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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쟁이 아버지와 추억의 시간여행, '내 아버지 장욱진'
환쟁이 아버지와 추억의 시간여행, '내 아버지 장욱진'
  • 이승건
  • 승인 2020.06.24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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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장욱진│장경수 지음│삼인│258쪽

화가 예술세계 심연의 예술혼 엿볼 수 있어
마지막 작품 ‘밤과 노인’부터 시간 역순 배치
수록 작품 한 면에 정리되지 않아 아쉬워
내 아버지 장욱진 책 표지

하늘과 땅이 약 1.5 : 8.5 그리고 좌우하단이 6 : 4 쯤으로 분할되는 간결한 구도 속에서 정장(프록코트) 차림의 한 남자가 황금 들녘을 가로질러 화면 밖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말 50년대 초에 3차례 신사실파 동인전에 참가하면서부터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인 덕소시대(1963~75), 명륜동시대(1975~80), 수안보시대(1980~85), 그리고 용인시대(1986~90)로 작품의 성격을 달리한 화가 장욱진(1917~1990) 선생의 그림 속 자신의 모습, 즉 〈자화상〉 한 점이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연을 지닌 채 책갈피(장경수 지음, 『내 아버지 장욱진』, 도서출판 삼인, 2020, 99쪽) 자락에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장욱진, 〈자화상〉, 종이에 유채, 14.8×10.8, 1951

예술가에 관한 책은 몇 갈래로 존재합니다. 먼저, 예술가 자신에 의해 기술된 자서전과 둘째, 예술가를 바라보는 타인에 의해 집필된 전문적 식견의 평전(評傳) 그리고 예술가와 친분을 쌓은 지인에 의한 집필물이 그것입니다. 후자의 것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200여명의 미술가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담은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ㆍ화가ㆍ조각가의 생애』를 꼽을 수 있겠는데, 이 책은 미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려는 연구자들로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미술의 정보를 얻으려는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인기가 높아 전문성과 대중성 모두를 갖추었다는 세간의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서 대열에 속하면서 예술가를 집중 조명한 전문서적은 아니지만, 부정(父情) 가득한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이 맞춰진 한 권의 작가론 『내 아버지 장욱진』은 한 화가의 예술세계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술혼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끔 화가를 에워 싼 숨은 내용을 알차게 품고 있습니다. “학계나 미술계에서 바라보는 화가 장욱진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그려준 풍경과 아버지와 내가 함께 만든 그림을 옮기고 싶다.”(34~35쪽)는 저자(장경수, 장욱진 선생의 큰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명예관장)의 말처럼, 저자는 아버지 장욱진 선생과의 어릴 적부터 쌓은 포근하며 은근한 교감(72쪽의 지금은 사라진 내수동 집을 배경으로 한 〈공기놀이〉(1938)의 설명처럼 그림에 얽힌 이야기 및 142쪽의 선생께서 직접 설계하여 1960년에 완공했다는 명륜동 집 등)을 통해 선생이 작고하신 90년대로 아니 그 보다 훨씬 이전 시대(118쪽의 ‘작은 앉은뱅이책상’ 등)로의 시간여행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고전작품이 3막을 이루고 있듯이, 이 책 역시 세 개의 장(1장 까치를 그리다 / 2장 가족도 / 3장 아버지와의 여행, 아버지로의 여행)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각각의 장마다 다시 세 개씩 작은 꾸러미로 묶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거의 모든 바이오그래피가 연대기 순으로 전개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매정하고’ ‘느닷없는‘ 표현으로 제시되는 선생의 죽음(21쪽)으로부터 글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전개는 아마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을 잃은 허망함과 선생께서 작고하신 지 30년이나 지난 후에 선생에 대한 글을 집필하기 위해 떠 올린, 저자에게 남아 있던 가장 강한 아버지에 대한 회고적 단면이라 여겨집니다.  

〈밤과 노인〉, 캔버스에 유채, 41×32, 1990

이 책을 통해 장욱진 선생의 작품과 만나고자 마음먹은 독자가 있다면, 24쪽의 책장을 넘기고서야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알려진 〈밤과 노인〉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작품을 통해 선생과의 시간여행을 출발하려는 독자들에게 한 화가의 종착역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예술혼을 더듬어 보자는 저자의 강한 집필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수록하고 있는 작품 19점에 대한 목록을 한 면에서 정리하여 제시해 주었다면 더 좋은 편집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아버지 장욱진 선생으로부터 ‘늘 부드러움과 따스함’(110쪽)을 느꼈던 저자에게 아버지의 직업은 대학교수도 화가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환쟁이다.”라는 선생의 말씀처럼(119쪽), 저자의 동생(윤미씨)에게도(124쪽) 그리고 저자에게도(125쪽) 선생은 ‘환쟁이’이셨습니다. 아니, 저자의 눈에 비춰진 선생의 진정한 모습은 사회로부터도 그렇거니와 자신에게조차 구속받길 싫어하는 ‘자유업’에 종사하는 ‘자유인’(120쪽)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점은 선생의 삶에 대한 ‘심플’(119쪽)한 태도에서도 엿보이거니와 단순한 선과 색을 통해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리려한 선생을 닮은 담대한 작품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전경
사진출처 어바웃어북

올해가 장욱진 선생 서거 30주기라고 합니다. 『내 아버지 장욱진』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영국 BBC 가 선정(〈2014 위대한 8대 신설(new) 미술관〉)한 동화 같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3)으로 여름 나들이를 나가, 한국근현대미술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장욱진 선생과 데이트를 해 보심은 어떨까요? 

이승건 (서울예술대학교 예술창작기초학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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