 코로나-19로 인한 자가 격리가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조금만 더 참고 견뎌, ‘널리 사람이 사는 세상 자체를 이롭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놀랍고 재기발랄한 생각은 어떻게 해 냈을까요? 이 물음에 해답을 건네 줄 한권의 책(이어령,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 파람북, 2020)이 근자에 출간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책의 저자인 이어령(1934~ ) 선생은 국문학자로 문화평론가로 평생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쳐 왔는데, 이 『한국인 이야기』는 ‘희수(喜壽, 77세)에 잉태하여 미수(米壽, 88세)에 늦둥이를 얻은 셈’(395쪽)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10여 년 간 공을 들인 작품으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어지는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정의함에 있어 모방을 인간의 천성으로 꼽은 것처럼(『시학』 제4장), 이야기꾼의 특성(homo narrans)을 타고난 인간의 천성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로서 말입니다. 너랑 나랑 아리랑 꼬부랑 등 이응으로 끝나는 콧소리의 아름다운 우리 낱말에 매료되어 말문을 열어 갑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이야기』는 구성부터가 남다릅니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프롤로그(이야기 속으로: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와 에필로그(이야기 속으로: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에 ‘꼬부랑 열두 고개 이야기’로 펼쳐지는 본문을 배치하고 있는데, 각 이야기 고개마다 3~5개의 토막을 이루며 또한 각각의 토막은 한 단락 정도의 분량에 번호를 매긴 토막글(10개에서 20개)로 채우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한 의미전달을 위한 저자의 기획 의도로 읽히며, 마지막 부분의 ‘저자와의 대화’는 이 책의 탄생에 얽힌 비밀 아닌 비밀이 Q&A 형태의 이야기로 풀어 갑니다. 

글은 전체적으로 아득한 기억 저편의 꼬부랑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구수한 이야기를 저자 특유의 재치와 전문적인 식견으로 감싸며, 첫 번째 이야기인 「탄생」편답게 〈1.태명 고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특히, ‘한때 토박이말들이 한자에 밀려나고 외면당하면서 막말처럼 되어버린’(19쪽) 시절과는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의 토박이말에 ‘이’라는 토시 하나를 붙여(쑥쑥이, 튼튼이, 사랑이 등)(17쪽) 그리고 풍부한 의성어를 이용(꼬물이)해서 배냇말을 지음으로써, 철벽 한자 틀에서 벗어나 엄마 배 속에서부터 새 한국인을 성장시키고 있다(15쪽)고 극찬합니다. 게다가, 국문학자로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천 년 전 옛 우리말 이름들이 면면히 흘러 오늘에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음(18쪽)에도 흐뭇해합니다. 어찌 보면,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인은 완성된 고정 관념이 아니라 생성해 가는 것’, 다시 말해 ‘한국인으로 되어가는 것’(409쪽)이라는 사실을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서평자는 좀 아쉬운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인 〈4.삼신 고개〉 부분인데, 즉 생명의 손도장을 찍는 여신은 ‘은가위와 명주실 다발을 손에 쥔’ 우리의 제주도 삼승할망(119쪽)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존재합니다. 『신통기』에 등장하는 운명의 세 자매 신화가 그것인데, 고야(F. Goya)의 작품에서도 잘 묘사 ― 인간형상의 인형을 생명의 씨실로 짜는 막내 클로토(Klotho: 맨 왼쪽에 위치), 클로토로부터 생명을 얻은 인간들의 잘잘못을 돋보기로 관찰하는 둘째 라케시스(Lachesis: 왼쪽에서 두 번째 위치), 라케시스의 판단에 따라 인간의 생명을 가위로 끊어내는 첫째 아트로포스(Atropos: 맨 오른 쪽에 위치) ― 되고 있습니다. 

Atropos, 123x266cm, 1819~23, Prado Museum, Madrid

저자는 서양의 신화에서와는 달리 우리의 삼신할매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책 어디에도 상세히 언급한 사료는 없다고 말합니다(121쪽). 그러나 삼신할매의 상징은 ‘3’ 아니겠습니까? ‘셋’이라는 숫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전통예술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자연적 대상 속에도 그리고 삶을 꾸려가는 인간 활동의 의식주 속에도 ‘셋’의 의미를 심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까마귀를 ‘셋’으로 표현한 삼족오(三足烏)는 그 대표적인 상징이며,삼일신고(三一神誥)와천부경(天符經)같은 고문(古文)에서는 우리 전통문화 속 ‘셋’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리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세상의 이치를  ‘천(天)ㆍ지(地)ㆍ인(人)’ 이라는 ‘셋’으로 구성하기도 하며, 이를 삼태극으로 그려 내기도 합니다. 더욱이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人中天地人)’ 말에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우리만의 주체적 융합사상 역시 ‘셋’이라는 숫자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절을 해도 세 번! 집을 지어도 세 칸! 어린 아이의 성장과 발육을 보살펴 달라고 치성을 올리는 발심지 역시 세 발 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삼신할매 역시 이와 같은 삼수사상의 민속 버전으로 북방 수렵문화에서의 삼수분화 세계관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서평자는 이 부분에 관한 저자의 접근에서 약간의 갈증을 느꼈습니다.  

진파리 9호 무덤 출토 해모양 맞새김 금동장식 삼족오

그러나 〈1.태명 고개〉를 집필하면서 마치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거로 삼듯이, 전문적인 연구서 보다는, 누리꾼들의 놀이터(인터넷 채팅방, 카톡방 등)를 찾아다니며 궁금증(연구)을 해소하려는 노(老) 학자의 참고자료 수집에 관한 개방적이며 유연한 마음가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태어난 우리도 몰랐던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인 『한국인 이야기』는 시리즈로 출간된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이 맛깔난 이야기꾼의 꼬부랑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 

이승건 (서울예술대학교 예술창작기초학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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